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허공을 치지 않는 선교
본문
저희 교회에서는 매년 5월 마지막 주일을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선생의 회심을 기념하여 해외선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무슨 일, 또는 기념 주일이나 절기는 그 일이 닥쳐서, 또는 그 절기가 되어서 한 번 지키는 것으로, 일과성(1過性)으로 끝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준비, 실시, 후속 정리를 잘해야합니다. 웨슬리 선생의 회심에 대해서는 그 동안 금요합심기도회, 새벽기도회, 지난 주일 낮 예배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용인서지방 연합집회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감합니다.
웨슬리 선생의 회심과 해외 선교를 연결할 때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도 바울에서 웨슬리 선생으로 연결되는 선교적 열정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확장해야합니다.
둘째,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셋째, 우리는 허공을 치지 않는 선교를 해야합니다.
이 세 가지 교훈에 대해 차례로 같이 살펴봅니다. 불가피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많아지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 받으세요" 하는 설교에는 "아멘!"하지만 "무엇하세요"하는 설교에는 침묵 내지 "노멘!"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선교 많이 하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들은 선교사 많이 내 보낸 나라들입니다.
첫째, 우리는 사도 바울에서 웨슬리로 연결되는 선교적 열정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여러 가지 호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학자였습니다. 신학자로서 바울의 업적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한 때 신학자들 사이에서 "예수의 신앙이냐 바울의 신학이냐" 이것이 중요한 질문으로 등장했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 밖에 많은 교회들을 개척 설립하고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성공한 목회자이고 바울은 실패한 목회자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한 번 설교에 수천 명씩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켰는데 바울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목회를 그런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라고 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성도들을 훈계하는 것, 이것이 목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는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더냐"(고후 11:28-29)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은 목회자 가운데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은 문필가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는데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고후 10:10).
그러나 바울은 무엇보다도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를 뺀 바울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 죄수로 호송되면서 전도하던 일을 포함하면 네 번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맞고 죽을 뻔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고후 11:23-27). 만일 바울이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안에 머물고 말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천 년 동안에 수많은 신앙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을, 특히 전도자로서 사도 바울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독교 역사 이천 년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아사시의 성자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거스틴일까요 루터일까요 칼빈일까요 존 낙스일까요 칼 바르트일까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남긴 기록들, 그리고 웨슬리 선생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집니다. 웨슬리 선생도 신학자, 목회자, 문필가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대표하는 것은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웨슬리 선생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밖에 붙어 있는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 포스터에 말을 타고 있는 웨슬리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배지에도 그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웨슬리는 마상(馬上)의 전도인이었습니다. 책도 말 위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이번 5월에 웨슬리 선생에 관한 책을 세 권을 읽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문득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적 정열을 가장 비슷하게 이어 받은 분이 웨슬리로구나!"
웨슬리 선생은 일 년에 4,5천마일 씩, 2년에 한 번씩 영국과 아일랜드 전체를 여행하며 전도했습니다. 평생 약 25만 마일을 전도여행을 했고 4만 회의 설교를 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예순세 살이었을 때 던컨 라이트(Duncan Wright)라는 서른 살의 젊은이가 웨슬리 선생을 도와 전도하겠다고 나섰다가 중단한 일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고, 특별히 전도하기 위해 어디 같이 가다가 모래 속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고는 "나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와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 26절과 27절에서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남긴 방대한 일기를 요약하고 압축하면 바울 선생이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실제로 1745년 2월 25일에는 눈이 덮인 채 길이 없는 황무지 같은 곳을 이백 리나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는 이전에 어려운 여행을 많이 해 보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처음이다. 나는 바람, 우박, 비 얼음, 눈, 그리고 세차게 뿌리는 진눈깨비와 파고드는 추위 사이를 뚫고 다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 5시에 스트라우드라는 곳에서 설교하고 홍수로 잠긴 길을 걸어서 위체스타라는 곳에 도착해서 오후 6시에 마차 역에서 설교했는데 교양 없는 군중들로부터 욕설과 모욕을 겪었습니다.
어떤 때는 늪이 여럿 있는 길을 가는데 첫 번째 늪과 두 번째 늪은 잘 지났지만 세 번째 늪에서 조난을 당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구조 받아 그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고 늪지대를 건넌 일도 있었습니다.
