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울지 말라, 일어나라
본문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본문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는데,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통해 다시 살아난 ’소생기적’이야기입니다. 본문 13절에 ’울지 말라’는 명령과 14절에 ’일어나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모두 주님께서 하신 명령입니다. ’울지 말라’는 명령은 외아들을 잃고 슬픔 가운데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말씀이고, ’일어나라’는 명령은 죽은 청년을 향해 신적 권위로서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명령의 말씀을 따라 ’울지 말라, 일어나라’는 설교제목으로,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소생하는 기적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소생기적’에 대하여 여러 차례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이들 복음서 기자들이 보도해주는 ’소생기적’은 몇 가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을 병에 걸린 자, 곧 병으로 죽어가던 자가 다시 소생하는 경우가 있고, 둘째의 경우는, 완전히 숨을 거둔 자가 그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경우이고,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는, 죽어서 그 시체가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예를 든다면, 첫 번째의 경우는, 누가가 전하는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된 지경에서 다시 소생한 것이고(눅 7:1-10), 두 번째의 경우는, 오늘 본문의 나이성 과부의 독자(눅 7:11-17)와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가 함께 공동으로 보도해주고 있는 회장당 야이로의 딸(마 9:18-19, 23-36, 막 5:21-24, 25-43, 눅 8:41-42, 49-56)이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경우는, 죽어서 시체로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경우입니다. 이 나사로의 보활사건은 요한복음서 기자만이 전하고 있습니다. (요 11:11-44)
이토록 사복음서 뿐만 아니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두 사건의 ’소생기적’을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다비다(도로가)라는 여인을 살리는 사건(행 9:36-43)이고, 두 번째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창문에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로라는 청년을 살린 사건(행 20:7-12)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같은 복음서기자들의 ’소생기적’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밝힐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오늘 우리의 본문에 보도된 ’소생기적’을 통해서 누가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즉 누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이 소생기적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소생기적 사건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의 앞부분인 7장 1-10절은 어떤 백부장의 하인이 소생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7장 2절에 의하면 그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백부장은 이방인이고, 또한 종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입니다. 이 둘은 신분은 다르다고 하지만, 모두가 선택받지 못한 자로서 유대인들로부터 백안시당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믿음으로 인하여 그 종을 고쳐 주셨는데, 결국 죽어가던 그 종을 소생케 해주셨습니다.
이 소생사건 바로 직후에 예수께서 오늘 우리의 본문인 나인성과부의 독자를 살려주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죽은 그녀의 독자를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심으로서 그 외아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에 이어서 7장 18-23절에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그가 ’오실 그이’인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7장 22절에,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7장 11-17절의 ’소생기적’이야기를 바로 받아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세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는 ’소생기적’이야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구세주로 소개하기 위한 목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다시 말하면,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바로 인간을 살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주님, ’구세주’(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의 본문(7:11-17)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16절의 ’큰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소생시키자, 무리들이 ”큰 선지자가 일어나셨다 하고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생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에게 왜 ’큰 선지자’라는 칭호가 적용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와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는 모두 소생의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7-24절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를 봉양하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나타나는데, 우선 그 여인이 과부라는 것과 그 과부의 아들이 외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같은 점들은 바로 예수께서 소생시킨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과 사르밧과부의 외아들의 소생사건을 서로 같은 관점에서 보게 하면서, 예수님을 선지자적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도 열왕기하 4장 26-37절에서 자신을 봉양하던 소넴여인의 외아들을 소생시키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도 소생한 그 아들이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에서 볼 때, 예수는 엘리야와 엘레사, 특히 그 중에서도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분이면서도, 누가는 그들보다 예수님을 더 큰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 설교의 서두에서 예수는 누구신가 누가가 나인성과부의 외아들을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인가 즉 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더 큰 선지자로서 죽은 자를 살리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선자자 중의 선지자인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본문에 되돌아가서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우리들에게, 나에게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1:51-53, 3:11, 4:18, 6:20-21, 24-25, 14:12-14, 21, 16:19-31, 19:8),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 민족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차별당하는 사람들(9:51-56, 10:29-37, 17:15-19),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있는 모든 사람들, 죄인들의 구주입니다(1:77, 4:19, 5:20, 27-32, 7:36-50, 15장, 18:9-14, 19:1-10, 23:42-43, 24:47-48).
