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와 문화
본문
이사야 43장 7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지혜를 동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만 거룩하고 수준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기란 힘듭니다. 그런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영광받기를 원합니다. 그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참 위 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고 매사에 그분을 인정하면서 사는 삶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사명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힘든 일임을 압니다. 그래서 이일이 당연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번주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있습니다. 명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그 리스도인의 사명이지만 여러 가지 갈등으로 고민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교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함께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어려운 일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상대가 이미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것 이라고 이야 기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너무 강팍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교에 많은 경험과 연구를 한 사람들은 가장 힘든 것이 문화의 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문화권의 문 화를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문화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틀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가지만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멈추어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여지고 맙니다. 문화는 사람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가치관이 정립되어질 때 그 가치관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는 한 행동이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로들자면 유교문화권속에 살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가치관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으면 그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절대로 변화지 않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한 공동체가 옳다라고 기준하는 것들의 집합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가 다르고 미국, 아프리카의 문화가 다릅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작은 것들을 보고 문화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의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것에 대해선 별로 파고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이 내재되어있는 문 화가 가져다 주는 것들에 인해서 내 가치관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이해하고 깨뜨리지 않으면 절대 그들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 한 선교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어디로 갈까 계속기도하던 중에 너무 나 가고 싶어하던 환상의 섬 하와이를 선택했습니다. 가서 가장 어려운 지역을 선택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전체를 다녀도 생각한 만큼 어려운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정말 입을 것이 없어서 인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살고 있는 누드비치를 선택했습니다. 양복을 차려 입고 성경을 옆에 끼고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새까만 양복을 입고 새까만 성경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모두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접근하고 communication이 되어야 전도가 되는데 아무에게도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사명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지만 실패했다고 하 나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얻어서 다음날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성경책도 놓고 옷을 다 벗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 처럼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갖고 간 복음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집회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처소를 예비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겼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를 할 때 옷을 입고 해야 할 것인가 벗고 해야 할 것인가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강단 준비실에서 기도하면서 처음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옷을 입고 그들에게 접근했을 때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안았다 지금도 내가 옷을 입고 밖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이 과연 말씀을 듣겠는가 그래서 용기를 갖고 옷을 다 벗었습니다. 그리곤 차마 나가기가 힘들어서 눈을 감고 강단에 나와서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다 옷을 입고 앉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 근본적인 진리, 복음을 전하는 문제를 중요시 보고 기준을 두는 것보다. 벗느냐 입느냐, 먹느냐 안먹느냐는 문제로 우리는 너무 많은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공동체가 달라지면 문화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문화에서는 할아버지를 존경하면서 할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국문화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자란 어떤 문화 권 속에서의 나를 깨지 않고는 너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나와 너 사이에 communication이 될 수 없고 결국은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에게 증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절대적인 문화는 없습니다. 지역이 달라지거나 시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요즘 아이 들이 부르는 노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아이들은 옛날의 노래를 부르면 재미없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항상 타인을 쉽게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경우 가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상들에게 큰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에 세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사실은 한국의 문화는 불교나 유교문화가 아닙니다. 샤머니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를 보면 굉장히 샤머니즘적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가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적인 한국에 그것을 뿌리 내리기 위해선 그 문화를 수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한국의 문화는 불교와 유교가 다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교문화권속에서 그들이 갖고 있는 신념이 무엇입니까 조상들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고 있다고 확 실히 믿습니다. 그래서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면서 많이 희미해 졌습니다. 