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한민족과 선교
본문
미국인들의 뇌리 속에 깊게 새겨져 있는 영웅의 모습이 있습니다. 전설적인 인물로서 존헨리(John Henry)라는 흑인이 바로 미국인들의 영웅의 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이 존 헨리에 대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존 헨리는 태어날 때 몸무게가 44 lb였다고 합니다. 태어나면서 말을 하 기 시작했고 걷기 시작했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 마자 밥을 달라고 해서 먹었다고 합니 다. 그리고는 곧 바로 집을 나가 선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전설입니다. 그러 나 그냥 허무맹랑한 전설이 아니라 근거가 꽤 있는 전설입니다. 물론 어릴 때 모습은 우리 가 믿을 수 없어도 장성했을 때의 이야기는 꽤 믿을 만한 데가 있습니다. 존 헨리는 흑인노예로 살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는 광부로 노예생활을 시작했다가 해방을 맞이합니다. 노예로서는 해방되었어도 할 줄 아는 것이 광부일이니 계속 광부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보통 광부가 아니었습니다. 힘이 대단히 센 장부였습니다. 아무도 존 헨리만큼 일을 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증기(Steam drill)로 터널을 뜷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존 헨리는 그의 작업에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존 헨리는 증기 드릴(drill)과 자신 중 누가 더 빠른지 경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존 헨리가 손으로 증기 드릴 보 다 더 빨리 터널을 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목표지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그만 그 목표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것이 존 헨리의 모습이고, 미국인들이 숭상하는 영웅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 여지듯이 미국인들은 힘을 숭상합니다. 이 힘을 숭상하는 것이 불행히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도 깊숙히 깔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지만 힘을 토대로 해서 하나 님을 섬겼습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섬김인데 이 선교도 미 국인들은 힘을 사용하며 해 왔습니다.
요즈음 힘을 가지고 선교했던 과거의 오류가 세월이 갈수록 역사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 다. 곧 인디안들을 선교할 때 힘을 가지고 선교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제3 세계를 선교할 때 힘을 가지고 선교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1890년 12월 29일 백인들은 인디안 어 느 부족 350명을 살해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즐기는 Sun Dance와 Hopi Snake Dance를 법 으로 못하도록 금했습니다. 그런데도 350명의 인디언들이 이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이 Sun Dance를 못하도록 그들의 무릎을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해 인디언들의 다른 종교행위를 금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 믿도록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숭상하는 힘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믿었던 것 입니다. 과연 힘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었을까요 주님은 그 러한 방법을 원하셨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의 방법, 선교의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 다. 주님은 9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 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이야기가 전파되어 주님 뿐만이 아니라 이 여자도 기념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파는 결코 힘과 함께 되는 것이 아님 을 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여인의 이야기와 함께 전파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러면 이 여인의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은, 이 여인을 기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이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를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데 이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가 담 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가는 비록 이 여인의 이름을 안 밝였지만 마가복음 이후에 쓰여진 마태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밝 혀집니다. 4세기 신학자들은 이 여인의 이름을 귀신이 일곱마리 붙었던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를 낫게 한 예수님께 와서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위에 서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웅성거립니다. 이에 주님께서 이 여인은 당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 칭찬하시고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
예수님의 복음의 이야기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매체로 하여서 전파될 것을 말씀하십니 다. 복음은 진공상태에서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매체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 상처받은 여인의 이야기가 복음의 매체임을 말씀하십니다. 일곱 귀신에 의해 시달리다 가 나은 막달라 마리아의 아픔의 이야기 없이는 복음은 전파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곧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복음은 오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합 니다. 복음으로 인해 상처가 아물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매체가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이야기라는 매체가 없어질 때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까요 복음은 매체를 언제나 필요로 하고 있고, 진공상태에서는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곧 복음은 전파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빼버리면 그 결과는 우리의 이야기 대신에 힘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복음은 힘과 함께 전파되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는 바로 미 국인들이 실패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참 선교는 어떻게 이루워질 수 있을까요 그동안 많은 경우 우리는 부와 힘과 지식,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매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와 힘과 지식으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복음을 들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부와 힘과 지식을 매체로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디언들의 무릎을 베는 것과 같 은 선교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더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 특별히 생 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한국 교회 안에 한 국적인 것을 다 없애 버렸습니다. 교회만 들어오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화권입니다. 서 양 선교사들도 자기들의 부와 지식에 근거한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힘이 없는 한국인들은 한국적인 것은 다 버리고 서양선교사들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 한 국교회는 벽에 부딪친 것입니다.
