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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선교하는 주님의영광교회

본문

저는 내일부터 중국 선교를 떠납니다. 내일 아침 인천공항에서 8시 30분 비행기로 옛날 만주의 봉천, 지금은 중국의 선양(沈陽)으로 떠납니다. 성령께서 저를 그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전에 오래 전에 벌써 15년 전에 비전으로 보았습니다. 제가 집사 때에 교회에 새벽기도하러 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제가 눈을 감고 있는데 눈앞에 뭐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강단에 중국 사람이 누군가를 소개했습니다. “셴자이 쟝웨한 무스 라이 쟝다오(現在姜約翰牧師來講道)”(이제 강요한 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하시겠습니다. ) 그런데, 강단에 나와서 중국어로 설교하는 목사님 얼굴을 보니 아니 바로 제 얼굴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제 이름은 강영래였습니다. 분명히 강요한 목사님이 나오신다고 했는데 그곳에서는 제 이름이 강요한, 중국어로 쟝웨한이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15년 전에 제가 분명히 보았던 그 비전이 실제로 이루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던 저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 꿈을 꾸게 하시고 15년이 지난 오늘 그 꿈을 이루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저를 세심하게 인도하고 계시는 성령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 앞으로의 모든 일을 성령님께 맡기오니 성령님께서 친히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그 꿈대로 멀지 않아서 중국에 션더룽야오쨔오훼이(神的榮耀敎會:주님의영광교회)가 세워질 줄 믿습니다. 저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일을 하라고 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이니까 저는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실 줄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사도행전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2000년 전의 사도 때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의 지나간 교회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교회와 사도들을 붙들고 어떻게 복음 전파하는 역사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인데, 초대교회와 사도들에게 임하셨던 동일하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히 임하여 계심을 믿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 전하는 일을 하려하는 목적입니다.
사도행전 1:8은 사도행전 전체를 이끄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지금 우리들을 이끄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역시 우리들도 사도행전의 연장에 있고, 사도행전의 인물들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지내왔습니까
그 교회는 말씀과 기도와 전도하기를 힘을 썼습니다. 사랑이 넘쳤고, 봉사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날마다 수를 더하는 부흥이 있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예루살렘의 부흥하는 모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에만 모여 있고 흩어지지 않는 예루살렘교회에 핍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8-12장은 복음은 예루살렘에 왔지만 이 복음은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핍박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된 것입니다.
복음의 성질이 그러합니다. 나를 구원한 이 복음은 나에게 왔지만 나에게서 그쳐지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왔지만 우리에게 제한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난 사람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아난 것을 알고, 그리스도로 날마다 사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밴 여인이 밴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 같이 자기 속에 잉태된 새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고난 때문에 막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만 제한되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고난 때문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진하게 되었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은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8-12장의 말씀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를 전도하고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고 성령의 역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땅에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특히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와 유대인 사도 베드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강권적인 은혜 역사 가운데 일어난 사건입니다.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복음의 진행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게 만듭니다. 도무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어떤 막힌 벽을 헐게 하는 것이 복음의 역사임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하고,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주일학교 반사를 해 보시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벽에 부딪치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기적의 역사는 바울의 회심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나타난 철저한 율법주의자요,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의 회심은 한 개인의 회심 사건에 불과하지만, 이것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를 위해서 일으키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바울에게만 일어난 일로 아시면 안 됩니다.
오늘도 그러합니다. 나를 구원시키신 성령께서 나를 부르시고 세우셔서 나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며 핍박하는 사람을 만나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역설적인 진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대자를 거꾸러뜨려 복음전파자로 만드실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들에게 이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을 변화시킨 복음은 바울에게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사용하신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복음을 온 세계에 터뜨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구속사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이 은혜를 감사하는데서 머무르면 안됩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에는 뜻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오늘도 세상에 두시면서 각양의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대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은 13-28장에서 나타나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그 시작을 보여주는 말씀인데, 이제까지 베드로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중심해서 역사하시던 성령께서 바울을 통하여 민족과 국가, 모든 문화의 벽을 넘어서서 역사하심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의 역사가 여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디옥교회 라는 불과 세운지 얼마 안 되는 작은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시키는 장면을 기록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선교의 본질이 어떤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선교를 알고 해야 합니다. 열정만 가지고 안 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000년 선교역사에서 바른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이 본문 말씀에서 교과서 삼아야합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우리가 이 말씀에서 무엇을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됩니까
안디옥교회가 선교를 시작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선교의 주체가 성령이심을 보여줍니다. 선교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 곧 성령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어떤 한 인간이 선교의 주체자는 될 수 없습니다.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누가 말씀하신 것입니까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부른 바나바와 사울이다”
“내가 시키는 일을 하기 위하여”
“너희가 따로 세우라”
안디옥 교회는 1절에서 보인대로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사와 선지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를 명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세상에도 사명자들이 많습니다. 사명자라는 말은 명을 받들어서 심부름하는 사람입니다.
