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구원과 선교
본문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방법이고, ②또하나는 골목 골목을 걸어 다니면서 자세히 살펴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면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가 있지만 골목을 알 수 없고, 골목만 누비다 보면 전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언제나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방법을 병행해서 성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과 선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포로 시작됩니다(창1:1).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곧바로 인간에게 그 초점을 좁히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인간의 문제를 클로즈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이야기는 타락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창세기 3장부터는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로 타락한 인간들이 빚어내는 죄악과, 그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과 죽음을 그냥 묵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사건은 구원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족장의 이야기이건, 이스라엘의 민족사건 간에… 우리는 성서의 모든 내용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고,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선지자들, 사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그리스도, 사도들... , 그리고 교회가 탄생하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담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르셨을까" 하는 그 부르심의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름을 받은 그 한 사람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즉,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속의 역사는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에서부터 활짝 열립니다. 그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성경 전체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요, 계획이요,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역시 아브라함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통하여 '세계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창12:1-3).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다분히 전 세계적인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이나 사사들을 통하여 구원하셨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사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사도들의 시대를 지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축복하시고 인간을 만나시던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마16:18-19).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바로 '구원'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두지 않은 교회, 국내와 세계 선교에 초점을 맞추지 아니한 교회는 교회 존립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요, 그런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교회의 선교는 다분히 '세계적'인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천하 만민을 구원하도록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성령을 받아 구원의 주 예수님을 증거하며,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뜻을 펴야 하는 것입니다(행1:8, 마24:14).
그래서 성경은 두 개의 큰 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이라는 산이고, 또 하나는 전도 즉 '선교'라는 산입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산맥으로 성경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이 두가지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구원과 선교' 이 두가지... 성경의 대 주제를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구원을 이루고 선교를 이루는 영광의 도구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바 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전도하는 사람, 선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 그(사람)를 통하여 주(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구원과 선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도 '구원'이요, 전체적인 내용도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바로 '구원'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듣고, 이해할 때.... '구원과 선교'라는 관점에서 언제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구원과 선교' 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이 들려, 무덤 사이에서 살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동네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 줄리가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동네에서 쫓겨나 오랜 기간동안 옷도 입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묘지에 가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가 주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그냥 무덤에서 살고 있는데, 주님이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왜 찾아가셨을까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찾아 가셨을까요....
물론 귀신을 쫓아내고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고 찾아가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왜 그를 찾아 가셨습니까...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바로, '구원과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그 속에 거하는 악한 귀신을 향하여, "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소서!"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니, 그는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많은 귀신이 이 사람의 몸에 거하면서,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하며, 그의 몸을 제어하고 광야로 나아가 온갖 추한 모습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놓아도 어찌나 힘이 센지 그것을 끊고 사람들을 해칠 뿐만 아니라, 광야로 나가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무덤에서 거하게 한 것입니다.
귀신에게 이끌려 다니는 이 사람... ,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기를 "무저갱에 들어가라"고 명하지 말 것을 간청하였는데, 마침 거기에는 많은 돼지 떼들이 있어서 그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가므로... 그 많은 돼지 떼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모두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무서워 도망을 치면서 이 사실을 성내와 촌에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고,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재산적인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사람이 온전해진 것 보다는 돼지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천하보다도 인간의 한 생명을 더욱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밝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되니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처럼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치고 그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모시면 샘솟는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들렸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의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광명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제는 옷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 왔습니다. 그는 주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던 인생이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인생을 고쳐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그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남은 일생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수종을 들어도 못 갚을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그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9절에 보면,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내어쫓은 그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우리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내어 쫓은 그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란 말인가!... , 이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생애에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님만 따라 다닐려고 하는데, 왜 가기도 싫은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이 야속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주님이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에.... 집과 고향과 식구와 직장을 버리고서라도,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부친이 죽어 장례식을 마치고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장례식마져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즉시 따라 오라고 까지 하셨습니다(마8:21F).
그러던 분이 이번에는 따라가겠다고 나선 사람에게,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라고 돌려보내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 주님이 이 사람을 집으로 가라고 하셨을까...