사실 서양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아픔의 이야기를 안고 우리를 찾아왔어야 했습니다. 서양 인들은 힘을 숭상하고 있는데 이 힘을 숭상하기에 생기는 서양인들의 아픔을 인정하고 이 아픔을 낫게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한국 땅에 찾아 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를 잘 믿으면 자기들처럼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아픔을 숨기고 복 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한국 기독교는 힘을 숭상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돈을 숭상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젠 예수를 잘 믿어 부강한 나라가 되 었다고 자랑하면서 수천명의 선교사를 세계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나간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숨긴 채 힘의 선교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른 상처를 이웃 민 족에게 안겨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는 방법 으로 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 교회가 속한 보스톤 노회에 소속한 몇몇 교회들이 동구 유럽에 매해 선교를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새로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동구유럽이 오랜 세월을 공 산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무척 가난한데 이 미국 교회 교인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 습니다. 그냥 몸만 갑니다. 가서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다가 옵니다. 서로 서로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은 그들에게 다음에도 꼭 오라고 신신당부한다고 합니다. 그들 은 이 미국인들의 모습 가운데서 힘과 지식과 부로 상처입은 미국인들의 상처난 모습과 함께 찾아오는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음 안에서 서로 참 만남의 교제를 나 누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구제나 교육, 의료선교가 전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제나 교육, 의 료 선교가 우리들의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 했을 때 참 선교는 이루워지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안고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구제와 교육은 선교 를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오셨다가 귀국하신 저희 교회 교인이셨던 전우택 연세의 대 교수님이 계십니다. 전교수님이 하버드에서 연구한 것을 토대로 책을 발간하여서 저에 게 보내 주셨습니다. 책 표지가 무척 흥미롭게 고안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반 씩 잘라서 한사람의 얼굴처럼 만들어서 표지 사진으로 내었습니다. 오른쪽 얼굴은 전교수 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왼쪽 얼굴은 전교수님과 같은 나이의 북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모스코바 대학에 유학갔다가 남한에 온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전 교수님은 이 북한 사람을 오래 전에 만났는데 그것을 계기로 북한 및 탈북자들을 연구하 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남한과 북한이 얼마나 갈라져 있는지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탈북자들의 고백을 통하여 남과 북이 얼마나 이질적인 민족이 되었는지를 느끼게 됩 니다. 저는 그분의 책을 통해서 특별히 표지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분단의 아픔을 새 롭게 느껴 보았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정치적, 지리적으로 분단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분단되었으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괴물과 같이 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 아니 나의 모 습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분단된 모습, 분단된 괴물의 모습으로 만드셨을까요 제가 확신하기에는 이 분단된 모습, 괴물의 모습을 안고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 라 생각되어 집니다. 이 아픔을 안고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 입니다. 돈과 지식으로 우리의 모습을 가리고 복음을 전하지 말고 우리의 아픔의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만이 참으로 주님의 복음은 아름답게 온 세계 에 전파되지 않을까요
지난번 제가 중국 연변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을 통하여 크게 느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날에는 회망촌을 방문했고 곧이어 언덕 넘어에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백두산, 마지막 날은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을 방문했습니 다. 용정에 가보니 한국 모교회에서 30억원을 들여서 멋진 교회를 세워 놓은 것을 보았습니 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은 남한과 미주의 교회 및 독지가들이 크게 후원하여서 훌륭한 학교 가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용정의 교회와 연변과학 기술대학에 비해서 희망촌은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100채를 계 획하면서 기초공사는 100여채까지 다 마치었지만 이번 10월까지 40여채를 겨우 완공할 예 정에 있었습니다. 연변과학 기술대학과 용정교회에 비해 왜 희망촌은 그리도 초라한가 살 펴보았더니 과기대와 용정교회는 힘을 과시하는 남한교회에서 세우고 있었습니다. 반면 희 망촌은 주로 미국이민교회들에 세우고 있었는데 많은 교회가 한, 두채 약속은 했지만 한, 두채 약속한 것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희망촌이야말로 참 선교 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임을 절감했습니다. 희망촌을 돕는 분들은 아픔 가운데서 돕고 있 었습니다. 자신들의 아픔의 이야기 가운데서 힘겹게 한푼 두푼을 모아서 돕고 있었습니다. 희망촌은 아픔의 이야기가 꽃피는 곳이었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을 통해
