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파송
본문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도를 위하여 제자들을 두 번째 파송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파송은 앞의 9장에서 12명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루어 졌고 오늘 말씀은 70명의 파송 사건으로서 특별히 누가만의 독자적인 기록이기도 합니다.
파송이란 단어 헬라어 ajpostevllw(아포스텔로)는 신적권위를 의미하는 전문용어로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대표를 파견할 경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절대적인 위임, 즉 권한부여(authorization)라는 크고 깊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왕의 사절, 전권대사"와 같은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만 135회가 기록될 정도로 의미있는 단어로 그 뜻은 “보낸다”는 말입니다. 보내긴 보내되 풀어주기 위하여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70이라는 숫자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상징합니다. 창 10장에는 70개의 민족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는 복음이 곧 전 세계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70은 모세의 의해 임명된 장로들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민 11:16) 그러니까 파송 받은 70인은 특별한 권위가 부여된 자임을 뜻합니다.
단순한 숫자 개념 이상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열방의 의미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전권대사로서 부름 받은 의미가 있는 숫자입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 각동 각처로 보내셨습니다. (1절)
이것은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기위한 장치입니다. 혼자서 전도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상대에게 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은 단순한 복수로서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할 때 위험으로부터 서로 보호하기 위하여 둘 이상씩 팀을 이루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두 세 사람은 가장 작은 숫자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둘은 증인의 숫자입니다. 요 8:17에서 예수님은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둘은 법적인 증인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에 반드시 둘씩 짝을 짓고 하는 것은 서로 힘을 북돋아 주기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였습니다. (2절)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요즘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은 많지만 전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까 신학생들은 많지만 전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까 교인들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전도하기는 꺼려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전도하자고 하면 뒤로 슬쩍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까 전도는 해야 할 텐데 말문이 열리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닙니까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너나 잘 믿어라 하는 것 같아 두렵다는 뜻이 아닙니까 상대방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자신이 목사이면서도 밤 속에 반짝이는 붉은 색 십자가를 보고 공동묘지의 십자가가 연상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꽃밭처럼 보인 것이 그 분의 눈에는 왜 그렇게 비쳤을까 저도 목사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교회가 많은데도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그 목사님은 젊고 몹시 똑똑하고 언변도 훌륭했는데 이미 이 세상 분은 아닙니다.
저는 일꾼이 적다는 말을 단순한 숫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전도하기 싫어하고, 전도하기를 꺼려하고, 전도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영적 상태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3. 주님은 전도자를 보내시면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3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염려를 보게 됩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들은 고통과 박해를 예상하고 출발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정말 이리가 득실거리는 것 같은 세상에 어린양 같은 제자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준엄하신 명령입니다. “갈지어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회피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4. 전도의 주의사항(4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오직 당신만을 의지할 때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성공하는 선교의 힌트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전도란 당일로 복음을 전하고 귀가하거나 같은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란 외국, 즉 다른 문화권의 민족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이 오히려 필수적인 선교의 준비물 같은데 주님은 그것을 거추장스럽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실존을 더욱 가까이 체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선교는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도할 때에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쁜 사람처럼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의식이나 인사로 방해받거나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사업가로서 가야 합니다. 그들의 사업은 저 세상에 관계된 것이므로 세속적인 일에 얽혀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가야 했습니다. 복음전하는 사람이 세상 이야기를 하거나 한담을 한다면 이미 전도자의 본질과 사명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안하지 말라는 것은 인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한담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강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급히 빼앗아 오는 사람이 한담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5. 전도의 방법(9절)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도자 모두에게 신유의 은사가 보편적으로 주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치유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믿으며 기도하라는 뜻이고 치유의 대화, 희망의 대화를 나누라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증거 하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죽음에는 장유유서가 없습니다. 순서 없이 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내세를 준비하는 지식을 가르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상당히 위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죽는다면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 “죽고 난 다음에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어떻하겠습니까” “당신은 지옥이 그렇게도 두렵지 않습니까” “지옥이 없다는 당신에게 내가 지옥에나 가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는 것은 당신 지금 죽을 때가 되었으니 죽을 준비하시오!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의 핵심입니다..
전철이나 길에서 담대하게 전도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이대로 괜찮아”입니다. 과연 지금 이 상태가 준비된 상태인가를 목사도 묻게 됩니다.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유빈 장로님! 직장에서의 간증이 그래도 환상적인 것 같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찔리는 고통이 가능했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뱅쿠버에서 오신 목사님, 배목사! 전도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너무 과격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이것이 전도의 키포인트입니다.