1750년 6월 14일에는 새벽 5시 반부터 밤 11시 15분까지 쉴 틈도 없이 말을 탔고 그 다음날 낮 11시에 다시 말을 타고 길을 떠났는데 말이 지쳐서 중간에서 다른 말을 빌어서 탔다고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 여행한 것이 65마일, 250리입니다.
웨슬리 선생의 일기는 이런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역사에서 전도자 바울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라는 말에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바울, 웨슬리로 이어지는 선교적 열정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 이어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 웨슬리안, 웨슬리의 후예들, 감리교인들입니다.
잘 이어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전도의 전통을 잘 이어 받아야 합니다. 잘 살려야합니다. 확대해 나가야합니다.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웨슬리 선생은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희 교회가 웨슬리 선생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을 해외선교주일로 지키는 것은 이 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와서 묻습니다. "목사님, 웨슬리 선생님은 회심한 다음에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말씀했는데 실제로는 영국 밖을 나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선교사로 일한 일이 있는데 회심한 후에는 영국 안의 전도에 주력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모순처럼 느껴지는데 왜 그랬을까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이 말은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도하겠다.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겠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여러 차원 위의 뜻을 안고 있는 말입니다.
이 신학생의 말처럼 웨슬리 선생은 젊은 시절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가서 선교한 일이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이 시작된 후에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콕이라는 분을 미국에 선교사로 보낸 일이 있으나 웨슬리 선생 자신이 영국을 벗어난 일은 없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활동하던 18세기 중반에는 교회는 해외 선교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해외 선교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웨슬리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윌리암 캐리(William Carry)라는 분이 인도선교를 시작한 것을 출발점으로 19세기부터 해외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한 것은 "나는 선교를 하는데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이런 뜻입니다. "아무 것도 나의 선교를 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 당시 교회는 교구 제도를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를 영어로는 "The World is my Parish"라고 하는데 "Parish"라는 말이 바로 교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교구에 있는 교회에 나가야했습니다. 목사님들도 자기 교구 안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엡워드라는 교구를 담당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엡워드에서 태어났지요. 이것을 기념해서 감리교 청년회는 한동안 "엡워드 청년회"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지금은 MYF(감리교 청년 친교회)라고 합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연세가 많아지자 존 웨슬리에게 자기 교구를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 선생은 "저는 엡워드에 있는 것보다 옥스퍼드에서 일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나타내리라고 믿습니다. 냇물의 한 줄기를 달게 하는 것보다 냇물의 근원을 달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양했습니다. 아버지는 강력하게 "교회의 직제는 네가 발버둥칠수록 더 강하게 너를 묶을 것이다" 말하면서 교구를 이어 받으라고 했지만 웨슬리는 계속해서 사양했습니다.
만일에 웨슬리 선생이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해서 엡워드 교구의 담임목사가 되었다면 웨슬리 선생은 평범한 교구목사에 그쳤을 것이고 감리교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웨슬리 선생이 회심한 다음에 여기 저기 가리지 않고 다니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 교구를 맡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들은 웨슬리 선생을 비난하고 설교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임스 허비(James Hervey)라는 분이 당신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하자 웨슬리 선생은 자기의 입장을 밝히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중요한 부분을 오늘 주보의 목사 칼럼에 옮겨 두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먼저 나는 성경이 말한 것 외에는 다른 법칙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명령하고 있지요.
웨슬리 선생은 이어서 "지금 나는 교구가 없고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물었습니다.
또 "내가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을 따라야합니까" 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말을 인용합니다. "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이어서 엄숙하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간주합니다"
웨슬리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말은 내가 존재하는 어느 지역에서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타당하고 정당하며 내가 맡은 의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나를 부르셨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축복이 그 일과 함께 함을 나는 확신합니다. "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이 말에는 "나는 교구에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조직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비난에 개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로지 전도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만 충실하게 따르겠습니다"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압축해서 말하면 "나는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도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제도, 조직, 형편, 이런 것을 극복해야합니다. 전도를 가로막는 제도이면 무시해도 좋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형편이 좋아진 다음에 전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뤄서도 안됩니다. 저희 교회가 지금 그럴 유혹에 빠질 위험이 높습니다.
