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하나님의 선교
본문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인간의 탐욕 및 권력욕이 가세하여 초래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국제질서나 국가 질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하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유기적으로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는 공생관계를 이루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보전 원리를 부정하는 개인주의적인 이기주의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국가주의가 인류사회의 창조적 전진과 공생적 인류 공동체의 형성을 저해하고 있다.
국제적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인류 공동체의 정치 경제의 양극화 현상과 낡은 가치관의 결과로 빚어진 한반도에서의 남북 분단현실과 고도화된 기술 산업사회와 정보화 사회에서의 인간성 상실의 현실이 창조적으로 해석되고 계승되어야 할 일이 이제는 한국교회 앞에 놓여있다. 우리는 교회선교, 사회선교에 필요한 현재의 문화적 상황이 안고 있는 인간성 파괴 위기와 창조적 가능성,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 문화의 일반적 속성은 피상적 자율문화, 물질주의적 소비문화, 세속주의적 상업문화, 깊이와 개성과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기술과학에 지배당하는 일차원적 군집문화 등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인간의 문화적 삶 속에 깊이와 의미를 줄 수 있어야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지켜 가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 300여 년 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기계론적 우주관과 기계론적 생물학에 기초한 인간관이 아직도 인류사회 구성원의 과반수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젊은 세대와 창조적인 과학자와 신지식인 그리고 생명문화 지지자들이 창조적인 공생문화와 유기체적 자연관에 기초한 우주관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추구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현대의 기술공학문명은 정보화 시대라 불리는 새로운 문명사회를 열어가고 있다. 특히 전파매체의 발달과 컴퓨터 시스템 및 전파 자동제어장치 등의 발달은 인간의 생활관습과 사고형태까지 바꿔갈 전망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대중 정보 매체의 민주화와 기술공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인간화에 궁극적 가치를 두면서 선교의 자리를 펼쳐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모든 믿는 자와 제자 공동체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 운동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 16:15)는 주님의 위대한 명령과 위탁 그리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 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독일 나치스에 항거했다가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던 망명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 교수는 '문화 신학'이라는 그의 제자에 의해 편집된 저서에서 서구의 사상적 구조의 변화를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중세기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기독교 왕국이었다. 자연이라고 불린 모든 세속적인 것의 초자연적 통치의 권리 부여를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교회가 이어 받았던 시대였다. 두 번째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인본주의 사상에 의하여 발화된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인간 본연의 자유를 표방했던 인본주의 사상은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고 여기에서 현대를 포함하는 제3기가 시작된 세 번째는 과학 기술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는 과학과 기술의 힘에 의해 전면적인 문화혁명과 가치구조의 변화를 강요당해 왔다. 교회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 안팎으로부터 오는 도전과 갈등을 통해서 신학적 반성과 선교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목표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노력들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의 결성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서 선교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존재하였고 또 선교를 위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선교가 재래적인 전도(evangelism) 일변도의 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없으며 격변하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전 인간(whole person)에게 전 복음(whole gospel)을 전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교회의 선교라고 이해했으나 이제 와서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이 말이 사용된 것은 1952년에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의 벨링겐 대회에서부터였다.
그 때에 표명된 말은 "선교는 개인구원과 교회 확장을 유일한 의무로 삼아서는 안되고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선교의 개념을 좀 더 이론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비체돔(G. Vicedom)이다. 1958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선교활동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이해되고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많은 학자들 가운데 선교신학자 호이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주장한다. "선교는 교회의 선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전체역사 속에서 되어지고 있다.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팎에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주관해 가신다"고 했다.
호이켄다이크가 주장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의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오늘의 사회적인 도전과 현실의 목표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조건 되어진다. 그리고 구원은 역사 안에 나타나는 샬롬(Shalom)이다. 우리는 세상 안에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샬롬을 증거하고 그런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샬롬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고 있다. 샬롬은 고대 히브리어이다. 이 말은 구약시대에서나 현대 이스라엘에서나 유대인들 상호간에 교환되는 가장 흔한 인사말의 하나이다. 성서는 샬롬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는 샬롬을 가져오신 분이오 교회란 여호와 하나님의 샬롬으로 살며 그리스도인은 이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우리는 샬롬에서 교회가 이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하비콕스는 샬롬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화해 곧 삶 속에 온갖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둘째는 자유이다. 성서에서의 자유는 "….... 으로부터"(From)의 자유와 동시에 "...... 을 위한"(For)자유를 말한다. 속박'으로부터'와 봉사'를 위한' 자유이다. 셋째는 희망이다. 이것은 성서 전반에 걸쳐서 늘 비쳐주는 요소이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또는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우리 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세계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우리의 희망은 우리 자신만을 위함도 아니고 교회만을 위함도 아닌 역시 세상을 위한 희망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샬롬의 모습으로 이 세계를 재건하고 재조직하실 것이라는 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샬롬은 완전히 회복을 받은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견되고 성취되는 것이다. 이 샬롬이 곧 구원이요, 이 샬롬이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이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도 이 샬롬을 위한 활동으로 본다.
