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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금메달을 가슴에 차는 신자

본문

신학이 바른 방향을 보여주고 설교가 진리를 바로 선포할 수 있지만
진리에 순종하는 삶이 뒤따를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열매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로마서 6-8장은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금메달 받는 신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으시는 가운데 거룩한 삶의 금맥을 찾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경계합니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합니다.
그 결과!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웰빙시대가 되었습니다. 좀더 건강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힘을 기울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 때문에 죽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있지 않도록 절제하는 삶을 권장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절식과 소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식(小食)과 절식(節食)이 더 신앙적인 이유"
오늘처럼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한 현실이 아닌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소식(小食) 혹은 절식(節食)이 건강을 이유로도 강조되고 있지만, 교회 전통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즉 교회 전통에서 볼 때 무엇을 먹으며, 얼마나 먹을 것인가 하는 음식물(飮食物)은 영적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폭식(暴食)이나 탐식(貪食)은 향락과 사치의 상징으로 이해됐다면, 소식이나 절식은 경건한 종교적 덕목으로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수도원 전통에서 음식의 문제는 심각하게 취급되었다. 수도원은 세상과 분리된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여겼는데, 은둔생활과 자기부정적인 금욕적 삶을 통해 거룩함과 경건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흔히 수도운동의 시원자로 알려진 이집트의 안토니우스(Anthonius, 250-356)는 부자청년에 관한 기록(막10:17-27), 곧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는 말씀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처분하고 은둔자의 길을 갔다.
특히 그는 소량의 음식물을 소금과 함께 먹었고, 음료수는 물만 마셨는데, 이런 자기 부정적 음식관행은 수도원 규칙에서 요구되기도 했다. 그는 극도의 자기 부정적인 삶을 살았으나 105세까지 살았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된 금욕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지만 세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는 독신주의였고, 둘째는 세속적인 행복의 포기였으며, 그리고 셋째가 절제와 절식이었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있는 동안에 악령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정도의 소식이 권장되었고, 음식 중에서도 육식의 거부가 두드러졌다.
서방에서 수도원제도의 원형이 되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부터 공통적으로 강조됐던 수도원 정신은 순결, 복종과 함께 청빈이었는데, 소식이나 절식은 그것이 얼마나 성실하게 실행되었는가 하는 점과 관계없이 언제나 수도사의 영적 덕목으로 요구되었다. 11세기에 시작된 시토수도회(Cistercians)는 이전의 느슨한 수도생활을 개혁한다는 취지에서 보다 엄격한 금욕을 강조했는데, 연중 일정기간에는 한 끼의 식사만 하게 했고, 그 외의 기간에는 하루 두 끼만 먹었다. 그나마도 일체의 고기, 생선, 달걀, 버터 등은 금했다. 보잘 것 없는 식생활에도 불구하고 혹심한 육체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마가렛 딘슬리, 중세교회사, 148. ).
이런 금욕주의는 특히 13세기에 일어난 탁발 수도회(the Mendicant order)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탁발’이라고 하면 불교 승려들과 같은 ‘머리 깎음’을 생각하기 싶지만 여기서 말하는 ‘탁발’(托鉢)이란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뜻인데, 이 말은 형제(broder)란 뜻의 라틴어 쁘라테르(Frater)에서 유래하였다. 이들은 절대적 빈곤을 지키기 위해 음식마저도 구걸의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특히 프란체스코수도회의 창시자인 프란체스코(Francesco)는 “헐벗은 그리스도를 헐벗은 채로 따르기 위하여”(to follow naked the naked christ) 모든 재산을 스스로 포기하고 소위 ‘자의적 빈곤’의 길을 갔다. 그는 소식이나 절식 정도가 아니라 금욕과 금식을 일상화하여 44세의 나이로 죽었다.
중세 천주교 전통에서 강조되어 왔던 소식이나 절식은 천주교의 대죄(大罪)의 개념에도 반영되어 있다. 천주교는 죄를 대죄와 소죄(小罪)로 구분하는데, 대죄(Mortal sin)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의미한다. 이 죄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범죄로 간주되는데, 이것은 영혼을 죽이는데 치명적이며,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기 때문에 대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에 소죄란 여호와 하나님인 이웃에 대해 행해진 작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를 의미하는데, 죄책이 가볍고, 기도, 선행, 병자성사, 연옥들에서 속함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대죄란, 교만(pride), 탐욕(covetousness), 호색(lust), 분노(anger), 시기(envy), 나태(sloth), 그리고 탐식(gluttony) 등 7가지를 말하는데, 탐식은 커다란 죄악으로 규정되었다.
이 시기 금욕적 요구에서 소식이나 절식이 강조되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진지하게 실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는 탁발수도승들 조차도 음란과 폭식과 과식으로 그 시대의 부패를 가중시켰다는 기록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이런 탐식이나 과식은 불경건의 모형이었다. 이 점을 시사해 주는 대표적인 한 사람이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6, 1492-1503)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몇 사람의 정부와 3남 1녀의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이후에 7명의 자녀를 더 얻었다. 그의 음란한 생활과 함께 폭식과 폭주로 악명을 더 했다. 그는 일단 연찬(宴饌)을 시작하면 녹초가 되기까지 먹고 마시고 즐겼음으로 역사가들은 그의 ‘살인적 파티’(lethal dinner parties)를 유명한 일화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불경건하고 방종한 교황이었던 셈이다.
