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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기도하시고 선교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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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먼저 회당에서 설교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을 당하여 회당에서 말씀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신 사건이 막1:21-28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사건이 1:29-34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다음 날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가버나움 동리에서 한적한 곳이라고 하면 갈릴리 바다 동편 바닷가를 말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다만 한적한 곳, 인적이 드문 곳,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을 의미합니다.
오늘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데, 기도의 중요성이라든가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도는 해야겠는데, 언제 기도하면 좋으냐고 물어오고 있습니다. 기도는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기도하기 좋은 시간은 차츰 자기의 체험으로 정립되는 것이고, 우선 어떠한 장소라도 구애받지 아니하고 먼저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나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어느 때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정의하는 말 가운데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교통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교통이라는 말을 영어로 "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주시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구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응답해주시고 이렇게 오고 가는 것이 교통입니다.
일방 통행은 교통이 아닙니다. 교통이라고 하면 서로 막힘이 없고, 오고가는 일을 말합니다. 서로 교제하는 것이며, 서로 왕래하는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교통이 잘 되어야 합니다.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왕래가 있어야 합니다. 남북이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제 남북의 물꼬가 트이는 것 같은데, 기도하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요리문답 제98문에 "기도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를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경험하고, 믿음은 자라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됨을 더욱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말할 때 기도란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의 통로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만나지 않고, 대화가 없으면 완전히 사귐이 끊어지고 아무런 관계도 없어집니다.
(사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 즉 다이얼로그(Dialogue)입니다. 대화란 상대가 있어야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절대로 독백이 아닙니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말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기도는 혼자 말하는 넋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지로 엎드려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들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말씀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교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아예 전화선을 빼놓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기도하는데 전념할 수 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기도를 중단하고, 약속 시간 임박해서 기도한다고 시늉이나 내다 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고, 조용한 새벽 시간에 나와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정신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새롭게 만들어 새벽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새벽 기도가 자랑도 아닙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하는 것이 새벽기도입니다. 새벽이라는 시간은 단순히 하루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신성한 시간', '신께 속한 시간', '역사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새벽이라는 헬라어는 프로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른 아침을 말하며 밤의 4번째 경점을 말합니다. 오전 3시에서 6시까지를 말하는 말이 프로이라는 말입니다. 새벽기도란 예수님이 즐겨 하신 것으로 새 날의 시작과 더불어 최초의 생각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다는 의미에서 귀한 시간입니다. 새벽기도는 하루에서 첫 번째로 행하는 일인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혼을 의탁하는 시간이기에 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새벽 시간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구약에서 야곱이란 분이 이스라엘로 변하는 시간은 새벽 시간이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멀리 밧단아람으로 떠날 때 하루는 루스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자게되었습니다. 그는 그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사닥다리가 땅위에 서 있는 것이 나타났는데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놀라운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창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야곱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새벽에 부르짖어 기도하여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은 그 아침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하면서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에 자기가 베고 자던 돌에 기름을 붓고 성별하였습니다. 새벽기도는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깨닫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이 강을 건너가면 가나안 땅으로 형님 에서를 만나야 하는 절대 절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자기의 소유를 건너보냈습니다. 자기만 남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새벽에 이를 때 응답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한 천사와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 천사는 야곱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찌나 간절하게 사모하고 매달리는지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래도 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그렇게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인사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쌀이 익어 밥이 되려면 뜨거운 눈물이 나와야 하는 것처럼 간절해야 합니다.
(창32:26-28)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바로 이 말씀을 듣고 야곱이 변화를 받은 시간이 날이 새려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새벽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완악한 성품이 변화를 받습니다. 나의 추악한 욕심을 다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은 새벽기도에 있습니다.
무어라 해도 새벽 시간이 소중한 시간, 특별한 시간, 경건한 시간이 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아침, 즉 새벽에 기도할 때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레6:12)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지며"
(시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46: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88: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시119:147)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우리는 새벽이라는 그 자체가 어떤 효험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그것은 미신입니다. 다른 시간보다 경건하고, 의미가 있고,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개인에 따라서는 저녁 기도가 좋은 분도 있습니다. 대로는 자기 집에서 기도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면 집은 쉬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곳이지 기도하기 좋은 장소가 아닌 것을 느껴봅니다. 가정의 주기능이 안식과 보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헌법의 예배 모범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새벽 기도회를 잘 정의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경건되고 성실하게 모든 생각과 정성을 집중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시간이 있는 대로 개인적으로나 공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새벽부터 교회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더 성장케 하고 풍요롭게 한다. "고 했습니다.
새벽 기도란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전적 헌신의 자세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곧 언약의 백성인 표시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시간입니다.