심부름을 하는 사람의 종류가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명령을 따른 것인가 하는 것은 사명자에게서 중요합니다.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옛날에는 '급사'라고 했습니다. 학교를 지키는 사람 '소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심부름꾼이라도 나라에서 대통령이 외국에 보낸 사환을 대사라고 합니다. 급사나 소사, 대사가 다 심부름하는 사람이지만 누가 보냈는가, 누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사명자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 선교를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명하신 일이라는 인식을 할 때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자에게는 사명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또 말씀드립니다. 우리 이지순 간사가 선교사로 나가야할 때가 다 되었는데, 선교현장이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선교사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어야할지 모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도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분부하셨습니다.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명하신 선교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선교할 사람을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 사명자는 성령께서 부르신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렘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말씀하신 것 같이, 바울을 부르실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시겠다는 부르심을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복음 전도와 선교는 구원받은 자라면 누구라도 해야할 사명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그 넓은 의미에서 볼 때는 우리가 다 선교자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해야하지만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세움을 입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다 제사장 나라이지만, 특별히 선지자를 부르셨고, 예수님께서 무리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을 양육해서 사도로 보내신 것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제 2차 소명이라는 특별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 때문에 생명을 내어놓고 충성 다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들을 다 부르시지는 않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명령하신 그 선교명령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께서 따로 세워라고 하여서 세우신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많은 교사들과 직분자들이 있지만 그래도 복음을 전할 전임사역자들로 세움을 받는 것은 구별하여 따로 세우신 자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어려움은 목회자가 따로 세움을 받은 자라는 이 인식이 없어진 데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사명감을 가지고 주신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성도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데서 목회의 위기, 교회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이 책임은 성도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자녀들 가운데도 신앙적으로 인격을 갖춘 자녀들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도 헌신하도록 부모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저 같이 실수 많고 허물 많은 사람이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러서 쓰시는데 이러니까 교회 사역에 부작용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가 안되니까 신학교나 보내자는 생각은 이제는 안 할 것입니다. 신학대학교 들어가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만 잘한다고 그 사람이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 선행되어야합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이 소명의 중요성을 더 느낍니다.
우리 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다 복음의 헌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명하신 명령 때문에,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헌신자는 성경을 봐도 남다르게 성경이 봐집니다.
마태복음 28장에 주님이 명하신 가라, 모든 족속에게 가라는 명령이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들리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신 자는 이 명령이 바로 주님께서 자기에게만 명하신 명령으로 급하게 강하게 들려지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지만, 다 꼭 같이 들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고, 복음에 대한 뜨거운 사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성령께서 헌신자, 사명자를 부르시고 세우십니까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왜 오셨습니까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가 사역자들을 세우도록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입니다. 이를 성령께서 주도하시되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또 사명자들을 통해서 이루시는데 이를 위해서 우리들에게 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선교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명하신 대로 성령의 시키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따로 세운 사람이 선교 사명자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선교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뜻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선교는 성령께서 주체자가 됩니다.
선교의 명령은 성령의 명령입니다.
선교사역자는 성령께서 따로 세우신 자입니다.
선교는 성령의 시키시는 일을 하면 됩니다.
이 원리를 선교한다는 교회나 선교사역자나 선교단체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알 것은 선교는 성령이 주체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선교할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교회에게 명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주체자가 되시면 우리 인간 측에서는 아무 일을 하지 않고 기다리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누가 이일을 합니까 교회가 이일을 합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지체들이 이룬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무리입니다.
교회는 단지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교회라고 합니다.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시고, 선교는 교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오늘 선교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선교단체들이 알아야하는 것은 선교는 성령께서 교회에게 명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교단체는 하나의 교회에서 세운 교회와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교회의 선교조력단체가 되어야합니다. 오늘 많은 선교단체들이 교회를 떠나서 단체를 만들면서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시하고,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교단체가 있다고해도 어디까지나 교회와 연합해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선교단체가 세워지는 것은 교회가 마땅히 선교를 해야 하지만 교회는 또한 여러 가지 사명을 감당해야하는데, 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므로 성도들이 자생적으로 선교단체를 세워서 선교를 부르짖고 선교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선교가 더 많습니다. 그 선교단체들이 교회를 섬겨야합니다. 선교단체의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 교회를 섬기면서 해야 바로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많은 선교단체들과 교회가 이 관계를 망각해서 충돌되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도 선교단체들을 이단시 말고, 품어야하고, 선교단체도 교회 안에 있어야합니다. 또 선교의 열매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됩니다. 이 관계가 잘못되면 성령께서 하라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의 연합을 깨므로 결국 선교의 목적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이 선교의 시작이라면 이 선교의 시작도 안디옥 교회라는 교회에게 여호와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다르게 교회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행4:36에 구브로 출신의 레위족이라고 합니다.