또한 이제는 세계화 시대가 되었으므로 정말 세계를 교구로 삼고 일해야 합니다. 수지나 수도권이 우리의 교구가 아닙니다. 수지나 수도권은 세계를 교구로 삼고 있는 우리의 홈베이스입니다. 선교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웨슬리 선생이 지금처럼 우주선이 떠다니는 시대에 살았으면 틀림없이 "우주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전도의 시야를 넓히기를 부탁드립니다.
셋째, 허공을 치는 선교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5월 첫 번째 금요합심기도회에서 오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회심 전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회심을 하기 전에는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허공을 치는 것 같은 것이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은 버림을 받는 것 같은 형편이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특별히 웨슬리 선생의 선교활동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은 것이었습니다. 웨슬리 선생 자신이 바로 이 말을 썼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아메리카 대륙에 선교사로 가서 조지아 주 사바나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뒷날 일기에 "나는 사바나에 있는 동안 허공을 치고 있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웨슬리의 아메리카 대륙 선교 활동은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 선생님은 "나는 나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위해 미국으로 갑니다. 이것이 으뜸이 되는 동기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다음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 이전의 웨슬리 선생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가서 인디언들을 가르치면 인디언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수한 신앙을 갖게 되고 교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는 이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는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같이 탄 모라비안 교도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서 아우구스트 고틀리브 스판겐버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라는 분을 만나서 선교계획을 협의했습니다. 스판겐버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는 진젠도르프 백작이 시작한 경건한 종파인데 스판겐버그는 진젠도르프 백작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협의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스판겐버그는 개인적인 문제부터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웨슬리는 "나는 그가 세상의 구세주임을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판겐버그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신 사실을 아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웨슬리 선생은 우물쭈물하면서 "나는 그가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뒤에 이것이 "빈말"이라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 시작한 전도는 그야말로 허공을 치는 선교였습니다. 이런 선교가 성공을 거둘 리가 없습니다. 참담한 실패를 하고 돌아옵니다.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있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개종시킬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약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미국에 건너갔던 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회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독백하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갈등 속에 있다가 회심을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선교는 허공을 치는 선교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목표를 정하고 확신을 가지고 힘있게 하는 선교였습니다. 체험을 전하는 선교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가 허공을 치는 선교가 아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전도, 해외선교, 모두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동기가 되어야합니다. 실적을 쌓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허공을 치는 전도입니다.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 두려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돌아가신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시장에서 머리에 털 나는 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외쳐도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약을 파는 사람의 머리에 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확신이 없는 가운데 하는 선교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해외 선교를 열심히 해 왔습니다. 1988년까지는 그저 5,6백 명 나가 있던 해외선교사들이 이제는 7천 명 가까이 나가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조건 내보던 것을 조금 멈추고 그 동안의 선교가 효과적인 것이었나 살펴야 할 때입니다. "한국 교회의 선교는 선교를 받는 쪽을 위한 선교가 아니라 선교를 하는 쪽을 위한 선교였다"라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선교를 가장 열심히 하면서 욕도 가장 많이 먹는 교회"라는 말도 듣습니다.
이제는 반성하는 분위기가 짙습니다. '양적인 확대가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향상이 문제이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저희 목양교회는 해외선교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재마이카, 미국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계속해서 단기선교 팀을 내보냈습니다. 지금은 러시아 로스토프에 세 개의 교회와 연합신학원을 운영하고 여러 명의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협력하고 있습니다. 선교행정도 비교적 앞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IMF와 성전신축으로 확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일에 어느 청년이 "목사님, 올해는 단기선교 안 가요"물어보더군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그 동안의 선교가 과연 향방을 정확하게 정하고 달린 선교였나, 허공을 치는 선교는 아니었나 돌아보는 것입니다.
올해 해외선교주일은 "선교사 더 많이 내보냅시다" 하는 것보다 "그 동안 효과적인 선교를 했나 동기가 옳은 것이었고 방법이 효과적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보냅시다. 그러면서 더 힘찬 해외선교를 구상하고 비전을 새롭게 하면서 보냅시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 바울에서 웨슬리로 연결되는 선교의 열정이라는 전통을 잘 이어받고 확장하기 바랍니다.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바랍니다.
확신을 가지고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선교, 허공을 치지 않는 선교를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슨 일, 또는 기념 주일이나 절기는 그 일이 닥쳐서, 또는 그 절기가 되어서 한 번 지키는 것으로, 일과성(1過性)으로 끝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준비, 실시, 후속 정리를 잘해야합니다. 웨슬리 선생의 회심에 대해서는 그 동안 금요합심기도회, 새벽기도회, 지난 주일 낮 예배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용인서지방 연합집회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감합니다.
