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본문
만약 어떤 지도자가 뜻을 세우고 그의 과업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그와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협력자로 구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과업의 성패(成敗)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팀워크가 필요하고,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열 두 명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협력자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 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이 열 두 명의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ordinary) 사람들이었습니다. 각계 각 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었습니다. 어부, 과격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 세리, 그리고 직업이 확실치 않은 신원 미상의 사람들까지 망라되었습니다. 우리 생각하고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유능한 일꾼들이 아니라 별로 내 놓을 것이 없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유능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많이 배워야 여호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더 위대하십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영국, 1761-1834)는 직업이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해서 밤에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이런 사람을 그의 일에 쓰실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무능하다고(powerless)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helpless)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는 하찮은 사람이 없고, 쓸모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럽 선교의 문을 연 빌립보 교회는 대단한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루디아(Lydia)라는 한 여자의 작은 헌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사도행전 16:14).
이 열 두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들 중에 동네 유지(有志)도 없고, 돈 많은 재력가도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名望)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順從, obedience)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복음 4:19)”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모두 순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순종의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불안정한 곳으로 부르십니다. 확실한 곳에서 있는 사람을 불확실한 곳을 부르십니다. 보장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자리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편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자리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래서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자직(discipleship)의 핵심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순종을 테스트하십니다. 끊임없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테스트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순종을 끊임없이 테스트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테스트는 몇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계속해서 테스트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 보다 불순종의 사람이 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부른 사람들을 3년 동안 제자로 양육했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熱情)을 가슴에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인격(人格)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들을 사도(使徒)로 임명하여 세상에 파송(派送)하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이 열 두 사람을 철저하게 사도로 훈련시켰습니다. 첫째로, 너희들이 나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너희를 통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데, 유독 선교의 현장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기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적(行跡)에는 언제나 기적이 동반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을 하면 귀신이 쫓겨나갑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능력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서 그냥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비전을 품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둘째로, 누구를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the people of Israel God's lost sheep)”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모든 열방,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들이 누구입니까 인생의 안내자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눈은 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잃어 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9: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냈습니다. 가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 8절)”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를 값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11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I long to see you so that I may impart to you some spiritual gift to make you strong)……”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합니까 바울은 “네가 로마에 가서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로마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그 꿈은 어느새 열망(熱望)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신령한 은사들(the spiritual gifts)을 로마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로마 사람들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열망을 상실한 세대입니다. 가슴에 한 영혼을 향한 뜨거움이 없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열망이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 570년 전에 예레미야의 가슴에 불타오르던(예레미야 20:9),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뜨거운 열정이 없습니다. 가슴이 너무 차갑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책임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2,000년 전에 그의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을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파송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셋째로,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사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9-10절)”고 하셨습니다. 돈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옷도 두 벌 이상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상황과 맞지 않은지 모릅니다. 현대 선교에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북한 선교에도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샤워도 해야 하고, 옷도 갈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정신은 지금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파송을 받아 나가지만, 너희의 능력으로 일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 지신다. 너희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누가복음 22:35에 보면 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베드로의 배반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뜻밖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제자들은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절). ”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세상의 영적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이리들은 잡아 먹을 양들을 찾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도 자기 시대의 이런 영적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전서 5:8). ” 사도 바울도 자기 시대의 영적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비뚤어지고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흠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오(빌립보서 2:15). ”
지금 우리들이 처한 영적인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리 속에 던져진 양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틈에 들어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략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것입니다. N4 성경에는“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라고 했습니다. “shrewd”라는 말은 지혜롭고 영리하다는 뜻도 있지만, 간교하다, 교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뱀과 이리의 간교함과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만큼 영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innocent”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죄가 없고, 깨끗하고,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리의 간교함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우리는 뱀의 간교함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간교함은 뒤에 나오는 순결함과 균형을 맞출 때 이 간교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순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순결함은 때때로 무지가 될 수도 있고, 무모(無謀)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순결함만 강조하다가 무모한 희생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멀리 볼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은 순결함만 갖추었지 그들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모하게 많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워야 하지만 동시에 순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속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로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 일에 쏠려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기독교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6년을 사역한 한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 교회의 선교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갈 것 같다. 하나는 선교의 문을 닫는 것이고,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무모한 시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선교의 문은 당분간 닫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선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단순 논리로 오히려 더 무모한 시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수많은 단기 팀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번 팀보다 더 많은 인원의 단기 팀들도 수없이 다녀갔다. 그리고 이번 팀이 현지 문화에 돌출되는 행동으로 주목 받을 짓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이 현지 사정에 밝은 3명의 한국인 선교사의 인솔 하에 이동을 하지 않았던가 다만 카불-칸다하르 길은 아침에 출발해야 한다는 간단한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부분은 아쉬움으로 진하게 남는다…... 한국교회의 위기관리 능력은 제로 수준에 가깝다. 위기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 ”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도, 그리고 해마다 단기선교 팀을 파송해 온 우리교회도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건에서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처럼 새롭게 들린 적이 과거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터키로 파송 받는 10명의 선교사들은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은 무모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슬림들을 섬기고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들을 파송하는 우리는 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로 이들을 후원하면서 이들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음은 여러분의 차례인 것을 아십시오. 우리는 지금 있는 자리에 그냥 있고 싶은데, 주님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고, 우리의 생을 엔조이 하고 싶은데,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약한 것들을 고쳐 주고, 너희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이 열 두 명의 제자들은 모두 평범한(ordinary) 사람들이었습니다. 각계 각 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었습니다. 어부, 과격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 세리, 그리고 직업이 확실치 않은 신원 미상의 사람들까지 망라되었습니다. 우리 생각하고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유능한 일꾼들이 아니라 별로 내 놓을 것이 없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유능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많이 배워야 여호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더 위대하십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영국, 1761-1834)는 직업이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해서 밤에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하시면 얼마든지 이런 사람을 그의 일에 쓰실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무능하다고(powerless)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helpless)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는 하찮은 사람이 없고, 쓸모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유럽 선교의 문을 연 빌립보 교회는 대단한 사람의 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루디아(Lydia)라는 한 여자의 작은 헌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사도행전 16:14).