새벽 기도에 힘을 쓴 사람은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엄한 기도 훈련을 받은 분입니다. 수도원에서는 하루에 8차례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Mattins라는 동틀 무렵의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아침 6시에 드리는 프라임(Prime)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역시 기도를 강조하신 분입니다. 아침의 대부분은 기도로 보내신 분입니다. 요한칼빈도 기도에 힘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면서 경건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감리교회를 시작하신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88세를 사셨는데 일생 4만2천 편의 말씀을 설교하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200권 정도의 책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웨슬레는 일생 60년간 새벽 4시에 기상했습니다. 50년 동안 아침 5시에 새벽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새벽 기도는 어느 누구의 특징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 갱신과 부흥의 외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경건 훈련의 가장 좋은 방법이 새벽기도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회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한국인의 전통의식 속에는 새벽을 신성시하였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누가 시작했고, 누가 체계화하였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906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장로와 박치록 장로라는 분이 시작하였는데, 이 새벽기도회는 1907년의 부흥 운동과 연결되어 급속히 퍼진 기도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늦게 일어나면 자연히 게을러집니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잘 들어있어야 합니다. 습관, 버릇 이것은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행하는 동안 한가지 유형의 행위나 사고방식이 고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습관은 언제나 같은 형태로 무의식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낮을 밤으로 보내고, 밤을 낮처럼 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닙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마흔 살을 지나면 남자는 자기의 습관과 결혼해 버린다"라고 합니다. "습관은 한 개의 큰 노끈이다. 우리들은 매일 그것을 꼬고 있지만 그것을 풀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제2의 천성을 이루고 그것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많이 먹는 습관이 붙으면 많이 먹어서 일찍 단명합니다. 사람에게는 기계처럼 제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계에도 수명이 있듯이 사람의 모든 기관도 한계와 수명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찍 다 사용해버리면 나중에 사용하고 싶어도 소진하였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늦게까지 잠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일찍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나갔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났으면 즉시 활동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뒤척거리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좋은 습관은 기도하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있을 때에,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와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알려드렸습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따라갔다"는 말은 좀 약한 번역입니다. "뒤따라 추격했다"는 말이어야 합니다. 열심히 따라간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좇아갔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인간들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을 본 후에 더욱 열심히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막1:27의 말씀에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귄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새로운 교훈이었습니다. 그들 시대의 유일하신 소망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먹어야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영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동물과 다르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찾고 있는 사람들은 병든 자들이 많았습니다. 어제 밤에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지만, 소문에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 병자들이 많았습니다. 날이 새자마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코리안 프런티어라는 잡지사에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종교는 농부의 7%정도만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기독교를 바람직한 종교라고 보는 사람은 농부 34%, 사업가 48%, 대학교수 54%로 기독교에 대하여 가장 긍정적인 답을 주었습니다. 지금 안 믿는 이들이 앞으로 종교를 가진다고 하면 기독교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더러운 죄악을 해결할 길이 없어서 오직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섰던 사람은 모두가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친구들의 들것에 실려왔던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사람들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함께 죽은 강도가 주님을 찾았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던 주님에게 찾아 나와 기름 붓던 여인은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해졌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 가까운 마을로 전도하러 나서고 있습니다. 38절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신 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무엇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밥이나 축내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잘났다고 자랑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자리, 자기의 위치를 정말 잘 알고 최선을 다하신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한 곳에 있기만 하여도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지만,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39절입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가버나움의 좀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시면서 여러 마을에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사탄의 한 가지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방해하는데 있습니다. 사단은 기도 없는 성경공부,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종교 의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기도할 때 무서워서 벌벌 떤다"고 말하신 분이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복 받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또한 종교적인 어떤 형식이나 의식도 아닙니다. 기도란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지으시며, 만물을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연약하고 낮고 천한 인간과의 거룩한 만남이며, 대화이며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선교에 임하시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더욱 확신하였고, 끝까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보면 기도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당신을 따르는 무리를 돌려보내시고는 쉬지 않으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하루의 계획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세워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과 일하는 것을 함께 생각하셨습니다. 보다 더 일을 잘하기 위하여 기도하셨고, 기도하신 힘으로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고 일하십시오.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더 많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하신 연후에 제자들을 선택하시기도 하셨고, 중대한 일을 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메시아가 되시는 것을 밝히실 때에 기도하시고 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일을 하기 앞서 기도해야 합니다. 새로운 일을 하기 앞서 기도해야 합니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사업, 새로운 일꾼을 세워야 합니까
주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그렇게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사역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와 함께 임재하셔서 언제나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가장 큰 사명인 십자가도 기도로 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까지 기도하시면서 생을 마친 것입니다. 기도하고 선교에 임하신 예수님의 정신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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