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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하나님의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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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선교(宣敎)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쓰이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선교라는 말 대신 전도(傳導)라는 말을 썼습니다. 영어로 하면 선교는 "mission" 이라고 하고, 전도는 "evangelization" 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한다면, 선교는 "보냄"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미시오(missio)"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다시 이 말은 "보낸다"라는 뜻을 가진 "미테레(mittere)" 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영어에서 미션이라는 말을 사명(使命)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씁니다. "미셔나리(missionary)"라고 하면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선교사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전도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euangelion)"이라는 희랍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밴젤리스트(evangelist)"라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거부터 사용해 온 전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흔히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기독교로 개종(改宗)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반면에 선교라는 말은 주로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선교사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1952년 빌링엔(Willingen)에서 열린 국제 선교사 대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은 과거부터 써온 전도나 선교라는 말과 개념을 구별하기 위해서 만들어 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면 영어로 "미션 오브 갓(mission of God)" 이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 라고 한 것을 보면 그런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집니다. 선교를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선교비를 많이 책정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하면 그 교회가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교회가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하여 선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의 핵심은 이 세상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불붙는 소원을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선교의 도구로 교회를 사용하시고, 사람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도구가 무엇입니까 톱, 대패, 끌, 망치, 붓, 연필 같은 연장들입니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작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작가의 주된 관심은 자기가 만드는 작품에 있지 연장에 있지 않습니다. 작가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연장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뜬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 이 말씀처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교만하지 않습니다. 거만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대하는 것처럼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낮은 선교 현지에 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만해지려고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왔고, 내가 먼저 믿은 예수를 전해주려고 왔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티를 내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도구인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크게 4가지입니다.
 첫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17절). 이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나 알기 쉽고, 너무나 분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분입니다. 요3:16 이 사실을 모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바울은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에베소 교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 이런 말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했습니다(18절).
영어 성경에는 마음의 눈을 "eyes of heart"라고 했습니다. 그냥 눈이 아니고 마음의 눈입니다. 그냥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상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들은 우리의 육신의 눈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떠야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깨달아집니다.
 셋째로,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19절).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20),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21),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능력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넷째로, 바울은 교회생활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22-23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교회의 일원(1員)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교회 마당에 세워졌던 그리스도 상이 부서졌답니다. 흉측하게 팔이 부러져 나갔습니다. 교회에게는 이 일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보기에 흉하니까 아예 새로 만들어 세우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하면 돈이 많이 드니까 보수(補修)를 하자는 사람도 있고 해서 쉽게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교회에서 어떻게 이 일을 처리했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상을 팔이 부러진 채로 두기로 했답니다. 그 대신 상 밑에 이런 말을 붙이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당신의 손을 쓰시기를 원하신다. "
오늘 에베소서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짧게 오늘 말씀을 요약한다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눈이 뜨여지기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1952년의 빌링겐 대회에서 선교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定義)를 내렸습니다. "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즉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을 보내심 곧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운동의 원천은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 다시 말하면 선교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깨닫고, 그 계획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제 잠자던 때는 지났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던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떠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만큼 살았으면 충분합니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할 때입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노인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걸 젊었을 때 다녀올걸 그랬어. 이제 은퇴가 내일 모레인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제 힘이 달려서 긴 여행은 못해. 젊어서 다녀와!"
그렇습니다. 어찌 성지 순례만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때가 없다고 하지만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은퇴하고 난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뭔가 아쉽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뭔가 우리의 인생이 후회스럽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제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드리겠습니다. 힘이 넘치고, 의욕이 넘치고, 꿈이 있는 이 때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일찍이 눈을 뜬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1806년에 윌리암스 대학(Williams College)에서 비를 피해 건초더미 속에 들어갔다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로 작정했던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를 중심으로 한 네 명의 대학생들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사실을 아십니까 이것이 유명한 건초더미 운동(Haystack Movement)입니다. 이 운동이 프린스톤 대학으로 번져나가서 프린스톤 해외선교회(P를)로 발전했고, 거기서 유명한 프린스톤 선언이 나왔습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아래 서명한 우리는 기꺼이 자원하여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세계의 어느 곳이든 나아갈 것을 선언한다. " 이 운동은 다시 그 유명한 SVM(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시키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는 슬로건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SVM에서 1970년까지 전 세계 선교사의 70%를 충당했고, 선교 자원의 75%를 충당했습니다.
1885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와 아펠셀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도 이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1883년 커네티컷(Connecticut) 주(州))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전국 신학생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언더우드는 뉴브룬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 대표로, 아펜셀러는 드류(Drew) 신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알버트 울트만스 목사가 말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 삼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나라 문을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가기를 부르고 계십니다. " 그런데 그날, 이상하게도 아무도 헌신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더우드를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언더우드, 왜 너는 안 된다고 하느냐" "저는 인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너는 안 된다고 하느냐" 언더우드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안 된다고 하는가 주님, 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조선으로 가겠습니다. "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습니다.
선교 신학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를 함으로써 존재한다(A church exists by mission, as fire exists by burning. ).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사람을 담은 棺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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