“그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집으로 영접치 아니하면 그 거리로 나와서 그들에게 경고하라. " 는 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전도의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6.결론(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자를 저버리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저버리는 셈이 된다는 매우 준엄한 뜻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파송”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송이란 단어 헬라어 ajpostevllw(아포스텔로)는 신적권위를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절로 보냄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특별히 풀어주기 위하여 보낸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 강사님의 말씀 가운데 몇 가지가 생각납니다. 같이 바라보며 물어봅시다.
1. 당신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쫄았습니까 당당했습니까 옹졸했는가 당당했는가
졸하다(拙) 졸한 사람(a narrow-minded person)
2. 당신은 천국간첩이 아니었습니까(나만 살아 왔나이다)
3. 당신은 마귀가 위협을 느낍니까 위로를 받습니까.
언젠가 간증을 한 것입니다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다시 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권사님이셨는데도 목사님에게 저녁설교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특송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별로 음악성이 없는 저였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설교를 하신다니 아들이 그 힘을 북돋아 들여야겠다는 생각에서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의 처음 찬양 순서 때문에 부담이 되어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어머니가 무슨 설교를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그 때 저의 어머니가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 하고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앞에 나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찬양한 것은 그 때 찬송가로는 219장이었습니다. 지금은 318장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이렇게 해서 다음 절을 부르는데 콧잔등위로 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때까지 슬프거나 기쁜 아무런 감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웬 물입니까 저는 처음에 지붕에서 비가 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밖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제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이건 눈물이다! 하는 순간 저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는 눈물을 콧물과 함께 흘렸습니다.
그 때 제게는 “돌아와 돌아와”그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 때 여기저기서 흑흑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겨우 눈물의 찬양을 마치고 부끄러워서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밤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울었을까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도 없이 어떻게 그리 큰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제가 스스로 회개하며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돌아와 돌아와”하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미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미 돌아와 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는 지금껏 그 눈물의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 주님의 은혜가 임했는가보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는가보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주간에 그때 그 사실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저 배 목사처럼 여기에 아직 주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돌아왔는데 아직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은 큰 아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거듭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소명을 여전히 거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은 “파송”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제자로서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다시 여러분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불신자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지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영적으로 이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위로받는 자가 아니라 위협을 느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간첩이 아니고 천국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하여 졸한 자가 아니고 당당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파송이란 단어 헬라어 ajpostevllw(아포스텔로)는 신적권위를 의미하는 전문용어로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대표를 파견할 경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절대적인 위임, 즉 권한부여(authorization)라는 크고 깊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왕의 사절, 전권대사"와 같은 것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만 135회가 기록될 정도로 의미있는 단어로 그 뜻은 “보낸다”는 말입니다. 보내긴 보내되 풀어주기 위하여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70이라는 숫자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상징합니다. 창 10장에는 70개의 민족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는 복음이 곧 전 세계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70은 모세의 의해 임명된 장로들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민 11:16) 그러니까 파송 받은 70인은 특별한 권위가 부여된 자임을 뜻합니다.
단순한 숫자 개념 이상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열방의 의미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전권대사로서 부름 받은 의미가 있는 숫자입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 각동 각처로 보내셨습니다. (1절)
이것은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기위한 장치입니다. 혼자서 전도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상대에게 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둘”은 단순한 복수로서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할 때 위험으로부터 서로 보호하기 위하여 둘 이상씩 팀을 이루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두 세 사람은 가장 작은 숫자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둘은 증인의 숫자입니다. 요 8:17에서 예수님은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둘은 법적인 증인의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에 반드시 둘씩 짝을 짓고 하는 것은 서로 힘을 북돋아 주기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2.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하였습니다. (2절)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요즘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교인들은 많지만 전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까 신학생들은 많지만 전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까 교인들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전도하기는 꺼려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전도하자고 하면 뒤로 슬쩍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까 전도는 해야 할 텐데 말문이 열리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닙니까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너나 잘 믿어라 하는 것 같아 두렵다는 뜻이 아닙니까 상대방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어떤 분은 자신이 목사이면서도 밤 속에 반짝이는 붉은 색 십자가를 보고 공동묘지의 십자가가 연상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꽃밭처럼 보인 것이 그 분의 눈에는 왜 그렇게 비쳤을까 저도 목사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교회가 많은데도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 그 목사님은 젊고 몹시 똑똑하고 언변도 훌륭했는데 이미 이 세상 분은 아닙니다.