소식(小食)을 강조한 것은 천주교적 금욕주의 전통만이 아니다. 12세기 발도파 또한 소식과 절식을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강조했다. 리용의 상인이었던 발도(Peter Waldo)는 어느 유랑 시인의 노래를 듣고 청빈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거지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앙집단이 발도파(the Waldenses)인데, 이들은 나를 따르려거든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랐다.
이들은 구걸하며 사는 소식주의를 경건한 삶의 방식으로 주장했다. 탐식을 멀리하고 소식을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강조한 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로 불리는 존 후스(John Huss)나 위클리프(Wycliffe)도 동일했다. 루터에게도 이런 점이 나타난다. 루터가 중세신학을 거부하고 중세 수도원주의를 비판했다고 해서 소식과 절식 등 거룩한 청빈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금욕주의적 관행을 거부한 것이었다.
17세기 청교도들은 영국교회(성공회, Church of England)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천주교적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싸웠던 이들이지만 소식이 갖는 영적 의미를 강조한 집단이기도 하다. 이들 청교도들은 다는 날보다 특히 주의 날에는 금식이나 소식을 권장했다. 이들이 대식을 피하고 소식을 권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였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예배시간에 졸음이 오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청교도들의 신앙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가 전해준 말처럼, 그 동기야 어떠하든 탐식이나 대식보다는 소식과 절식은 육체의 소욕을 절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덜 이기적이며 더 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경계할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러나 한(恨)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이 옳고 좋은 것을 알지만 온전히 지키며 살지 못한 일입니다.
아담 이래 죄아래 있는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그 결과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옳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온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미덕처럼 우러러 보지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을 적당히 취하며 자족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물질에 매여 헉헉거리는 사람을 옳다고 박수치지 않습니다.
 사망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경계할 일입니다.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6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이 진리를 오늘 말씀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주 비인격적이고 못된 남편이 있습니다.
그 남편으로 인하여 아내는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언제까지나 살지는 않습니다.
아내 곁을 떠나는 날이 옵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그 때, 아내는 더 이상 남편에 매이지는 않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더 이상 남편에게 매이지 않은 것처럼,
육신이 죽으면 율법은 더 이상 역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대하여 죽고 영에 대하여 산 존재들입니다.
1 그리스도의 사람은 얽매었던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율법은 소중한 여호와 하나님의 법입니다.
율법을 통해 나의 현재 위치를 알고,
율법을 통해 우리 인생이 나아가야할 목표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율법을 존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능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10조도 잘했습니다.
일 주일에 두번씩 금식도 했습니다.
절기를 잘 지켰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전생애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율법을 넘어갑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육신에 속하여 율법 아래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죄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육신에 있는 동안 죄인으로 율법의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옛사람 그대로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얽매었던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존재가 바뀌었어요.
성도가 받은 가장 귀한 복은 존재의 변화입니다.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
삭개오가 육신에 있는 동안 죄인으로 율법의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만 다섯 번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가서 귀한 선교사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1/10조를 하느냐고 묻는 것이 참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10/10을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이영애 자매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집사도 해보지 못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인 남편과 함께 그곳에 와서 10/10을 드려 헌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편은 미국에서 잘나가던 직업을 뒤로하고 그곳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충성합니다.
이영애 자매님은 동족에게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실어나르는 동족을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귀한 나귀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샬롬입니다 !
이곳에서 사장님을 만나서 귀한 시간 시간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사장님의 인자한 웃음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일동안 함께한 시간들이
저에게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들어가서 그쪽 사람들에게
한달에 한번씩 주는 식량을 나누어 주면서도 행복했고 그곳에서 일할 수 있어서 행복했고
비도 눈도 오지 않아서 행복했읍니다 박스들을 옮기면서는 사장님과 장노님 생각을
했읍니다 ㅎㅎㅎ 참으로 저에게는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읍니다
사장님 언제나 저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없으나 그때까지 건강 하시고
행복하세요 !!!!!! 저는 오늘도 내안에 계신 그분과 함께 행복하게 뛰겠읍니다 ㅎㅎㅎㅎㅎㅎ
그의 가진 전부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사는 자매입니다.
선교사라 부를 자격이 없다고, 그러한 명칭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이 자매님이 이렇게 헌신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동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전부를 주는 것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100%를 줄 수 있는 것이 계명의 완성입니다.
1/10을 바치는 것도 귀하지만 그것은 계명의 1/10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랑하기에 전부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할 때, 육체에 속하였던 우리 옛 사람은 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3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십니다.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수가성 여인이 육신에 있는 동안 죄인으로 율법의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셨습니다.
지난 여행에서 만난 어떤 부부의 아름다운 사역이 눈에 남습니다.
이 젊은 부부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의 목표를 동족 돕는 일에 맞추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들어가서 대학을 마쳤습니다.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떤 일에 삶을 드렸습니까
동족을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주려 죽어가는 동족을 찾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귀가 되어 북한 가장 힘든 마을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등에 실어준 곡물들을 풀어줍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동족 가운데서 만나 홍 장로님의 헌신도 마음에 남습니다.
칠순이 다된 분이신데, 홀로 그곳에 찾아가셔서 고아원 원아들을 섬기고 계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 안에서 과실을 맺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의 목적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이런 주님의 중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요한복음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옛사람에 속한 헛된 것들을 허물어버리고, 그리스도께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복된 열매를 맺으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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