이 열 두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들 중에 동네 유지(有志)도 없고, 돈 많은 재력가도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名望)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順從, obedience)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태복음 4:19)”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모두 순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순종의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불안정한 곳으로 부르십니다. 확실한 곳에서 있는 사람을 불확실한 곳을 부르십니다. 보장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자리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편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 자리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래서 순종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자직(discipleship)의 핵심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순종을 테스트하십니다. 끊임없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테스트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순종을 끊임없이 테스트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테스트는 몇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계속해서 테스트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는 순종의 사람이 되기 보다 불순종의 사람이 되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부른 사람들을 3년 동안 제자로 양육했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과 열정(熱情)을 가슴에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인격(人格)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들을 사도(使徒)로 임명하여 세상에 파송(派送)하십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이 열 두 사람을 철저하게 사도로 훈련시켰습니다. 첫째로, 너희들이 나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할 때에 너희를 통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데, 유독 선교의 현장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기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적(行跡)에는 언제나 기적이 동반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손을 얹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병이 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을 하면 귀신이 쫓겨나갑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능력이 아니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서 그냥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비전을 품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둘째로, 누구를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the people of Israel God's lost sheep)”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모든 열방,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들이 누구입니까 인생의 안내자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눈은 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잃어 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9: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누가복음 15: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냈습니다. 가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 8절)”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를 값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11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I long to see you so that I may impart to you some spiritual gift to make you strong)……”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합니까 바울은 “네가 로마에 가서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로마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그 꿈은 어느새 열망(熱望)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신령한 은사들(the spiritual gifts)을 로마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로마 사람들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열망을 상실한 세대입니다. 가슴에 한 영혼을 향한 뜨거움이 없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열망이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 570년 전에 예레미야의 가슴에 불타오르던(예레미야 20:9),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뜨거운 열정이 없습니다. 가슴이 너무 차갑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책임지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2,000년 전에 그의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을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파송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셋째로,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사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9-10절)”고 하셨습니다. 돈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옷도 두 벌 이상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상황과 맞지 않은지 모릅니다. 현대 선교에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북한 선교에도 엄청난 돈이 들어갑니다. 샤워도 해야 하고, 옷도 갈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정신은 지금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파송을 받아 나가지만, 너희의 능력으로 일한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 지신다. 너희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누가복음 22:35에 보면 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베드로의 배반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뜻밖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제자들은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절). ”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세상의 영적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이리들은 잡아 먹을 양들을 찾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도 자기 시대의 이런 영적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베드로전서 5:8). ” 사도 바울도 자기 시대의 영적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비뚤어지고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흠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오(빌립보서 2:15). ”
지금 우리들이 처한 영적인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리 속에 던져진 양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틈에 들어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략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것입니다. N4 성경에는“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라고 했습니다. “shrewd”라는 말은 지혜롭고 영리하다는 뜻도 있지만, 간교하다, 교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뱀과 이리의 간교함과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만큼 영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innocent”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죄가 없고, 깨끗하고,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리의 간교함에 맞서 싸우기 위하여 우리는 뱀의 간교함을 갖춰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간교함은 뒤에 나오는 순결함과 균형을 맞출 때 이 간교함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순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순결함은 때때로 무지가 될 수도 있고, 무모(無謀)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순결함만 강조하다가 무모한 희생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멀리 볼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은 순결함만 갖추었지 그들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모하게 많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워야 하지만 동시에 순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속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로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 일에 쏠려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기독교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6년을 사역한 한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 교회의 선교가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갈 것 같다. 하나는 선교의 문을 닫는 것이고,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무모한 시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선교의 문은 당분간 닫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선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단순 논리로 오히려 더 무모한 시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수많은 단기 팀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번 팀보다 더 많은 인원의 단기 팀들도 수없이 다녀갔다. 그리고 이번 팀이 현지 문화에 돌출되는 행동으로 주목 받을 짓을 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더욱이 현지 사정에 밝은 3명의 한국인 선교사의 인솔 하에 이동을 하지 않았던가 다만 카불-칸다하르 길은 아침에 출발해야 한다는 간단한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부분은 아쉬움으로 진하게 남는다…... 한국교회의 위기관리 능력은 제로 수준에 가깝다. 위기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능력이 아직은 미숙하다. ”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도, 그리고 해마다 단기선교 팀을 파송해 온 우리교회도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건에서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처럼 새롭게 들린 적이 과거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터키로 파송 받는 10명의 선교사들은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은 무모하지 않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슬림들을 섬기고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들을 파송하는 우리는 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로 이들을 후원하면서 이들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음은 여러분의 차례인 것을 아십시오. 우리는 지금 있는 자리에 그냥 있고 싶은데, 주님은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고, 우리의 생을 엔조이 하고 싶은데,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약한 것들을 고쳐 주고, 너희가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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