저는 일꾼이 적다는 말을 단순한 숫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전도하기 싫어하고, 전도하기를 꺼려하고, 전도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영적 상태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3. 주님은 전도자를 보내시면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3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염려를 보게 됩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들은 고통과 박해를 예상하고 출발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정말 이리가 득실거리는 것 같은 세상에 어린양 같은 제자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준엄하신 명령입니다. “갈지어다”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회피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할렐루야!
4. 전도의 주의사항(4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오직 당신만을 의지할 때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성공하는 선교의 힌트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전도란 당일로 복음을 전하고 귀가하거나 같은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란 외국, 즉 다른 문화권의 민족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이 오히려 필수적인 선교의 준비물 같은데 주님은 그것을 거추장스럽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실존을 더욱 가까이 체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선교는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도할 때에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쁜 사람처럼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의식이나 인사로 방해받거나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사업가로서 가야 합니다. 그들의 사업은 저 세상에 관계된 것이므로 세속적인 일에 얽혀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가야 했습니다. 복음전하는 사람이 세상 이야기를 하거나 한담을 한다면 이미 전도자의 본질과 사명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안하지 말라는 것은 인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한담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강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급히 빼앗아 오는 사람이 한담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5. 전도의 방법(9절)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도자 모두에게 신유의 은사가 보편적으로 주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치유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믿으며 기도하라는 뜻이고 치유의 대화, 희망의 대화를 나누라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증거 하라는 뜻입니다.
그 말씀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죽음에는 장유유서가 없습니다. 순서 없이 가는 것이 죽음입니다. 내세를 준비하는 지식을 가르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상당히 위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죽는다면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 “죽고 난 다음에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어떻하겠습니까” “당신은 지옥이 그렇게도 두렵지 않습니까” “지옥이 없다는 당신에게 내가 지옥에나 가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는 것은 당신 지금 죽을 때가 되었으니 죽을 준비하시오!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의 핵심입니다..
전철이나 길에서 담대하게 전도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이대로 괜찮아”입니다. 과연 지금 이 상태가 준비된 상태인가를 목사도 묻게 됩니다.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유빈 장로님! 직장에서의 간증이 그래도 환상적인 것 같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찔리는 고통이 가능했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뱅쿠버에서 오신 목사님, 배목사! 전도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너무 과격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이것이 전도의 키포인트입니다.
“그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집으로 영접치 아니하면 그 거리로 나와서 그들에게 경고하라. " 는 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전도의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6.결론(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자를 저버리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저버리는 셈이 된다는 매우 준엄한 뜻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파송”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송이란 단어 헬라어 ajpostevllw(아포스텔로)는 신적권위를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사절로 보냄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특별히 풀어주기 위하여 보낸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 강사님의 말씀 가운데 몇 가지가 생각납니다. 같이 바라보며 물어봅시다.
1. 당신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쫄았습니까 당당했습니까 옹졸했는가 당당했는가
졸하다(拙) 졸한 사람(a narrow-minded person)
2. 당신은 천국간첩이 아니었습니까(나만 살아 왔나이다)
3. 당신은 마귀가 위협을 느낍니까 위로를 받습니까.
언젠가 간증을 한 것입니다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다시 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권사님이셨는데도 목사님에게 저녁설교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특송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별로 음악성이 없는 저였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설교를 하신다니 아들이 그 힘을 북돋아 들여야겠다는 생각에서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의 처음 찬양 순서 때문에 부담이 되어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어머니가 무슨 설교를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 그 때 저의 어머니가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 하고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앞에 나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찬양한 것은 그 때 찬송가로는 219장이었습니다. 지금은 318장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이렇게 해서 다음 절을 부르는데 콧잔등위로 물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때까지 슬프거나 기쁜 아무런 감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웬 물입니까 저는 처음에 지붕에서 비가 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밖에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제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이건 눈물이다! 하는 순간 저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는 눈물을 콧물과 함께 흘렸습니다.
그 때 제게는 “돌아와 돌아와”그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 때 여기저기서 흑흑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겨우 눈물의 찬양을 마치고 부끄러워서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밤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왜 울었을까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도 없이 어떻게 그리 큰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제가 스스로 회개하며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돌아와 돌아와”하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미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미 돌아와 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는 지금껏 그 눈물의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 주님의 은혜가 임했는가보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는가보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주간에 그때 그 사실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저 배 목사처럼 여기에 아직 주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돌아왔는데 아직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않은 큰 아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거듭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소명을 여전히 거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은 “파송”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의 제자로서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다시 여러분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불신자에게 가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지는 자가 되지 마시고 영적으로 이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위로받는 자가 아니라 위협을 느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간첩이 아니고 천국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하여 졸한 자가 아니고 당당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