웨슬리 선생의 회심과 해외 선교를 연결할 때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도 바울에서 웨슬리 선생으로 연결되는 선교적 열정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확장해야합니다.
둘째,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셋째, 우리는 허공을 치지 않는 선교를 해야합니다.
이 세 가지 교훈에 대해 차례로 같이 살펴봅니다. 불가피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많아지는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 받으세요" 하는 설교에는 "아멘!"하지만 "무엇하세요"하는 설교에는 침묵 내지 "노멘!"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선교 많이 하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들은 선교사 많이 내 보낸 나라들입니다.
첫째, 우리는 사도 바울에서 웨슬리로 연결되는 선교적 열정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여러 가지 호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신학자였습니다. 신학자로서 바울의 업적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한 때 신학자들 사이에서 "예수의 신앙이냐 바울의 신학이냐" 이것이 중요한 질문으로 등장했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였습니다.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 밖에 많은 교회들을 개척 설립하고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성공한 목회자이고 바울은 실패한 목회자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한 번 설교에 수천 명씩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켰는데 바울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목회를 그런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라고 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성도들을 훈계하는 것, 이것이 목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는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더냐"(고후 11:28-29)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은 목회자 가운데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은 문필가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편지들을 남겼는데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고후 10:10).
그러나 바울은 무엇보다도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를 뺀 바울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 죄수로 호송되면서 전도하던 일을 포함하면 네 번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맞고 죽을 뻔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고후 11:23-27). 만일 바울이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안에 머물고 말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천 년 동안에 수많은 신앙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도 바울을, 특히 전도자로서 사도 바울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기독교 역사 이천 년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아사시의 성자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거스틴일까요 루터일까요 칼빈일까요 존 낙스일까요 칼 바르트일까요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남긴 기록들, 그리고 웨슬리 선생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집니다. 웨슬리 선생도 신학자, 목회자, 문필가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대표하는 것은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웨슬리 선생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밖에 붙어 있는 웨슬리 회심 기념 주일 포스터에 말을 타고 있는 웨슬리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배지에도 그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웨슬리는 마상(馬上)의 전도인이었습니다. 책도 말 위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이번 5월에 웨슬리 선생에 관한 책을 세 권을 읽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문득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적 정열을 가장 비슷하게 이어 받은 분이 웨슬리로구나!"
웨슬리 선생은 일 년에 4,5천마일 씩, 2년에 한 번씩 영국과 아일랜드 전체를 여행하며 전도했습니다. 평생 약 25만 마일을 전도여행을 했고 4만 회의 설교를 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예순세 살이었을 때 던컨 라이트(Duncan Wright)라는 서른 살의 젊은이가 웨슬리 선생을 도와 전도하겠다고 나섰다가 중단한 일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고, 특별히 전도하기 위해 어디 같이 가다가 모래 속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고는 "나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돌아와 버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 26절과 27절에서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남긴 방대한 일기를 요약하고 압축하면 바울 선생이 말한 것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실제로 1745년 2월 25일에는 눈이 덮인 채 길이 없는 황무지 같은 곳을 이백 리나 여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나는 이전에 어려운 여행을 많이 해 보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처음이다. 나는 바람, 우박, 비 얼음, 눈, 그리고 세차게 뿌리는 진눈깨비와 파고드는 추위 사이를 뚫고 다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새벽 5시에 스트라우드라는 곳에서 설교하고 홍수로 잠긴 길을 걸어서 위체스타라는 곳에 도착해서 오후 6시에 마차 역에서 설교했는데 교양 없는 군중들로부터 욕설과 모욕을 겪었습니다.
어떤 때는 늪이 여럿 있는 길을 가는데 첫 번째 늪과 두 번째 늪은 잘 지났지만 세 번째 늪에서 조난을 당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구조 받아 그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고 늪지대를 건넌 일도 있었습니다.
1750년 6월 14일에는 새벽 5시 반부터 밤 11시 15분까지 쉴 틈도 없이 말을 탔고 그 다음날 낮 11시에 다시 말을 타고 길을 떠났는데 말이 지쳐서 중간에서 다른 말을 빌어서 탔다고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 여행한 것이 65마일, 250리입니다.
