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전도] 새 천년의 하나님의 선교

본문

20세기의 세기말을 보내고 새 천년의 시일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있다. 희랍인들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전류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시간의 이해를 크로노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역사의 저편으로부터 크로노스적 시간을 역류하여 역사를 꿰뚫고 들어오는 의미 있는 시간을 한 삶 속에서 경험했기에 그러한 시간의 이해를 그들은 카이로스라는 말로 표현했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사건으로 우리를 향해 질주해 들어오는 창조적인 시간이다. 21세기에는 이전에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그야말로 새로운 천년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선교에 대한 일대 반성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선교의 중심이 교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축을 옮겨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교회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역사의 지평으로 선교 개념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선교개념에 있어서 교회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선교개념의 확장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왜 기독교선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지평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라는 지평으로 그 자리를 옮겨가는 것일까 여기에 중요한 역사적 관심이 있게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라는 지평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해 나갈 신학적 역사의식이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이해되려면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개념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일찍이 쿼크(J. A. Kirk)는 현대 선교개념을 다섯 가지 범주로 설명한다. 첫째는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일, 둘째는 인간을 구별하지 않고 섬기는 일, 셋째는 진리를 선포하는 일, 넷째는 사회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 다섯째는 부패하고 분열된 세계에서 화해와 해방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그것이다.
환경문제에서 시작하여 사회 윤리적 실천범주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이 쿼크의 주장이다. 쿼크의 선교 신학적 이해의 폭이 수용할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쿼크의 이해가 기독교 선교에 이루어지고 있는 보편적 특성을 일반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이해 속에는 선교현장의 특수한 정황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쿼크의 이해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에 대한 이해의 장단점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한국 교회의 선교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선교의 주체들이 개교회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선교 신학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개체교회 중심적 선교 운동은 모든 교인들을 선교적 과제에 관심을 갖게 함으로서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불러오는 원동력이 되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체교회 중심의 성장과 확장을 통한 선교 이해가 최근 교회 성장이 주춤하면서 다소 문제가 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교회 성장이 정지되는 현상이 일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교회의 성장을 불러 올 수 있었던 선교 개념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한국 교회들이 선교 신학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사실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는 기독교 선교가 지나치게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민한 역사 의식이 없는 무시간적, 무공간적 선교 개념을 불러옴으로서 비역사적 선교개념을 형성하게 하였다.
 둘째로는 첫 번째 경우의 후속에 해당하는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으로 탈 역사적 선교개념 아래 진행된 선교는 피선교인의 구체적인 삶에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즉 기독교 신앙의 능력이 표면적 삶에 관계되는 것에 그치고 구체적인 사회, 경제, 정치적 현실과는 관계형식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신학적 토대가 약한 선교개념은 건전하지 못한 토착화를 수용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건전하지 못한 토착화란 한 사회나 어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 문화적 습성을 기독교인들이 은연중 기독교적인 가치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을 말한다.
이렇게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선교 신학적 토대가 취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큰 요인은 교회가 여전히 "교회를 위한 선교"라는 협소한 선교개념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갇히고 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역사도 교회 안에 갇히고 마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에서 성령운동이 카리스마적 성령운동으로 제약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혹은 성령의 역사가 교회 속에 갇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선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지평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들은 역사의식의 성숙이 요구되는 현장에 놓여 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세 가지 갈등구조가 있다. 첫째는 기존세대와 새로운 세대간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역사 의식의 결여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전근대적 가치를 가지고 현대적 가치와 충돌하며 과거에 종속된 이해를 가지고 현재의 이해를 구축하려한다면 세대간의 갈등은 기성세대에게 책임이 있다. 오늘날 교육받고 있는 대다수 젊은이들은 사서오경의 원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심화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배우고 익히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원리를,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를, 문화적으로는 범세계적 문화를,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탈 권위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새로운 세대들의 역사의식은 범세계적이며 동시에 개인주의적 자유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오늘의 기독교 속에는 역사의식의 결여로 인하여 존속되고 있는 남녀차별의 원리가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는 윤리적 권위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의 인격과 성숙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며 외양적인 차이가 개인의 능력이나 성숙과는 상관없이 차별의 원리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원리들이 한국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유는 유교적 원리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현대적 역사 의식에 깨여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시대착오적인 기독교로 오인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지성인들과 일반 교인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 있다.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제도적 불의, 권력의 오용, 인권의 침해 그리고 시대사조의 비윤리적 속성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는 일에 있어서 무능하거나 게으른 기독교인들을 양산해 왔다. 이러한 요인은 계속 기독교 공동체를 우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과 종교 속에 깊이 베어 있는 미래의 지평을 재평가한 사람은 교황도 아니고 또한 교회의 목사도 아닌 1970년 독일의 블로흐(Ernst Bloch)이다. 그의 저작인 "희망의 원리"는 기독교 신학에 많은 통찰을 주었다. 그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비판하고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보는 통전적 시각을 열었으며 과거의 찬란한 유산들은 미래 없이 해석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즉, 예를 들어보면 그는 만일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의 궁극적 존재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인간의 도상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블로흐의 입장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비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제도와 이념과 가치들에 대한 비판을 뜻한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블로흐의 이러한 사상은 새 천년의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라는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종교의 자기 충족적 이해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기 검증적 개방성을 요구하는 사고의 틀을 주고 있으며, 둘째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미결성을 받아들임으로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 그리고 셋째는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인간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열린 교회로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열린 교회는 자기 부정(Self - negation)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해석을 향한 개방성은 바로 생명을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지평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론적 기초의 한계를 극복하고 교회를 뛰어 넘는 새로운 선교개념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과 관심은 교회라는 테두리가 인간성을 담아내는 그릇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의 장이 되도록 교회 스스로의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신학적 확신을 선언한지 반세기, 그리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는 이 시점에 우리 한국 교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보다는 교회의 선교에 치중함으로서 기독교 선교의 과제를 축소하거나 왜곡하여 스스로 기독교의 미래를 어둡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다가오는 3천년 대는 교회의 열린 사고, 이원론적인 오류의 극복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생명가치의 수용과 신학적 역사의식의 강화가 요청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가야 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현장인 오늘의 세계와 역사는 어떠한가 도시화, 시장화, 정보화, 중심부의 다극화, 불확실성, 역사의 종말 등등이 새 밀레니엄의 언어들이다. 역사는 더 이상 "구원사"나 "약속사"의 틀을 담아 낼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역사는 훨씬 복잡하고 중추적이 되었다. 진보냐 순환이냐 발전이냐 환경이냐 라는 이분법적 도식과 양자택일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대안이 될 수도 없다.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해체와 민주주의 승리를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제도종교가 쇠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등장하고 있다. 세속적인 대안적 종교 매체들이 급증하고 있는가 하면 원초적인 영성 체험에 대한 욕구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카이로스적 역할을 지적한다면 70~80년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시킨바 있는 민중신학에서 그 결정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해방신학과 나란히 이른바 제3세계 혹은 제3의 교회에서 출현한 가장 호소력을 가진 신학 사상이라 자부한다. 만일 기장의 신학자들이 지난 어려운 독재치하에서 이러한 신학사상을 탄생시키지 못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여전히 크로노스의 선상에서 자기 확대만을 꿈꾸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교회가 될 때 새 천년의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의 수확으로 치달아 질 것을 믿는다. `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