특별히 그 당시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집단으로는 여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들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셨으며 그들과 특별한 방식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태도는 그의 제자 공동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여자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예로서, 누가복음 1-2장에서 마리아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2장에서 중심은 남자 요셉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눈에 띄게 자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자리에 곧바로 한 여자가 옆에 세워집니다. 즉 시몬 옆에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2:25-38). 오늘 우리의 본문의 나인성 과부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즉 가버나움의 백부장 옆에 나이성 과부가 서있습니다(7:1-10, 11-17). 이렇게 누가는 여자들을 사도들과 나란히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등장시키고, 그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들로 서있게 합니다.
이렇게 여자에게, 사회적으로 멸시천대를 받는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존재가치를 높혀 주신 예수께서 오늘 우리의 본문의 여인,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어 버린 과부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과부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퍽 힘든 자가 바로 그 당시 과부였습니다. 이같은 과부, 의지할 남편도 없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과부에게 그래도 의지할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 대신에 그 아들을 의지하고 위로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만 병들어 죽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캄캄함이 그 여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아들이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였는데, 그 위로자가 죽은 것입니다. 이젠 그 어머니는 의지할데 없는 참으로 외로운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그 외로운 지경에 처해 있는 그 과부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그 여인의 희망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그 여인을 위로합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나인성 과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시는 신적 전권을 가지신 주(主)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마라’고 위로하시는, 단지 동정에서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죽은 아들의 관 옆에서 울고 있는 그 여인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 관 위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을 잃어 버리고 슬퍼 가슴치며 울고 있는 그 어머니에게, 그 여인의 아들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그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울지 말라’고 말로만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위로가 될 만한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인간을,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가난하고 우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같은 위로와 사랑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소생사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외치기를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향해 가까이 오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며, 죄악과 절망 가운데서, 생을 포기해 버리고,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러분들의 선교사역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선교사역같은, 위로와 생명을 주는 사역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과부처럼, 외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와 생계수단이 없는 과부처럼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과 우는 자들, 병든 자들, 낙오된 자들, 절망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참으로 살게 하는 구원(생명)의 선교사역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복음서 기자들은 ’소생기적’에 대하여 여러 차례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이들 복음서 기자들이 보도해주는 ’소생기적’은 몇 가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을 병에 걸린 자, 곧 병으로 죽어가던 자가 다시 소생하는 경우가 있고, 둘째의 경우는, 완전히 숨을 거둔 자가 그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경우이고, 그리고 세 번째의 경우는, 죽어서 그 시체가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예를 든다면, 첫 번째의 경우는, 누가가 전하는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된 지경에서 다시 소생한 것이고(눅 7:1-10), 두 번째의 경우는, 오늘 본문의 나이성 과부의 독자(눅 7:11-17)와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가 함께 공동으로 보도해주고 있는 회장당 야이로의 딸(마 9:18-19, 23-36, 막 5:21-24, 25-43, 눅 8:41-42, 49-56)이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경우는, 죽어서 시체로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경우입니다. 이 나사로의 보활사건은 요한복음서 기자만이 전하고 있습니다. (요 11:11-44)
이토록 사복음서 뿐만 아니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두 사건의 ’소생기적’을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다비다(도로가)라는 여인을 살리는 사건(행 9:36-43)이고, 두 번째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창문에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로라는 청년을 살린 사건(행 20:7-12)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같은 복음서기자들의 ’소생기적’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밝힐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오늘 우리의 본문에 보도된 ’소생기적’을 통해서 누가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즉 누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이 소생기적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소생기적 사건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의 앞부분인 7장 1-10절은 어떤 백부장의 하인이 소생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7장 2절에 의하면 그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백부장은 이방인이고, 또한 종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입니다. 이 둘은 신분은 다르다고 하지만, 모두가 선택받지 못한 자로서 유대인들로부터 백안시당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믿음으로 인하여 그 종을 고쳐 주셨는데, 결국 죽어가던 그 종을 소생케 해주셨습니다.