두번째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만주땅에 100-150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이민역사는 100년이 된다고 합니다. 만주에 가보니 우리 한민족의 모 습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있는데 남한과 북한이 오늘날 연변에 서 만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미국에서도 연변을 찾아오고 있는데 연변에서 남한과 북한, 조선족, 그리고 재미동포들이 만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게도 볼 수 있지만 실지 로 갈라질 대로 갈라진 우리 한민족의 모습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마음을 안고 백두산에 올라갔습니다. 뉴 햄프셔에 있는 조지 워싱턴 산이 나 콜로라도에 있는 록키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보는 순간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천지를 한 눈에 다 보려고 바위에 엎드려서 천지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맑은 날씨였기에 파란 하늘에 비추이는 천지는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한쪽 구석으로는 천지의 물이 큰 바위 사이 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압록강의 시작이었습니다. 천지 밑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 로 인해 천지를 이룬 후 계속 백두산 밑을 향하여 물은 쏟아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갈라진 한 민족의 아픔을 안고 올라왔는데 백두산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바로 이 백두산을 한민족에게 주셨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하필 우리 민족에게 이 엄청난 보물을 주셨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저의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백두산 천지가 한민족의 장엄한 모습임을 느꼈습니다. 아니 한 민족에 속한 나 자신의 장엄한 모습임을 느꼈습니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온 세계의 백두산과 같은 민족으로 삼으셨음을 느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제아무리 갈라졌어도, 곧 아픔이 있어도 우리의 본연의 모습은 바로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모습임을 가슴 속 깊게 되새기며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우리 민족의 아픈 모습, 상처난 모습을 내보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백두산을 본 후 여호와 하나님은 왜 우리 민족을 갈라 놓으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 나님은 상처난 민족을 필요로 하십니다. 상처난 민족의 이야기 없이는 세계 선교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백두산 민족인 우리를 상처나게 하셨습니다. 상처난 우리의 이야기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를 선교하시길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21세기가 시작하는 서기 2000년도에 우리를 부르시고 계 십니다.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상처를 입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상처난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부와 힘과 지식으로 우리의 참 모습을 숨기지 마십시다. 선교는 우 리의 참 모습을 안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 선교는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를 안 고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를 안고 주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십니 다. 우리가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를 드러내면 들어낼수록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더욱 들어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본연의 모습은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증기(Steam drill)로 터널을 뜷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존 헨리는 그의 작업에 위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존 헨리는 증기 드릴(drill)과 자신 중 누가 더 빠른지 경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존 헨리가 손으로 증기 드릴 보 다 더 빨리 터널을 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목표지에 먼저 도착하였지만 그만 그 목표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것이 존 헨리의 모습이고, 미국인들이 숭상하는 영웅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 여지듯이 미국인들은 힘을 숭상합니다. 이 힘을 숭상하는 것이 불행히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도 깊숙히 깔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지만 힘을 토대로 해서 하나 님을 섬겼습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섬김인데 이 선교도 미 국인들은 힘을 사용하며 해 왔습니다.
