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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저주를 끊어 주는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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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그 가계에 흐르는 어떤 흐름이나 내력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병력이 있습니다. 그 집안 마다 어떤 고질적인 병이 마치 유전처럼 흐릅니다. 또 사고력이 있습니다..
 1998년 뉴스위크지에 미국의 케네디 가에 대한 자세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1)케네디 대통령이 40살에 암살당했고, 2)그의 형 마이클 케네디는 39세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3)그의 아버지 로버트 케네디는 역시 정치세계에 뛰어들었다가 42살에 자식과 함께 암살되었습니다. 4)삼촌도 46살에 암살되었습니다. 5)케네디의 맏형도 6)여동생도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7)그리고 최근에는 1999년 7월16일에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들 케네디 2세가 탄 경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여 그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망했습니다.
그 케네디가는 거의 40세 전후에 비명사했다고 신문사들은 저마다 가계에 흐르는 어떤 흐름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인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국가에 모반을 꾀하면 삼족을 멸했던 것도 다 뜻이 있습니다. 반골의 집안에는 항상 반골이 난다는 위험성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국지나 손자병법 등에도 보면 반골은 용서가 병법상으로 허락되지 않는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두 사람의 장자 얘기가 나옵니다. 첫째가 르우벤입니다. 12 형제 중 실제적인 장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창49:3-4)
르우벤의 집안은 탁월하지 못한 가계의 저주가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넷째 아들인 유다는 어떻습니까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창49:8-12)
유다 지파는 존귀한자가 끊어지지 않는 왕가로서의 가계가 형성됩니다. 복된 산업의 축복이 넘치는 가문을 이루어 나갑니다. 넷째 아들이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 됩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흔히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12지파를 대표하는 가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유다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내력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유다를 읽어 보십시오. 오늘은 그 언급을 제가 피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에는 지금 어떤 것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잠간이지만 은총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민 14:18)
우리 식으로 삼족을 멸하는 것이 나은지 삼사 대가 그 저주를 계속 끌어안고 살게 하는 것이 나은지 아직도 그 판단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 5: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할렐루야! 저주는 삼사 대이지만 은총과 축복은 천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떤 가계를 만들 것이냐를 결정케 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영적 줄타기를 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보통 인간의 마음속에는 첫 번째 아담의 속성이 있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은 자의 종이 됩니다.
 첫째 아담은 옛 뱀, 즉 사탄에게 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사망과 고통과 저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위로와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흐르고 있는 “아담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첫째)속이는 것입니다.
사탄은 처음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여호와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였습니다. 사탄은 거짓영의 시조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사탄의 종이 되었으니 자연히 그에게도 거짓이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네 임의대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하다가 불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탄의 흉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여호와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하니까 속아서 여호와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됩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너무 따지지 마십시오. 옳고 그름은, 즉 선악에 대한 판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고유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명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면서도 이 선악과를 여전히 따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너도 먹어보라고 주위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브의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집단성, 혹은 연대성”이라고 합니다. 이브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든지 연대성과 집단성을 선동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게 어필하는 것이 선악에 대한 논리입니다. 이것은 선하고 이것은 악하다는 나름대로의 논리입니다. 이것 때문에 첫 아담은 속았습니다. 정말 먹음직도, 지혜롭게 할만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선악에 대한 판단은 여호와 하나님의 고유의 영역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때문에 실족하는 것 보다는 스스로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실족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한 말이나 행동을 삭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이것은 무슨 논리입니까 자기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속에 첫째 아담의 속성이 더 강하게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속지 않도록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감동이 더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말씀을 소홀히 여기거나 소홀히 듣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불변토록 우리에게 정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말씀이기 때문에........... ,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사단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을 합니다. 오늘날 이단의 시조가 되는 사탄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도 금식기도하시는 예수님에게 나타나 그럴듯한 왜곡된 말씀으로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안은 간단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상대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상대를 하지 않으면 물러가게 되었습니다. 하와도 자꾸 선악과에 관심을 두고 기웃거리다가 시험에 들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아담의 속성이 강한 사람은 결국은 이러한 정서로 발전합니다.
1)교회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고 적당히 다녀, 적당히 신앙생활을 해! 이렇게 말합니다. 2)이제부터는 주일날만 나가자! 3)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 주일에 나가자! 4)그 다음은 야! 주일 몇 번 빠져도 전혀 이상이 없더라! 아무렇지도 않더라!
이렇게 사탄은 계속 속이며 그의 영혼 깊은 속까지 파고듭니다. 그리고는 자기만으로도 부족하여 이제 다른 사람들을 충동질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대성, 집단성”입니다.
 셋째)죄를 회피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거나 죄를 감춥니다. 하와 때문에, 뱀 때문에....... , 이것이 근본적 해결 방법은 아닙니다.
결론은 추방 밖에 없습니다. 죄를 감추면 반드시 풍랑이 옵니다..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테러의 주범인 라덴을 계속 감추어 두니 아프카니스탄에 풍랑이 왔습니다.
넷째)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낙원을 쫓겨난 것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머리를 깎인 것도 역시 아담의 속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담의 속성이 죽지 않으면 우리에게 에덴의 영광은 없습니다. 에덴은 유토피아입니다. 유토피아는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술집 이름이 유토피아는 많은데 우리가 아담의 속성을 몰아내고 예수의 영성으로 온전히 거듭나지 않으면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육적인 저주: 우리가 아담의 속성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인생길에는 언제나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해산의 고통과 같은 육적인 저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육신을 괴롭히는 환경적인 저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실 정신적, 영적인 저주와도 그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는 것이나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친 선과 악의 논리에 빠져,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위치에 서 보려는 어리석은 옛사람을 죽여야 이 저주의 사슬을 끊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유의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으려면 나를 믿어라! 내 주먹을 믿어라! 입니다. 스스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 말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말대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뿐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할 수만 있다면 또 다른 예수님의 수제자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조상적부터 흘러 내려오는 총체적 저주를 끊어주는 것입니다. 이 저주를 끊는 유일한 방법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믿게하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인생의 왕이었지만 이제는 그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신다는 것은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개 복숭아와 같이 별 맛도 내지 못하는 열매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 복숭아의 가지를 끊어서 참 복숭아나무에 접을 붙이면 그 가지에는 참 복숭아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저주가 끊겨진 인생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죄와 사망의 고통을 물려 준 첫째 아담의 속성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위로를 안겨준 둘째 아담 예수님의 생명이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 주는 것이 전도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참으로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께서 전도하실 때 이러한 “저주의 사슬을 끊어 준다”는 강한 믿음과 자부심이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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