1. 체험한 것을 함께 나누라
첫째로, 주님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신 이유는 그가 체험했던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일이 사람들에게 고하라는 것입니다. 고쳐주신, 그 일에 대해서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증거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구속의 사건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그대로를 우리가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받은바 은혜를... 집으로 돌아가시면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걸 원하세요....
오늘, 이 사람은 집에서 떠나 병자로 지내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귀신을 물리쳐 온전한 사람이 되었으니, 집에 가게 된다면 푹 쉬면서 요양할 만도 합니다. 잠도 실컷 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도 싶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있으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험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집에 가시면 "아이구 피곤하다... " 그러면서 누워서 잠을 잔다든지 TV만 보지 마시고... 은혜의 경험을 나눠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집으로 가서도 그런 사실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보실 때 그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집에서 나올 때는 병자의 몸으로 쫓겨났지만, 돌아갈 때에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증인의 역할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모였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요한 목적을 깜빡 잊을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은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예배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밀린 공부를 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이는 생각하기를 "오늘은 식구들과 모처럼 쇼핑을 가든지 야외로 나가 봐야지... "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이는 "예배가 끝나면, 얼른 가게 문을 열어야지"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으로 가는 목적은 먹고살기 위한 의식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난 성도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면서 '생각'을 해야 합 니다.
"오늘 내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오늘 만난 주님을.... 내 가족들에게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그 자녀에게, 자녀는 그 부모에게 전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하고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증인'이라는 말씀은 73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거'라는 말씀은 무려 137번 기록되고 있으며,
'전도'라는 말씀은 25번,
'전파'라는 말씀은 93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증인이 될 것에 대해서 성경은 328번이나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막16:15절에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가되, 받은 바 은혜에 대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가서 일일이 고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분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주님이 내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일일이 증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음화의 첫 번째 순서는 가정이다.
둘째로, 집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복음화의 가장
첫번째 순서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귀신 들렸던 이 사람의 집에는 자기를 쫓아낸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 돌봐 주지도 않고, 학대하고 내어 쫓았는데... ,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러한 사정을 모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최소한... , 우리 가정은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 인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 해야할 가장
첫번째 대상은 바로, 우리의 가정이며 우리의 가족입니다.
만일, 집에 가서 증거 하지 않으면 집으로 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에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집으로 돌아가 여호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마가복음 5장에도 나오는데, 막5:19절 에서는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친속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가족, 친지, 가까운 이웃입니다. 바로 그 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귀신 나간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하셨는지 온 성내에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행1:8절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요, 현재 내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온 유대는 - 이스라엘, 즉 우리나라를 말하며,
사마리아는 - 이방나라, 즉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개인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우리의 가정인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나서 우리 동네, 우리 나라, 그리고 다른 나라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차적이면서도 동시적입니다.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한 다음에 유대와 사마리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도 해야 되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동시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때가 온다
셋째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눅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다같이 죽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음부에 가서야 부자는 비로소 크게 깨닫고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생각하기를 자기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만은 절대로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잠깐만이라도 자기를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후회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전도를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수십만 명을 주께로 인도한 19세기 미국의 대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님은 하루에 한 사람에게 꼭 전도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 그는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밤중에 거리에 나가 전도대상을 찾는데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예수님을 아시나요"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술주정뱅이는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쫓겨오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에 3개월이 지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그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시나요"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냈으나 그 후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지 못한 거룩한 근심이... 한 심령을 회개케 하고 구원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말주변도 없고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따라 다만 순종하고.... 복음의 씨앗을 심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3: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만 전하면 돼요... 그러면 주님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때를 놓치기 전에 어서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2절 말씀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구원의 시기.. 전도의 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요,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가족이나 이웃이 있다면 그분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가 여호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오늘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①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방법이고, ②또하나는 골목 골목을 걸어 다니면서 자세히 살펴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면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가 있지만 골목을 알 수 없고, 골목만 누비다 보면 전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두가지는 언제나 병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방법을 병행해서 성경을 바라보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과 선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포로 시작됩니다(창1:1).