호이켄다이크가 주장한 두 번째 특징은 교회가 선교의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선교를 교회의 도구로 생각해 온 재래적인 신학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그 제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한다면 선교를 배타적으로 이해해서 교회 자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위험이 있다. 교회 중심의 선교 신학을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선교 신학으로 대치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이다.
세 번째 특징은 선교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데 교회는 이 선교를 위해서 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이 선교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그가 받은 샬롬을 세상과 나누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기능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 세상적인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신앙공동체이다. 교회의 참사명은 인류와 세상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교회는 열심히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다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고 영광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교회이다. 선교하는 교회의 구조는 교회 자체가 선교의 일체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제공해 주는 선교 항목에 따라 반응을 보여주고 참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교회의 구조는 보다 유연성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
선교란 구원받은 모든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지향하여 아들을 세상에 파송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운동의 원천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나 '우리의 선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선교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행위 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그 분의 선교를 위한 기구이며 인간은 그 선교의 도구로서 응답하는 객체에 불과하다.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사를 외면하면 교회는 교회 될 수 없으며 세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이 선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시고 세상과 관계하시며 그 시대와 관련 맺음으로서 실재(實在)하시고 현존(現存)하신다. 그러므로 성서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단에로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인간을 책임성 안에 세우신다. 이 책임이 바로 선교이며 그 선교의 특권, 전권, 위임명령, 의무는 언제나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있다. 불은 열과 빛을 내면서 타오를 때 불일 수 있듯이 선교는 거룩한 정렬에 불붙어 있는 교회일 때만 살아있는 건강한 교회일 수 있다. 따라서 먼저 교회가 생존하고 나서 선교적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가지고 있는 인적 물적 자산의 일정 분량을 우선적으로 선교에 바치도록 결단하여야 한다. 오늘의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 지향의 선교, 민중 지향의 선교, 미래 지향의 창조적 선교, 평화통일지향의 선교 그리고 영성적 생명 공동체 지향의 선교를 그 내용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대중정보 매체의 민주화와 기술공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인간화에 궁극적 가치를 두면서 선교의 자리를 펼쳐가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개인의 품성과 인격 그리고 그 영혼의 건강이 사회 구조적 삶과 불가분리의 상관관계 및 순환관계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개인 영혼의 중생과 구원체험의 확실성 못지 않게 사회의 구조적 갱신 곧 인류 공동체의 사회적 거듭남과 구원 문제가 똑같이 중요하며 동시에 수행되어야 함을 확신하고 전하는 것이다.
국제적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인류 공동체의 정치 경제의 양극화 현상과 낡은 가치관의 결과로 빚어진 한반도에서의 남북 분단현실과 고도화된 기술 산업사회와 정보화 사회에서의 인간성 상실의 현실이 창조적으로 해석되고 계승되어야 할 일이 이제는 한국교회 앞에 놓여있다. 우리는 교회선교, 사회선교에 필요한 현재의 문화적 상황이 안고 있는 인간성 파괴 위기와 창조적 가능성,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 문화의 일반적 속성은 피상적 자율문화, 물질주의적 소비문화, 세속주의적 상업문화, 깊이와 개성과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기술과학에 지배당하는 일차원적 군집문화 등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인간의 문화적 삶 속에 깊이와 의미를 줄 수 있어야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지켜 가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 300여 년 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기계론적 우주관과 기계론적 생물학에 기초한 인간관이 아직도 인류사회 구성원의 과반수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젊은 세대와 창조적인 과학자와 신지식인 그리고 생명문화 지지자들이 창조적인 공생문화와 유기체적 자연관에 기초한 우주관 그리고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추구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현대의 기술공학문명은 정보화 시대라 불리는 새로운 문명사회를 열어가고 있다. 특히 전파매체의 발달과 컴퓨터 시스템 및 전파 자동제어장치 등의 발달은 인간의 생활관습과 사고형태까지 바꿔갈 전망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대중 정보 매체의 민주화와 기술공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인간화에 궁극적 가치를 두면서 선교의 자리를 펼쳐가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면서 모든 믿는 자와 제자 공동체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 운동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 16:15)는 주님의 위대한 명령과 위탁 그리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 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독일 나치스에 항거했다가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던 망명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폴 틸리히 교수는 '문화 신학'이라는 그의 제자에 의해 편집된 저서에서 서구의 사상적 구조의 변화를 크게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중세기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기독교 왕국이었다. 자연이라고 불린 모든 세속적인 것의 초자연적 통치의 권리 부여를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교회가 이어 받았던 시대였다. 두 번째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인본주의 사상에 의하여 발화된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인간 본연의 자유를 표방했던 인본주의 사상은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고 여기에서 현대를 포함하는 제3기가 시작된 세 번째는 과학 기술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는 과학과 기술의 힘에 의해 전면적인 문화혁명과 가치구조의 변화를 강요당해 왔다. 교회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 안팎으로부터 오는 도전과 갈등을 통해서 신학적 반성과 선교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목표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노력들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세계교회협의회의 결성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서 선교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존재하였고 또 선교를 위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선교가 재래적인 전도(evangelism) 일변도의 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없으며 격변하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전 인간(whole person)에게 전 복음(whole gospel)을 전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선교를 교회의 선교라고 이해했으나 이제 와서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이 말이 사용된 것은 1952년에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의 벨링겐 대회에서부터였다.
