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전도] 당신을 위한 선교

본문

이번에 캄보디아 단기선교를 다녀온 사람들은 조인호 집사님 외(外) 여섯(6) 사람의 청년들이었습니다. 1인당 소요되는 공식비용이 130만원인데 본인들이 80만원을 부담하고 교회에서 50만원을 지원했어요. 헌금에 동참해주신 성도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팀 리더로 가신 조인호 집사님한테는 단돈 50원도 도와드리지 못했습니다. 직장생활 하신 분들이 1년 휴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여러분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 휴가를 국내외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일이 많이 번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자기 휴가를 드리고 또 자기 돈 들여가면서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Tent maker라고 그러지요. 사도 바울이 텐트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던 사람이지요. 아마도 선교사역을 위해서 텐트 제조기술을 배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초대교회의 상황이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한 시스템(System)이 잘 준비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제반 여건은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떠났습니다. 복음을 들어야할 사람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선교비용은 자신이 텐트(Tent)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충당했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생활비를 해결한 선교사를 Tentmaker 라고 부른 효시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바울의 열정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바울은 이와 같은 주님의 준엄한 지상명령을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바울에게만 주셨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신학자(神學者)나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선교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선교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넘쳤던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위해서 떠나는 바울에게 이미 몇 차례 선교헌금을 보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그 사실을 바울사도께서 증언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外)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에게 선교헌금을 보낸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칭찬합니다. 14절에 보면 “너희가 내 괴로움에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그랬지요
그렇습니다. 복음전도자들의 인간적인 괴로움에 동참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사도 자신은 자비량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바울이 어떤 형편에 처했습니까 옥에 갇혀 있지요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옥에 갇혀 있으면서야 어떻게 자비량 선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슬픈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긴급히 선교헌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전달을 했어요.
빌립보 교인들은 헌금만 보낸 것이 아니었어요. 에바브로디도라는 잘 훈련된 청년을 자신들을 대신해서 바울에게 보냈어요. 아마도 에바브로디도는 자신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신실한 영적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빌2:26에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한다고 그랬거든요.
자신들이 아끼고 존경하는 사역자를 선교를 위해 기꺼이 내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아무쪼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해져야 한다는 열정이 복음을 받은 시초부터 넘쳤을 것입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울사도 자신 아닙니까 바울사도께서 정들었던 에베소교회를 떠날 때 바울의 신변을 걱정하여 떠나지 말라고 눈물로 붙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主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행21:31)
바울은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그의 가는 길을 막을 사람도 없고, 막을 환경도 없습니다. 그의 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主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울 혼자서 이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이 길을 함께 걸었지요. 지금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바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함께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년에 우리교회는 성도 300여 가정이 선교헌금에 동참했는데 월 평균 570만원 정도의 헌금이 드려졌고 월 평균 580만원 정도가 선교헌금으로 지출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본 재정에서 보조가 됐지요. 그런데 금년 1월 말 현재 선교헌금 작정자는 240여 가정입니다. 작정액은 약 490만원입니다. 작년보다 작정자는 60여 가정 줄었고 헌금은 80만원 줄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현장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 우리가 이미 지원했던 선교사님들에게 우리 형편을 이유로 선교비를 중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신실한 선교사님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동역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선교명령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지금 마음의 문을 열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나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가지 못하면 보내는 선교사는 돼야 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갈비탕만 먹어도 10,000원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선교비를 작정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선교봉투를 보시면서 기뻐하실 만하게 선교비를 새롭게 작정하십시다. 모든 성도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참여하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우리교회 등록이 안 된 성도들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선교헌금은 100% 직접 선교비로 사용됩니다. 예컨대 목사가 선교 현지를 방문해도 비용을 선교비에서 지출하지 않고 본 재정에서 지출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主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동참하시길 축원합니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지원 받은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기뻐했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10절에 보면 “내가 主안에서 크게 기뻐함은”그러셨지요 돈이 궁핍할 때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돈이 생겼다. 얼마나 기쁩니까 저는 30년 전에 저희 형님한테서 3만 원짜리 우편환을 받고서 작은 방에서 둥실 둥실 춤을 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키는 능력입니까 오죽했으면 바울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惡)의 뿌리라고 하셨겠습니까(딤전 6:10) 확실히 돈의 힘은 강합니다. 돈의 마력으로부터 자유(自由)한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고지를 향해 달음질할 뿐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특별헌금을 받은 사도바울이 돈의 매력 때문에 기뻐하셨겠습니까 사도 역시 별 수 없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까요 폐일언(蔽1言)하고 바울 사도 자신의 증언을 들어보십시다. 11절입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모든 일에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회피하고 싶은 궁핍도 그에게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습니다. 고후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복음 때문에 그가 감당해야 했던 괴로운 일들이 회고되어 있지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사도바울! 과연 위대한 선교사요. 위대한 목회자입니다. 이런 분이 돈 몇 푼 받고, 돈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셨겠어요 그의 기쁨의 이유는 분명히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궁핍이라는 것도 그렇게 두렵지 않았어요 궁핍을 이기는 비결로 主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족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거든요. 그런가 하면 그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그랬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나는 골프도 칠 줄 알고 일류호텔 레스토랑에서 음식 먹는 매너도 알고 고급 사교클럽에서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능력이 있다 그런 뜻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이야기는 사도 바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본래부터 비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었지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매우 부자 집 출신입니다. 그런가하면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지요. 명문학교 출신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안 후 바울은 자신의 의(義)를 자랑하지 않았지요.