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세계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곧바로 인간에게 그 초점을 좁히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4절부터는 인간의 문제를 클로즈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이야기는 타락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창세기 3장부터는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여호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로 타락한 인간들이 빚어내는 죄악과, 그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과 죽음을 그냥 묵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원대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사건은 구원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족장의 이야기이건, 이스라엘의 민족사건 간에… 우리는 성서의 모든 내용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고, 노아를 부르시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선지자들, 사사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그리스도, 사도들... , 그리고 교회가 탄생하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담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르셨을까" 하는 그 부르심의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름을 받은 그 한 사람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즉,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속의 역사는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에서부터 활짝 열립니다. 그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성경 전체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요, 계획이요,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역시 아브라함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통하여 '세계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창12:1-3).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다분히 전 세계적인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들이나 사사들을 통하여 구원하셨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사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사도들의 시대를 지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축복하시고 인간을 만나시던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제, 세계 만민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마16:18-19).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바로 '구원'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파에 목적을 두지 않은 교회, 국내와 세계 선교에 초점을 맞추지 아니한 교회는 교회 존립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요, 그런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교회의 선교는 다분히 '세계적'인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천하 만민을 구원하도록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성령을 받아 구원의 주 예수님을 증거하며,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뜻을 펴야 하는 것입니다(행1:8, 마24:14).
그래서 성경은 두 개의 큰 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이라는 산이고, 또 하나는 전도 즉 '선교'라는 산입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산맥으로 성경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이 두가지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것을 설명하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구원과 선교' 이 두가지... 성경의 대 주제를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구원을 이루고 선교를 이루는 영광의 도구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선교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바 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전도하는 사람, 선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 그(사람)를 통하여 주(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구원과 선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도 '구원'이요, 전체적인 내용도 '구원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바로 '구원'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듣고, 이해할 때.... '구원과 선교'라는 관점에서 언제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구원과 선교' 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이 들려, 무덤 사이에서 살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서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버림을 받았으니 동네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 줄리가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동네에서 쫓겨나 오랜 기간동안 옷도 입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묘지에 가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가 주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그냥 무덤에서 살고 있는데, 주님이 그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왜 찾아가셨을까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그를 찾아 가셨을까요....
물론 귀신을 쫓아내고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고 찾아가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이 왜 그를 찾아 가셨습니까...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바로, '구원과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그 속에 거하는 악한 귀신을 향하여, "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소서!"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니, 그는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많은 귀신이 이 사람의 몸에 거하면서,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하며, 그의 몸을 제어하고 광야로 나아가 온갖 추한 모습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놓아도 어찌나 힘이 센지 그것을 끊고 사람들을 해칠 뿐만 아니라, 광야로 나가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무덤에서 거하게 한 것입니다.
귀신에게 이끌려 다니는 이 사람... ,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군대 귀신은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기를 "무저갱에 들어가라"고 명하지 말 것을 간청하였는데, 마침 거기에는 많은 돼지 떼들이 있어서 그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가므로... 그 많은 돼지 떼들이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모두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무서워 도망을 치면서 이 사실을 성내와 촌에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고,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이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재산적인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사람이 온전해진 것 보다는 돼지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천하보다도 인간의 한 생명을 더욱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밝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되니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이처럼 문제가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치고 그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모시면 샘솟는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귀신들렸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기에 그의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광명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제는 옷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 왔습니다. 그는 주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던 인생이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인생을 고쳐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그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남은 일생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수종을 들어도 못 갚을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그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9절에 보면,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내어쫓은 그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우리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내어 쫓은 그 집으로 어떻게 돌아가란 말인가!... , 이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생애에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님만 따라 다닐려고 하는데, 왜 가기도 싫은 집으로 가라고 하시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주님이 야속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주님이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에.... 집과 고향과 식구와 직장을 버리고서라도,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부친이 죽어 장례식을 마치고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장례식마져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즉시 따라 오라고 까지 하셨습니다(마8:21F).
그러던 분이 이번에는 따라가겠다고 나선 사람에게,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라고 돌려보내시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 주님이 이 사람을 집으로 가라고 하셨을까...