그 때에 표명된 말은 "선교는 개인구원과 교회 확장을 유일한 의무로 삼아서는 안되고 궁극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선교의 개념을 좀 더 이론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비체돔(G. Vicedom)이다. 1958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서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선교활동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이해되고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많은 학자들 가운데 선교신학자 호이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주장한다. "선교는 교회의 선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전체역사 속에서 되어지고 있다.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팎에서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주관해 가신다"고 했다.
호이켄다이크가 주장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의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오늘의 사회적인 도전과 현실의 목표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조건 되어진다. 그리고 구원은 역사 안에 나타나는 샬롬(Shalom)이다. 우리는 세상 안에 나타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샬롬을 증거하고 그런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샬롬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화해에 기초를 둔 인간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을 의미하고 있다. 샬롬은 고대 히브리어이다. 이 말은 구약시대에서나 현대 이스라엘에서나 유대인들 상호간에 교환되는 가장 흔한 인사말의 하나이다. 성서는 샬롬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는 샬롬을 가져오신 분이오 교회란 여호와 하나님의 샬롬으로 살며 그리스도인은 이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우리는 샬롬에서 교회가 이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하비콕스는 샬롬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화해 곧 삶 속에 온갖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둘째는 자유이다. 성서에서의 자유는 "….... 으로부터"(From)의 자유와 동시에 "...... 을 위한"(For)자유를 말한다. 속박'으로부터'와 봉사'를 위한' 자유이다. 셋째는 희망이다. 이것은 성서 전반에 걸쳐서 늘 비쳐주는 요소이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또는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우리 나라를 위하여, 우리의 세계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우리의 희망은 우리 자신만을 위함도 아니고 교회만을 위함도 아닌 역시 세상을 위한 희망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실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샬롬의 모습으로 이 세계를 재건하고 재조직하실 것이라는 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샬롬은 완전히 회복을 받은 인간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견되고 성취되는 것이다. 이 샬롬이 곧 구원이요, 이 샬롬이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이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도 이 샬롬을 위한 활동으로 본다.
호이켄다이크가 주장한 두 번째 특징은 교회가 선교의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는 선교를 교회의 도구로 생각해 온 재래적인 신학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그 제도를 지나치게 절대화한다면 선교를 배타적으로 이해해서 교회 자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위험이 있다. 교회 중심의 선교 신학을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선교 신학으로 대치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이다.
세 번째 특징은 선교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근원적으로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데 교회는 이 선교를 위해서 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이 선교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그가 받은 샬롬을 세상과 나누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기능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 세상적인 사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이다.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신앙공동체이다. 교회의 참사명은 인류와 세상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교회는 열심히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다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고 영광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교회이다. 선교하는 교회의 구조는 교회 자체가 선교의 일체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제공해 주는 선교 항목에 따라 반응을 보여주고 참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교회의 구조는 보다 유연성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 개방적이어야 한다.
선교란 구원받은 모든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지향하여 아들을 세상에 파송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운동의 원천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나 '우리의 선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선교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행위 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그 분의 선교를 위한 기구이며 인간은 그 선교의 도구로서 응답하는 객체에 불과하다.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사를 외면하면 교회는 교회 될 수 없으며 세계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이 선교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시되시고 세상과 관계하시며 그 시대와 관련 맺음으로서 실재(實在)하시고 현존(現存)하신다. 그러므로 성서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단에로 부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인간을 책임성 안에 세우신다. 이 책임이 바로 선교이며 그 선교의 특권, 전권, 위임명령, 의무는 언제나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있다. 불은 열과 빛을 내면서 타오를 때 불일 수 있듯이 선교는 거룩한 정렬에 불붙어 있는 교회일 때만 살아있는 건강한 교회일 수 있다. 따라서 먼저 교회가 생존하고 나서 선교적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가지고 있는 인적 물적 자산의 일정 분량을 우선적으로 선교에 바치도록 결단하여야 한다. 오늘의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 지향의 선교, 민중 지향의 선교, 미래 지향의 창조적 선교, 평화통일지향의 선교 그리고 영성적 생명 공동체 지향의 선교를 그 내용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대중정보 매체의 민주화와 기술공학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인간화에 궁극적 가치를 두면서 선교의 자리를 펼쳐가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개인의 품성과 인격 그리고 그 영혼의 건강이 사회 구조적 삶과 불가분리의 상관관계 및 순환관계 속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개인 영혼의 중생과 구원체험의 확실성 못지 않게 사회의 구조적 갱신 곧 인류 공동체의 사회적 거듭남과 구원 문제가 똑같이 중요하며 동시에 수행되어야 함을 확신하고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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