웨슬리 선생의 일기는 이런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역사에서 전도자 바울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리라는 말에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바울, 웨슬리로 이어지는 선교적 열정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 이어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 웨슬리안, 웨슬리의 후예들, 감리교인들입니다.
잘 이어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 전도의 전통을 잘 이어 받아야 합니다. 잘 살려야합니다. 확대해 나가야합니다.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웨슬리 선생은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희 교회가 웨슬리 선생의 회심을 기념하는 주일을 해외선교주일로 지키는 것은 이 말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와서 묻습니다. "목사님, 웨슬리 선생님은 회심한 다음에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말씀했는데 실제로는 영국 밖을 나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회심하기 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선교사로 일한 일이 있는데 회심한 후에는 영국 안의 전도에 주력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모순처럼 느껴지는데 왜 그랬을까요"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이 말은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도하겠다.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겠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여러 차원 위의 뜻을 안고 있는 말입니다.
이 신학생의 말처럼 웨슬리 선생은 젊은 시절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가서 선교한 일이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이 시작된 후에 프랜시스 애즈베리와 콕이라는 분을 미국에 선교사로 보낸 일이 있으나 웨슬리 선생 자신이 영국을 벗어난 일은 없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활동하던 18세기 중반에는 교회는 해외 선교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해외 선교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웨슬리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윌리암 캐리(William Carry)라는 분이 인도선교를 시작한 것을 출발점으로 19세기부터 해외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한 것은 "나는 선교를 하는데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이런 뜻입니다. "아무 것도 나의 선교를 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런 뜻입니다.
그 당시 교회는 교구 제도를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를 영어로는 "The World is my Parish"라고 하는데 "Parish"라는 말이 바로 교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교구에 있는 교회에 나가야했습니다. 목사님들도 자기 교구 안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엡워드라는 교구를 담당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엡워드에서 태어났지요. 이것을 기념해서 감리교 청년회는 한동안 "엡워드 청년회"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지금은 MYF(감리교 청년 친교회)라고 합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연세가 많아지자 존 웨슬리에게 자기 교구를 맡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 선생은 "저는 엡워드에 있는 것보다 옥스퍼드에서 일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나타내리라고 믿습니다. 냇물의 한 줄기를 달게 하는 것보다 냇물의 근원을 달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사양했습니다. 아버지는 강력하게 "교회의 직제는 네가 발버둥칠수록 더 강하게 너를 묶을 것이다" 말하면서 교구를 이어 받으라고 했지만 웨슬리는 계속해서 사양했습니다.
만일에 웨슬리 선생이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해서 엡워드 교구의 담임목사가 되었다면 웨슬리 선생은 평범한 교구목사에 그쳤을 것이고 감리교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웨슬리 선생이 회심한 다음에 여기 저기 가리지 않고 다니면서 전도를 합니다. 그 교구를 맡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들은 웨슬리 선생을 비난하고 설교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임스 허비(James Hervey)라는 분이 당신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하자 웨슬리 선생은 자기의 입장을 밝히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중요한 부분을 오늘 주보의 목사 칼럼에 옮겨 두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먼저 나는 성경이 말한 것 외에는 다른 법칙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명령하고 있지요.
웨슬리 선생은 이어서 "지금 나는 교구가 없고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물었습니다.
또 "내가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을 따라야합니까" 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말을 인용합니다. "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이어서 엄숙하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간주합니다"
웨슬리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말은 내가 존재하는 어느 지역에서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타당하고 정당하며 내가 맡은 의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나를 부르셨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축복이 그 일과 함께 함을 나는 확신합니다. "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 이 말에는 "나는 교구에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조직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비난에 개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오로지 전도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만 충실하게 따르겠습니다"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압축해서 말하면 "나는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도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제도, 조직, 형편, 이런 것을 극복해야합니다. 전도를 가로막는 제도이면 무시해도 좋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형편이 좋아진 다음에 전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뒤로 미뤄서도 안됩니다. 저희 교회가 지금 그럴 유혹에 빠질 위험이 높습니다.
또한 이제는 세계화 시대가 되었으므로 정말 세계를 교구로 삼고 일해야 합니다. 수지나 수도권이 우리의 교구가 아닙니다. 수지나 수도권은 세계를 교구로 삼고 있는 우리의 홈베이스입니다. 선교의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웨슬리 선생이 지금처럼 우주선이 떠다니는 시대에 살았으면 틀림없이 "우주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전도의 시야를 넓히기를 부탁드립니다.