1. 체험한 것을 함께 나누라
첫째로, 주님이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신 이유는 그가 체험했던 것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일이 사람들에게 고하라는 것입니다. 고쳐주신, 그 일에 대해서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증거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구속의 사건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그대로를 우리가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받은바 은혜를... 집으로 돌아가시면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걸 원하세요....
오늘, 이 사람은 집에서 떠나 병자로 지내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귀신을 물리쳐 온전한 사람이 되었으니, 집에 가게 된다면 푹 쉬면서 요양할 만도 합니다. 잠도 실컷 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도 싶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있으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험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집에 가시면 "아이구 피곤하다... " 그러면서 누워서 잠을 잔다든지 TV만 보지 마시고... 은혜의 경험을 나눠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집으로 가서도 그런 사실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보실 때 그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집에서 나올 때는 병자의 몸으로 쫓겨났지만, 돌아갈 때에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증인의 역할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모였다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중요한 목적을 깜빡 잊을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은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예배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밀린 공부를 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이는 생각하기를 "오늘은 식구들과 모처럼 쇼핑을 가든지 야외로 나가 봐야지... "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이는 "예배가 끝나면, 얼른 가게 문을 열어야지"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으로 가는 목적은 먹고살기 위한 의식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난 성도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면서 '생각'을 해야 합 니다.
"오늘 내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오늘 만난 주님을.... 내 가족들에게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그 자녀에게, 자녀는 그 부모에게 전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하고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증인'이라는 말씀은 73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거'라는 말씀은 무려 137번 기록되고 있으며,
'전도'라는 말씀은 25번,
'전파'라는 말씀은 93번이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증인이 될 것에 대해서 성경은 328번이나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막16:15절에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가되, 받은 바 은혜에 대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가서 일일이 고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분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주님이 내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일일이 증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음화의 첫 번째 순서는 가정이다.
둘째로, 집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복음화의 가장
첫번째 순서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귀신 들렸던 이 사람의 집에는 자기를 쫓아낸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 돌봐 주지도 않고, 학대하고 내어 쫓았는데... ,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이러한 사정을 모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최소한... , 우리 가정은 내게 맡겨주신 십자가 인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 해야할 가장
첫번째 대상은 바로, 우리의 가정이며 우리의 가족입니다.
만일, 집에 가서 증거 하지 않으면 집으로 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에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집으로 돌아가 여호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마가복음 5장에도 나오는데, 막5:19절 에서는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친속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가족, 친지, 가까운 이웃입니다. 바로 그 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39절에 보면, 귀신 나간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하셨는지 온 성내에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행1:8절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요, 현재 내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온 유대는 - 이스라엘, 즉 우리나라를 말하며,
사마리아는 - 이방나라, 즉 다른 국가,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개인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우리의 가정인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나서 우리 동네, 우리 나라, 그리고 다른 나라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차적이면서도 동시적입니다. 예루살렘을 완전히 정복한 다음에 유대와 사마리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도 해야 되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동시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때가 온다
셋째로,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눅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다같이 죽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음부에 가서야 부자는 비로소 크게 깨닫고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생각하기를 자기 집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만은 절대로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잠깐만이라도 자기를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후회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나 전도를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수십만 명을 주께로 인도한 19세기 미국의 대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님은 하루에 한 사람에게 꼭 전도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 그는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책감 때문에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밤중에 거리에 나가 전도대상을 찾는데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예수님을 아시나요"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술주정뱅이는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습니다. 무디는 쫓겨오다시피 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에 3개월이 지나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그 술주정뱅이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시나요" 하는 말을 듣고 화를 냈으나 그 후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지 못한 거룩한 근심이... 한 심령을 회개케 하고 구원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말주변도 없고 전도를 잘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따라 다만 순종하고.... 복음의 씨앗을 심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3:6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만 전하면 돼요... 그러면 주님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때를 놓치기 전에 어서 속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2절 말씀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구원의 시기.. 전도의 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요,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가족이나 이웃이 있다면 그분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가 여호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오늘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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