이 소생사건 바로 직후에 예수께서 오늘 우리의 본문인 나인성과부의 독자를 살려주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죽은 그녀의 독자를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심으로서 그 외아들이 살아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에 이어서 7장 18-23절에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그가 ’오실 그이’인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7장 22절에,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7장 11-17절의 ’소생기적’이야기를 바로 받아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세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는 ’소생기적’이야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외된 자들을 위한 구세주로 소개하기 위한 목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다시 말하면, 예수는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바로 인간을 살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주님, ’구세주’(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의 본문(7:11-17)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16절의 ’큰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소생시키자, 무리들이 ”큰 선지자가 일어나셨다 하고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생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에게 왜 ’큰 선지자’라는 칭호가 적용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와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는 모두 소생의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7-24절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를 봉양하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나타나는데, 우선 그 여인이 과부라는 것과 그 과부의 아들이 외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같은 점들은 바로 예수께서 소생시킨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과 사르밧과부의 외아들의 소생사건을 서로 같은 관점에서 보게 하면서, 예수님을 선지자적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도 열왕기하 4장 26-37절에서 자신을 봉양하던 소넴여인의 외아들을 소생시키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도 소생한 그 아들이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적인 배경에서 볼 때, 예수는 엘리야와 엘레사, 특히 그 중에서도 엘리야 선지자와 같은 분이면서도, 누가는 그들보다 예수님을 더 큰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들은 이 설교의 서두에서 예수는 누구신가 누가가 나인성과부의 외아들을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인가 즉 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더 큰 선지자로서 죽은 자를 살리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선자자 중의 선지자인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본문에 되돌아가서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우리들에게, 나에게는 어떠한 존재이며, 그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누가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1:51-53, 3:11, 4:18, 6:20-21, 24-25, 14:12-14, 21, 16:19-31, 19:8),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사람들, 민족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차별당하는 사람들(9:51-56, 10:29-37, 17:15-19),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죄있는 모든 사람들, 죄인들의 구주입니다(1:77, 4:19, 5:20, 27-32, 7:36-50, 15장, 18:9-14, 19:1-10, 23:42-43, 24:47-48).
특별히 그 당시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집단으로는 여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들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주셨으며 그들과 특별한 방식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태도는 그의 제자 공동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가치 척도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여자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예로서, 누가복음 1-2장에서 마리아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장-2장에서 중심은 남자 요셉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눈에 띄게 자주 한 남자가 등장하는 자리에 곧바로 한 여자가 옆에 세워집니다. 즉 시몬 옆에 여예언자 한나가 등장합니다(2:25-38). 오늘 우리의 본문의 나인성 과부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즉 가버나움의 백부장 옆에 나이성 과부가 서있습니다(7:1-10, 11-17). 이렇게 누가는 여자들을 사도들과 나란히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등장시키고, 그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들로 서있게 합니다.
이렇게 여자에게, 사회적으로 멸시천대를 받는 여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의 존재가치를 높혀 주신 예수께서 오늘 우리의 본문의 여인,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어 버린 과부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과부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퍽 힘든 자가 바로 그 당시 과부였습니다. 이같은 과부, 의지할 남편도 없는 불쌍하기 그지없는 과부에게 그래도 의지할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 대신에 그 아들을 의지하고 위로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만 병들어 죽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캄캄함이 그 여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아들이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였는데, 그 위로자가 죽은 것입니다. 이젠 그 어머니는 의지할데 없는 참으로 외로운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그 외로운 지경에 처해 있는 그 과부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그 여인의 희망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그 여인을 위로합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나인성 과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시는 신적 전권을 가지신 주(主)님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마라’고 위로하시는, 단지 동정에서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죽은 아들의 관 옆에서 울고 있는 그 여인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 관 위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들을 잃어 버리고 슬퍼 가슴치며 울고 있는 그 어머니에게, 그 여인의 아들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그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울지 말라’고 말로만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위로가 될 만한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인간을,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가난하고 우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같은 위로와 사랑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소생사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외치기를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향해 가까이 오셔서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며, 죄악과 절망 가운데서, 생을 포기해 버리고,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명령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러분들의 선교사역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선교사역같은, 위로와 생명을 주는 사역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과부처럼, 외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와 생계수단이 없는 과부처럼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과 우는 자들, 병든 자들, 낙오된 자들, 절망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참으로 살게 하는 구원(생명)의 선교사역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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