사람이 가난하면서 당당하게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부이지만 겸손히 살기는 더 어려워요. 그래서 잠30:8-9에도 이런 소망을 말하잖아요.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아굴의 기도가 평균적인 인생입니다. 너무도 우리의 가슴에 가까이 와 닿는 진솔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릅니다. 아굴의 삶보다 한 단계 높습니다. 그는 궁핍 속에서도 결코 넘어지거나 낙심치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풍부 속에서도 결코 교만치 않았어요. 정도(正道)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궁핍 속에서 좌절하지 않는 것도 어렵지만 풍부 속에서 교만치 않는 것은 어쩌면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바울은 두 가지 인생과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능히 극복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告白)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 충만한 사람들이 누리는 영적 특권입니다.
환경은 사람의 인격(人格)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인생이 꾸밈없는 유혹을 이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적 유혹이든지... , 외부의 유혹이든지 인간의 능력으로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바울 사도는 환경의 도전이나 유혹으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꼭 사도에게만 주신 은혜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이 거룩하고 복된 은혜를 사모하고 사모하십시다.
저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성도 여러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실는지.. , 그렇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불행이 불현듯 다가들지... ,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비극이라도 경험하지 않으면 좋겠고 또 그렇게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만 하면 만사가 잘 되고, 건강하게 되고, 만수무강 한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온전히 가르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고 오묘한 인생의 지평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할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은혜는 사도 바울이 체험한 그 은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으로서는 불가능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이와 같은 거룩한 은총이 성도님들의 영혼 속에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의 기쁨이 자신에게 주어진 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사도의 기쁨! 그 근원은 무엇일까요 17절에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그렇습니다. 선교에 동참하는 결과는 분명합니다. 그 결과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증하십니다. 오직 너희에게 유익함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결국 선교에 동참한 사람 자신의 유익입니다. 바울 사도는 선교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받을 복을 생각하면서 기뻐했습니다. 19절은 더욱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시지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기쁜 마음이지만... , 순종하는 마음이지만 성심을 다해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내 창고에서 재물이 새어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내가 선교에 동참하기 때문에 내 창고가 좀 비우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선교에 동참을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모든 헌금의 정신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창고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여기서 비겁하게 말씀의 핵심을 피해갈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쓴 재물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더욱 풍성하게 보상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드린 선교헌금은 사람들하고 사귀기 위해 사용되는 친교비하고 다릅니다. 18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드리는 월정헌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받으신 향기로운 재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물론 우리가 놀부 심령으로 상 받기 위해 선교해서야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반대로 놀부 심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명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親)히 약속하신 상급에 대해 아무런 기대감을 갖지 않는 것도 역시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한 일을 했는데 그 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상급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찌하든지 기회 있는 대로 베풀면서 살아가십시다. 여러분들이 친히 베푸는 일도 열심히 행하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피 흘려 세우신 교회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기독교 2000년 역사의 가장 큰 손실이요,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만큼” 줄기차게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행한 기관은 이 세상에 단연코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교회를 늘 새롭게 하십니다. 교회를 신뢰하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다. 성도들의 봉사와 헌신의 중심(中心)이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마땅하신 섭리입니다.
다윗왕의 간증으로 오늘 설교의결론을 삼겠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의인은(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시37:25-26)
교회를 통한 선교와 구제는 도외시하고 자신이 선교와 구제의 주체가 되다가 스스로 자기 의(義)에 빠질까 두려워하십시오. 교회가 선교한국의 꿈을 기필코 성취하도록 함께 헌신하십시다.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향기로운 제물을 힘써 드리십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영광 가운데서 그 풍성한 대로 성도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