셋째, 허공을 치는 선교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5월 첫 번째 금요합심기도회에서 오늘의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회심 전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웨슬리 선생이 회심을 하기 전에는 열심히 일하기는 했지만 허공을 치는 것 같은 것이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은 버림을 받는 것 같은 형편이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특별히 웨슬리 선생의 선교활동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은 것이었습니다. 웨슬리 선생 자신이 바로 이 말을 썼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아메리카 대륙에 선교사로 가서 조지아 주 사바나라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뒷날 일기에 "나는 사바나에 있는 동안 허공을 치고 있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웨슬리의 아메리카 대륙 선교 활동은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 선생님은 "나는 나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위해 미국으로 갑니다. 이것이 으뜸이 되는 동기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 다음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 이전의 웨슬리 선생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가서 인디언들을 가르치면 인디언들이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수한 신앙을 갖게 되고 교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는 이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는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같이 탄 모라비안 교도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해서 아우구스트 고틀리브 스판겐버그(August Gottlieb Spangenberg)라는 분을 만나서 선교계획을 협의했습니다. 스판겐버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는 진젠도르프 백작이 시작한 경건한 종파인데 스판겐버그는 진젠도르프 백작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웨슬리 선생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협의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스판겐버그는 개인적인 문제부터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웨슬리는 "나는 그가 세상의 구세주임을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판겐버그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신 사실을 아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웨슬리 선생은 우물쭈물하면서 "나는 그가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뒤에 이것이 "빈말"이라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 시작한 전도는 그야말로 허공을 치는 선교였습니다. 이런 선교가 성공을 거둘 리가 없습니다. 참담한 실패를 하고 돌아옵니다.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미국에 있었다. 그러나 누가 나를 개종시킬 것인가 이 불신앙의 약한 마음에서 나를 건져줄 자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미국에 건너갔던 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회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독백하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갈등 속에 있다가 회심을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담대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의 선교는 허공을 치는 선교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목표를 정하고 확신을 가지고 힘있게 하는 선교였습니다. 체험을 전하는 선교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교가 허공을 치는 선교가 아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전도, 해외선교, 모두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동기가 되어야합니다. 실적을 쌓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허공을 치는 전도입니다.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 두려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돌아가신 한경직(韓景職) 목사님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시장에서 머리에 털 나는 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외쳐도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약을 파는 사람의 머리에 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확신이 없는 가운데 하는 선교는 이런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해외 선교를 열심히 해 왔습니다. 1988년까지는 그저 5,6백 명 나가 있던 해외선교사들이 이제는 7천 명 가까이 나가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조건 내보던 것을 조금 멈추고 그 동안의 선교가 효과적인 것이었나 살펴야 할 때입니다. "한국 교회의 선교는 선교를 받는 쪽을 위한 선교가 아니라 선교를 하는 쪽을 위한 선교였다"라는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선교를 가장 열심히 하면서 욕도 가장 많이 먹는 교회"라는 말도 듣습니다.
이제는 반성하는 분위기가 짙습니다. '양적인 확대가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향상이 문제이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저희 목양교회는 해외선교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재마이카, 미국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계속해서 단기선교 팀을 내보냈습니다. 지금은 러시아 로스토프에 세 개의 교회와 연합신학원을 운영하고 여러 명의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협력하고 있습니다. 선교행정도 비교적 앞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IMF와 성전신축으로 확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일에 어느 청년이 "목사님, 올해는 단기선교 안 가요"물어보더군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그 동안의 선교가 과연 향방을 정확하게 정하고 달린 선교였나, 허공을 치는 선교는 아니었나 돌아보는 것입니다.
올해 해외선교주일은 "선교사 더 많이 내보냅시다" 하는 것보다 "그 동안 효과적인 선교를 했나 동기가 옳은 것이었고 방법이 효과적이었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보냅시다. 그러면서 더 힘찬 해외선교를 구상하고 비전을 새롭게 하면서 보냅시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도 바울에서 웨슬리로 연결되는 선교의 열정이라는 전통을 잘 이어받고 확장하기 바랍니다.
전도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바랍니다.
확신을 가지고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을 위해 겸손한 자세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선교, 허공을 치지 않는 선교를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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