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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세계 선교를 소망하시는 예수님

본문

선교는 이웃과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망- 세계선교
예수님의 소망은 세계 선교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도 소원이 있으십니다. 그 소원은 세계선교, 땅 끝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소망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계선교를 명령하셨습니다. 이 소원을 우리들이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1. 선교는 하늘과 땅의 권세로 한다. 18
선교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하늘과 땅의 권세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할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권세는 권위요 특권이요 능력입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동일한 권세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권세로 능한 전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정한 입으로 감히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권세를 받은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2. 누구에게 선교하는가
선교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1900년대 전세계 기독교 인구는 5%였습니다.
1998년 전세계 기독교 인구는 11%였습니다.
인구59억 3천 만 명, 기독교인 6억 4천만 명이었습니다.
2001년 세계인구가 60억이 넘었습니다. 믿는 신자는 약 6억 5000만 명입니다. 세계선교를 이루려면 믿는 성도 한 사람이 10명씩을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들이 전도에 힘써야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힘을 쓰실 것입니까
가정에 믿지 않는 식구들에게 어떻게 힘쓸 것입니까
직장에서 믿지 않는 동료들에게,
학교에서 믿지 않는 학우들에게
사회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전도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내가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의 사령관 되시는 예수님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마28:18-20 이 명령을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세계선교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
동방의 작은 나라인 조선족을 복음화 하기 위한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조선 말기의 한반도는 쇄국정책으로 외국과의 관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힘에 의해 한반도는 문호를 개방하고 강대국들과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결국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는 세계에 드러나게 되어
각국의 선교사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 먼저 들어간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각기 본국에 조선을 선교해야 한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불안하게 살고 있었고, 경제는 피폐해졌고 미신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은 암흑기였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압제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캄캄한 암흑기에 조선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한국 최초의 순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1840년 9월 7일, 토마스는 영국 스코틀랜드 라도느 에서 목사의 오 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런던 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토마스는 어학실력이 탁월했고 1863년 5월, 23세에 졸업을 했습니다.
중국 파송,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년 발족) 중국 상해 선교사로 선임, 23세 때인 1863년 6월 4일, 아버지가 목회하고 계신 하노바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선교지로 혼자 떠나는 토마스를 염려하는 가족의 마음을 받아들여 "순진한 비둘기 같은" 캐롤라인 고드페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여렸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했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선교사 토마스의 동행자가 되기로 기쁘게 헌신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4개월 반 동안 토마스 부부는 심한 파도와 폭풍우, 배 멀미 등으로 힘든 항해를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신혼여행HONEY MOON이었습니다. 토마스의 아내는 중국으로 오는 도중 임신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1863년 12월 토마스 부부는 중국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임신중인 아내는 입에 맞지 않는 중국 음식과 매서운 겨울 추위와 싸우며 큰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내를 잃은 토마스
24세 때인 1864년 3월 11일, 거처를 마련하고 선교 방향을 정하고자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토마스는 한구로 떠났습니다. 아직도 중국 현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적 불안감과 외로움에 고생하던 캐롤라인은 유산을 하고
나흘동안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하혈을 많이 하여 홀로 몸부림을 치다가 캐롤라인은 혼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홀로 두고 잠시 집을 비웠다가 꽃다운 아내를 이국 땅에서 잃었습니다. 토마스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통역관으로 일한 토마스
토마스는 산동성 천진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세관에서 통역관으로 잠시 일하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알렉산더 윌리암슨 목사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윌리암슨의 집에서 조선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을 첫 대면하여 조선은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예수회에 아시아 선교를 지시한 이후 1581년에 마테오 리치가 광동에 선교를 하였습니다. 202년 후 1783년 조선의 사신으로 북경에 가 있던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은 천주교인이 되어 1784년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를 전했습니다. 불어나는 천주교 신자에 놀란 조정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박해를 했습니다.
