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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전도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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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이 나지만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고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속에서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일했고 바울이 일했지만 지금은 사람의 일하는 대상만 바꿨다 뿐이지 일시키는 분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한사람 넘어지면 다른 사람 살려서 일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의 후견자가 되시고 우리를 돕고 계시다는 것은 어떤 풍파가 온다고 할지라도 이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행복에다가 이것을 빼앗겨서도 안됩니다. 세상의 위협을 가하고 낙담케 하기 위해서 마귀가 풍파를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종의 길에서 한치도 발을 옆으로 떼어놔서는 안됩니다.
고개를 하늘로 쳐다보고 사는 사람은 밑바닥에 세상에서 흐르고 있는 어떠한 풍파와 바람이 분다고 할지라도 영향을 받지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천국의 찬란한 모습에 완전히 넋이 나가서 그곳에만 갈수 있다면 세상에서 더러운 것들이 옷에 젖는다고 할지라도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천국은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것을 빼앗으려 해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속에 잠기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잡고 있는 주님의 손은 여전합니다. 로마서 8장에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 칼이나"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향한 우리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 잡은 손은 죽어도 놓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전에는 바울이 알 길이 없었지요. 지옥을 향해 달리다가 어느날 다메색에서 걸렸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로인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받고 그런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합니까 여러분들의 잘남을 소개합니까 사도바울이 자기의 잘남을 소개한다면 그의 이름은 빠질 것입니다. 어떤 무당이 자기도 예수의 종이라고 합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예수도 알고 사도바울도 아는데 어디서 온 이상한 놈이냐고 혼내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속아 넘어가지만 마귀는 속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날마다 소개하면 마귀는 얼굴이 창백해 집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소개할까를 신경을 쓰고 기록하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의 뒤를 이을려면 저와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잘남을 나타내지 말고 못난 인간을 구원시킨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을 증거하기 바랍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사도바울을 주님께 붙잡혀서 좋겠다 라고 부러워만 갖지 마시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더불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의 일생이 그러했고 또한 사도들의 일생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은 절망과 절망의 연속입니다. 환난보다 더 힘든 것이 절망입니다. 환난은 견뎌도 절망은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이 절망을 해봐야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아서 오다가 비행기에서 죽었다고 했을때의 절망은 이루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 아들에게 전화가 오기를 자동차가 고장나서 비행기를 못탔다는 소식이 뒤이어 도착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이겠습니다. 기쁜 소식이란 바로 이와같은 불 심판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터져 나오는 소식입니다.
세상에서 잘나가는 존재들이 무슨 유황 불 밑에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체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가 갖고 있던 기쁜 소식의 기쁨을 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비록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생활은 끝났고 죽음이 곧 닥친다 할지라도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어딥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깨서는 유라굴라라는 태풍에서 기적적으로 살려줄때 '주님의 소식은 진짜 기쁜 소식이구나' 이럴때 기쁜소식을 알았습니다. 그냥 아들이 돌아도는 것보다 죽었던 아들이 돌아도는 것이 더 기쁜 것입니다.
흔히 예수님 믿는 사람이 복음이라고 하면은 기도와 전도, 예배, 순교, 사랑, 소망이라고 말로는 잘하지만 갑자기 병이나서 죽게됐을때 그사람에게 묻습니다.
"기독교란 영생입니다. 얼마나 기쁩니다. 죽어도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가서 내 몸도 다시 부활될 것입니다. " 과연 환자가 정말 그 말에 귀가 솔깃할련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아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전까지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무게없는 빈말로 들렸는데 막상 자기가 죽음 속으로 빠져 간다고 여기니깐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서 다 날라가 버려고 영생이 들어 있는 복음의 최후까지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복음을 아는 환자라면, " 주여 나같이 타죽어도 마땅한 이에게 영생이 왠 말입니까"
바로 이 사람이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동안 신경 썼던 모든 교회 행사나 직분이나 회의나 놀려가는 것은 다 잡동사니처럼 여겨지고 오직 영생만 눈에 뛴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자기가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저 생명만 있으면 족하는 심정이 참 성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보기에는 안됐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믿고 잘풀릴 줄 알았는데 저렇게 망해버렸나 하겠지만, 본인은 영생 하나에 비로소 모든 것을 걸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다른 교인보다 앞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입장에서 있습니다. 비록 남들보다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는 늘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앞서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무거운 짐을 아직도 지고 가지만 자기는 그런 것을 다 버린 것입니다. "나는 고난을 통해서 영생을 통해서 다 버렸습니다. 나는 승리자입니다. " 이런것이 사도행전 속의 사도이 모습입니다. 절망 가운데 주님이 나타나실때 주님은 정말 살아계신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절망도 해본적 없이 부모님의 다니는 교회에 다니고 유아세례 받아서 다닌 사람은 복음도 기쁜지도 모르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누가 승리자입니까
사람이 안믿고 흩어졌으니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약한 사람입니까 흔히 쉽게 생각해서 성령을 받아 설교 했으면 다 회개하게 될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흩어지고 맙니다. 바로 회개에 꼭 성공해야 한다는 짐 조차도 사도 바울에게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전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일어나야 만 하는 정상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야 정상적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붙잡고 있다는 영생, 기쁨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든지 안오든지 이미 그것을 초월했습니다. 그것은 영생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세상적으로 어떤 것도 실패랄 것이 없습니다.
관심이 하늘을 향해 가기 때문에 발밑에 있는 것은 가볍게 여깁니다.
30-31절에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오직 예수님만 전하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으로서 사도행전의 끝입니다.
사도행전이 무엇입니까 " 예수님은 아직도 살아계시다. 여전히 주님이시다. 따라서 지금도 우리들을 붙들어 무언가 일을 하신다"라는 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지상에 변화 무상한 교회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고 변함없는 주님의 성공을 우리들의 성공담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으로 살지 마시고 또한 교회 사람으로 남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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