요즈음 힘을 가지고 선교했던 과거의 오류가 세월이 갈수록 역사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 다. 곧 인디안들을 선교할 때 힘을 가지고 선교했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제3 세계를 선교할 때 힘을 가지고 선교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1890년 12월 29일 백인들은 인디안 어 느 부족 350명을 살해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즐기는 Sun Dance와 Hopi Snake Dance를 법 으로 못하도록 금했습니다. 그런데도 350명의 인디언들이 이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이 Sun Dance를 못하도록 그들의 무릎을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해 인디언들의 다른 종교행위를 금했습니다. 오직 기독교만 믿도록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미국인들은 자기들이 숭상하는 힘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믿었던 것 입니다. 과연 힘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었을까요 주님은 그 러한 방법을 원하셨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의 방법, 선교의 방법이 나타나 있습니 다. 주님은 9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 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이야기가 전파되어 주님 뿐만이 아니라 이 여자도 기념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파는 결코 힘과 함께 되는 것이 아님 을 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여인의 이야기와 함께 전파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러면 이 여인의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은, 이 여인을 기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이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를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데 이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가 담 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가는 비록 이 여인의 이름을 안 밝였지만 마가복음 이후에 쓰여진 마태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밝 혀집니다. 4세기 신학자들은 이 여인의 이름을 귀신이 일곱마리 붙었던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를 낫게 한 예수님께 와서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위에 서는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웅성거립니다. 이에 주님께서 이 여인은 당신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 칭찬하시고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
예수님의 복음의 이야기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매체로 하여서 전파될 것을 말씀하십니 다. 복음은 진공상태에서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매체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 상처받은 여인의 이야기가 복음의 매체임을 말씀하십니다. 일곱 귀신에 의해 시달리다 가 나은 막달라 마리아의 아픔의 이야기 없이는 복음은 전파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곧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복음은 오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필요로 합 니다. 복음으로 인해 상처가 아물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매체가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이야기라는 매체가 없어질 때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까요 복음은 매체를 언제나 필요로 하고 있고, 진공상태에서는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곧 복음은 전파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이야기를 빼버리면 그 결과는 우리의 이야기 대신에 힘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결국 복음은 힘과 함께 전파되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는 바로 미 국인들이 실패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참 선교는 어떻게 이루워질 수 있을까요 그동안 많은 경우 우리는 부와 힘과 지식,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매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와 힘과 지식으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복음을 들었지만 동시에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부와 힘과 지식을 매체로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디언들의 무릎을 베는 것과 같 은 선교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더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 특별히 생 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웠는데 그들은 한국 교회 안에 한 국적인 것을 다 없애 버렸습니다. 교회만 들어오면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화권입니다. 서 양 선교사들도 자기들의 부와 지식에 근거한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힘이 없는 한국인들은 한국적인 것은 다 버리고 서양선교사들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 한 국교회는 벽에 부딪친 것입니다.
사실 서양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아픔의 이야기를 안고 우리를 찾아왔어야 했습니다. 서양 인들은 힘을 숭상하고 있는데 이 힘을 숭상하기에 생기는 서양인들의 아픔을 인정하고 이 아픔을 낫게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한국 땅에 찾아 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를 잘 믿으면 자기들처럼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아픔을 숨기고 복 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은, 한국 기독교는 힘을 숭상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돈을 숭상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젠 예수를 잘 믿어 부강한 나라가 되 었다고 자랑하면서 수천명의 선교사를 세계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세계에 나간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숨긴 채 힘의 선교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른 상처를 이웃 민 족에게 안겨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는 방법 으로 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 교회가 속한 보스톤 노회에 소속한 몇몇 교회들이 동구 유럽에 매해 선교를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새로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동구유럽이 오랜 세월을 공 산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무척 가난한데 이 미국 교회 교인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 습니다. 그냥 몸만 갑니다. 가서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다가 옵니다. 서로 서로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은 그들에게 다음에도 꼭 오라고 신신당부한다고 합니다. 