니게르라는 시몬- 니게르는 니그로(피부가 검은)이란 말인데 아프리카에서 온 한 개종자입니다.
루기오-구레네에서 온 루기오, 로마권에서 온 사람입니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과 어머니 젖을 함께 먹고 자란 동생으로 높은 권력층의 사람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모였습니다.
교회는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왜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러나 이 교회는 일치를 이루어야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성령께서 명하신 선교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안디옥 교회가 처음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도 진실된 삶을 살아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가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선교를 위해서 세워진 것이 교회이지만, 교회는 궁극적 목적인 선교를 위해서 다양한 일을 또한 해야합니다. 이것이 선교단체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전도하며, 교육하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치우치거나 모자라면 원만한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구제하는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의 사명도 잘 감당합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 우리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 사랑을 가지고. 이것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제단체는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봉사하기 위해서 세워진 곳은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는 구제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구제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나아가 선교했던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교사라고 본문에는 말씀했는데, 이들은 세 가지 일을 교회 안에서 하고, 가르쳤습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첫째로 그들은 선지자와 교사의 직무를 맡았습니다.
선지자는 예언자로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선포하고 그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역할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떤 곳에서든지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선포해야합니다.
말씀을 모르고는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선고사역자들이든지 교회의 평신도 사역자들이든지 말씀을 모르고야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신학을 할 것을 말합니다. 찬양 헌신자가 되겠다고 해도 신학을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겠다고 하면 더욱 정통신학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고야 제 마음대로 하는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한국교회에 큰 교회, 정말 바로 세워진 교회들이 그래도 목회자들이 바로 되어있고, 그분들이 신학을 바로 한 분들임을 감사해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다 알아야합니다.
세상 공부를 하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만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이는 우리 삶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고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주관적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가르치고 해야 합니다. 교회만 왔다갔다 하지 말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가르치고 해야 합니다.
말씀은 운동력이 있습니다. 살아있습니다.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지치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을 때는 지치고,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말씀을 날마다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함으로 생동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주님께 봉사하는 생을 살았습니다.
서로 봉사합니다. 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 극장식 예배입니다. 신앙은 열심히 교회 나와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면 신앙이 생깁니다. 얌체처럼 싹 먹고, 싹가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극장 가는 거에요.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고 봉사하십시오. 여기가 내 교회라는 생각을 가질 때에 충성이 있게 됩니다.
손님은 은혜 받지 못합니다. 손님은 설거지 할 것 없습니다. 음식만 먹고 커피도 멋지게 폼 잡고 먹고 그냥 가면 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설거지를 합니다. 그리고는 그릇을 마른 행주로 깨끗이 닦아 넣어 놓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기는 기쁨이 교회를 섬기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애정이 생깁니다. 여기가 내 교회다. 내가 섬길 수 있는 교회다. 충성할 수 있는 교회를 가지고 있음을 행복해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말씀이 있었고, 봉사가 있었고, 기도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피나는 투쟁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의 현장입니다. 어떻게 성경을 읽지 않고, 금식도 해보지 않고, 산 기도도 한 번 해보지 아니하고, 밤새서 기도도 한번 해보지 아니하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그런 헌신과 투쟁이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봉사, 간절한 기도, 그것이 지나치면 금식하지 않습니까
금식은 심심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정말 밥을 먹을 수가 없고,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이 교회는 선교사를 내어놓았습니다.
선교는 성령께서 준비하시고 예비하신 사람들을 통해서 하시는데 이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음성대로 그 교회의 가장 유력한 일군인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에 내어놓았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자기 교회만을 생각한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영광교회에 등록되었으면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이사를 해도 교회 중심으로, 학교를 진학해도 교회 중심으로 결혼을 해도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무조건 서울로 지방으로 보내는 것은 생각해봐야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귀한 일에 헌신하기를 작정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교회를 다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로 축복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헌신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입니다. 헌신을 하면 우선순위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과연 누구에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제일 불쌍한 사람은 헌신할 곳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되는대로 사는 사람, 좋은 형편 따라 사는 사람, 좋은 조건 주면 따라 다니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헌신해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헌신자를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결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헌신하면 마음이 결정이 됩니다. 헌신하면 이곳에 갈까 저곳에 갈까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헌신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헌신했습니다. 베드로도 헌신한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세상이 나를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성령의 명하신 선교하는 주님의영광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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