1801, 신유박해, 330명 이상 처형, 400여명 유배
1815, 을해박해, 33명 처형
1839, 기해박해, 참수54명, 태형, 60명, 130명 사망
1866, 병인박해, 대원군 프랑스 신부 9명, 신도 8000명 처형 (프랑스 신부 12명중 3명은 중국으로 피신함)
대원군의 집권으로 천주교 박해는 극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은 중국 산동성 천진에 피신해 있으면서 장사 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토마스가 만난 것이었습니다. 토마스는 조선인들과 만난 후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25세 때인 1865년 9월 4일, 토마스는 윌리암슨이 준
한문 성경을 가지고 조선으로 향하였습니다. 토마스는
약 두 달 반 동안 조선의 서해안에 상륙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조선어를 배우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조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해 12월 초 천진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에게 성경을
천진에 돌아온 토마스는 조선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서해안에 뿌린 성경을 조선인들이 몰래 읽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토마스를 흥분시켰고 조선을 향한 선교 열망으로 가득하게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병인박해(1866)라 불리는 천주교도 대학살의 시기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파송 된 12명 천주교 신부중 조선을 탈출한 리델, 페롱, 칼레 세 신부는 프랑스 해군 사령관 로즈에게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조선에서 참형 당한 것을 보고했고, 이에 격분한 프랑스 정부와 로즈 제독은 조선으로 함대를 출병시키기로 결심하고,
토마스에게 조선어 통역관으로 동행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프랑스 함대가 인도차이나 전쟁이 확대됨으로 좌절되었습니다.
그후 토마스는 조선으로 가는 미국 상선 제너널 셔면호를 천진에서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런던의 선교 본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조선으로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에 가슴 부풉니다…런던 선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
이 배에는 토마스를 비롯하여 선장, 기관원 등 모두 24명이 승선했습니다. 이 배의 선주는 무역을 위해 조선에 간다고는 하였지만, 그의 속셈은 조선에서 금은 보화를 얻는 데에 있었습니다.
1866년 8월 9일. 천진을 떠난 셔먼호는 백령도를 지나 때마침 장마로 인해 물이 불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갔습니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포교가 금지된 상태이므로 토마스의 상륙을 허락할 수 없다는 관군들의 통고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조선에 온 토마스의 마음을 애타게 했습니다.
봉황진에 이르러 셔면 호는 목적 달성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경계 임무 중인 중군 이익현을 납치, 평양에 입성한 후 그를 풀어주겠다면서 계속 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서양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한 관민들은 서양 오랑캐 선이 황강정을 지날 때에 일제히 화승포로 사격을 하기 시작하였고 셔먼호는 대포를 쏘며 응사함으로써 '제너널 셔면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의 결사적인 항전에 셔면 호는 당황한 나머지 허둥지둥 퇴각을 하던 중, 물이 빠져 수위가 낮아진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 옴짝달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조선군은 조그마한 배를 여러 채 연결해서 셔먼호에 닫게 하고 배에 불을 지르니 셔먼호까지 불이 붙었습니다. 모든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내리기 시작하였고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책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처 나왔으나 조선 병사인
박춘권에게 붙잡혔습니다.
토마스는 박춘권이 목을 베려하자 그는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읽어보라고 성경을 준 후 26세의 청년 선교사는 1866. 9.
2. 그의 칼에 죽었습니다.
박춘권은 처음에는 성경을 받지 않았다가 토마스를 죽이고 돌아 갈 때 성경책을 주워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후에 성경을 읽고 회개하여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안주교회에 영수가 되었습니다.
박춘권의 조카 박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이널즈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받은 또 다른 사람 박영식은 성경을 뜯어 도배를 하였습니다. 박영식은 도배가 된 성경 말씀을 앉아서도 읽고, 누워서도 읽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어놓았는데 그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평양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고 복음의 소식은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토마스의 시신은 강변에 버려졌고 나중에 사람들이 묻었다고 합니다.
1866 토마스의 무덤 사진
1866년 병인교난 중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의 시체가 묻힌 곳이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땅 대동강변에 초라하게 묻혀 있습니다..
26세의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우리들이 진 복음의 빚입니다. 빚진 자는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선교는 복음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결론
선교는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지켜 행하게 하라는 말씀은 중요한 명령입니다. 가라, 제자를 삼아라 가르치라, 지켜행하게 하라는 말은 현재분사형으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행하여야 하는 의무입니다.
선교는 예수님으로부터 전권을 받은 일입니다. 선교는 우리의 행동이나 표정이나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금년에 땅 끝까지 전도하라는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래서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 전도대상자를 찾아 정하여 기도하며 전도합시다. 세계선교와 동시에 이웃 전도를 합시다. 전도를 위해, 선교사님들을 위해, 선교 기관들을 위해 기도하고, 내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하고, 내가 선교비를 보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한몫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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