그들 은 이 미국인들의 모습 가운데서 힘과 지식과 부로 상처입은 미국인들의 상처난 모습과 함께 찾아오는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음 안에서 서로 참 만남의 교제를 나 누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구제나 교육, 의료선교가 전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제나 교육, 의 료 선교가 우리들의 이야기의 자리를 대신 했을 때 참 선교는 이루워지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안고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구제와 교육은 선교 를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오셨다가 귀국하신 저희 교회 교인이셨던 전우택 연세의 대 교수님이 계십니다. 전교수님이 하버드에서 연구한 것을 토대로 책을 발간하여서 저에 게 보내 주셨습니다. 책 표지가 무척 흥미롭게 고안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반 씩 잘라서 한사람의 얼굴처럼 만들어서 표지 사진으로 내었습니다. 오른쪽 얼굴은 전교수 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왼쪽 얼굴은 전교수님과 같은 나이의 북한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모스코바 대학에 유학갔다가 남한에 온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전 교수님은 이 북한 사람을 오래 전에 만났는데 그것을 계기로 북한 및 탈북자들을 연구하 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남한과 북한이 얼마나 갈라져 있는지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탈북자들의 고백을 통하여 남과 북이 얼마나 이질적인 민족이 되었는지를 느끼게 됩 니다. 저는 그분의 책을 통해서 특별히 표지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분단의 아픔을 새 롭게 느껴 보았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정치적, 지리적으로 분단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분단되었으며 세상 어디에도 없는 괴물과 같이 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 아니 나의 모 습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분단된 모습, 분단된 괴물의 모습으로 만드셨을까요 제가 확신하기에는 이 분단된 모습, 괴물의 모습을 안고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 라 생각되어 집니다. 이 아픔을 안고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 입니다. 돈과 지식으로 우리의 모습을 가리고 복음을 전하지 말고 우리의 아픔의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만이 참으로 주님의 복음은 아름답게 온 세계 에 전파되지 않을까요
지난번 제가 중국 연변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을 통하여 크게 느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날에는 회망촌을 방문했고 곧이어 언덕 넘어에 있는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방문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백두산, 마지막 날은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을 방문했습니 다. 용정에 가보니 한국 모교회에서 30억원을 들여서 멋진 교회를 세워 놓은 것을 보았습니 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은 남한과 미주의 교회 및 독지가들이 크게 후원하여서 훌륭한 학교 가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 교회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용정의 교회와 연변과학 기술대학에 비해서 희망촌은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100채를 계 획하면서 기초공사는 100여채까지 다 마치었지만 이번 10월까지 40여채를 겨우 완공할 예 정에 있었습니다. 연변과학 기술대학과 용정교회에 비해 왜 희망촌은 그리도 초라한가 살 펴보았더니 과기대와 용정교회는 힘을 과시하는 남한교회에서 세우고 있었습니다. 반면 희 망촌은 주로 미국이민교회들에 세우고 있었는데 많은 교회가 한, 두채 약속은 했지만 한, 두채 약속한 것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희망촌이야말로 참 선교 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임을 절감했습니다. 희망촌을 돕는 분들은 아픔 가운데서 돕고 있 었습니다. 자신들의 아픔의 이야기 가운데서 힘겹게 한푼 두푼을 모아서 돕고 있었습니다. 희망촌은 아픔의 이야기가 꽃피는 곳이었습니다.
이번 중국 방문을 통해
두번째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만주땅에 100-150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이민역사는 100년이 된다고 합니다. 만주에 가보니 우리 한민족의 모 습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있는데 남한과 북한이 오늘날 연변에 서 만나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미국에서도 연변을 찾아오고 있는데 연변에서 남한과 북한, 조선족, 그리고 재미동포들이 만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게도 볼 수 있지만 실지 로 갈라질 대로 갈라진 우리 한민족의 모습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마음을 안고 백두산에 올라갔습니다. 뉴 햄프셔에 있는 조지 워싱턴 산이 나 콜로라도에 있는 록키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 보는 순간 저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천지를 한 눈에 다 보려고 바위에 엎드려서 천지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맑은 날씨였기에 파란 하늘에 비추이는 천지는 실로 장관이었습니다. 한쪽 구석으로는 천지의 물이 큰 바위 사이 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압록강의 시작이었습니다. 천지 밑에서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 로 인해 천지를 이룬 후 계속 백두산 밑을 향하여 물은 쏟아져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갈라진 한 민족의 아픔을 안고 올라왔는데 백두산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바로 이 백두산을 한민족에게 주셨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하필 우리 민족에게 이 엄청난 보물을 주셨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저의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백두산 천지가 한민족의 장엄한 모습임을 느꼈습니다. 아니 한 민족에 속한 나 자신의 장엄한 모습임을 느꼈습니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온 세계의 백두산과 같은 민족으로 삼으셨음을 느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제아무리 갈라졌어도, 곧 아픔이 있어도 우리의 본연의 모습은 바로 백두산 천지의 장엄한 모습임을 가슴 속 깊게 되새기며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우리 민족의 아픈 모습, 상처난 모습을 내보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백두산을 본 후 여호와 하나님은 왜 우리 민족을 갈라 놓으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 나님은 상처난 민족을 필요로 하십니다. 상처난 민족의 이야기 없이는 세계 선교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백두산 민족인 우리를 상처나게 하셨습니다. 상처난 우리의 이야기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를 선교하시길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21세기가 시작하는 서기 2000년도에 우리를 부르시고 계 십니다.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상처를 입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당신의 복음전파를 위해서 상처난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부와 힘과 지식으로 우리의 참 모습을 숨기지 마십시다. 선교는 우 리의 참 모습을 안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 선교는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를 안 고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를 안고 주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십니 다. 우리가 우리의 아픔의 이야기를 드러내면 들어낼수록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더욱 들어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본연의 모습은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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