죽은 조상이 무슨 귀신이 되어서 당신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냐고 물으면 많은 젊은 사람들이 우리 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꼭 죽은 신이 와서 드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죽었다고 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죽어도 부모의 그 날을 생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요 성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유교의 근본목적은 조상신들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유교중국인들은 조상신에게 제사하는데 돈을 태워서 조상신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일 년에 엄청난 돈을 태 웁니다. 그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그들의 행동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같은 넓은 마음을 갖지 않는 한 한국의 문화 속에 복음을 전하기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보면 본문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적지 않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절대적인 진리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소한 것에 분쟁하며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가치관의 기준이 책임이라면 한국 가치관의 기준은 관계입니다. 어떤 사소한 일로 인해서 너와 나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면 그 관계를 깨뜨린 사람은 몹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지 않는 많은 친척들과 관계를 깨뜨려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람같이 보지 않습니다. 왜냐면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에.. 그러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좋아 하시지 않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주님이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고 나를 다스리게 한다면 우리릐 어떤 것 때문에 상대방과 관계를 깨뜨리진 않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보다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과 관계를 깨뜨리면 서 일한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사소한 문제란 바로 절대적가치 기준이 아닌 문화 적 문제였습니다. 8장성경에 보면 여기에 다루는 내용은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지내고 많이 차려놓았던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습니다. 저도 자라면서 그 제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 까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갈등을 초월했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팔공산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고기랑 음식들을 다 준비해놓고 실수로 고기는 냉장고에 놓아두고 야채만 가지고 온 관계로 정상에서 야채만 먹고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바위 밑에 진수성찬이 마련되어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나누어 주었더니 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어 야 될지 먹지 말아야 될지를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내 기준에서 판단하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저는 교회생활하면서 제사음식 먹으면 된다 안된다를 두고 분쟁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사건을 두고 어떻게 다루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도 우상에게 좀더 많은 정성을 드리면 잘 돌보아준다고 생각해서 많이 차렸습니다. 많이 차려서 남으니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그때 정상적으로 나온 것보다 우상에게 절한 것이 훨씬 쌌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편지를 썼습니다. 성경8장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는 것이요 깨달은 사도바울이 보니까 그들이 이런 상태라 고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1절에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 라고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판단해서 관계를 깨뜨리지 말고 그 입장을 생각해서 수용해라. 그래서 사도바울이 설명하기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라 만약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그 음식이 꺼림직 하면 먹지 말라 꺼림직 해서 불편해하면서 먹으면 그것이 죄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물질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믿음으로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거라고 믿고 먹으면 괜찮습니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부 터 왔기 때문에 감사와 기도로 먹으면 다 거룩하여 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먹지 않는 사람들을 믿음 이 약해서라고 판단해서도 안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공간에 파리가 한 마리 들어왔습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는 돌아다니기도 하도 내게 붙기도 해도 괜찮은데 내가 그 파리에 대해서 조금의식하게 되면 파리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그 파 리를 잡지도 못하면서 잡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마치 우리는 진리보다 진리 밖의 인간의 어떤 것에 붙들 리게 될 때 마치 참 진리는 놓치고 거짓된 것을 가지고 분쟁하면 한평생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이것을 먹어야 되는지 안해 야 되는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야 된다 안된다. 라고 쉽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국에 상당히 위기에 처해있을 때 복음이 들어오면서 이 주초문제로 인해서 위기가 왔습니다. 먹고 지낼 것도 없는데 술을 담아서 엄청난 양식을 소비할 때 한국교회가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주 금연운동을 했습니다. 술을 안먹는 사람들은 성경에 술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부분을 꺼내놓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술을 먹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첫 기적을 무엇으로 이루셨는데..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지난 겨울에 신부님과 같이 성지순례를 갔는데 한 신부님은 담배를 안피시더라구요 여쭤보니 내게도 도움 이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끊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끊을 수 있었냐고 물으니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서 끊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부는 줄담배를 피우셨습니다. 그런데 담배피우 실 땐 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 우리가 다 옳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독교는 서양문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서양문화가 아닙니다. 서양악기는 강대상에 아무리 올라와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동양악기가 올라오면 은혜가 안됩니다. 마치 굿판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가치관의 잘못이지 정말 동양악기는 들어오면 굿판이고 서양악기는 들어오면 성서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성경에 보면 동양 악 기들이 더 성서적입니다. 은혜를 끼쳤습니다. 무엇을 사용하든지 우리가 진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느냐 복음 자체에 문제가 있느냐에 기준을 두지 않고 외적인 것에 기준을 두면 항상 문제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서 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다 성서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지순례를 가면서 평신도와 이야기를 했는데 기독교는 이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으니 성경말씀에 위배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에 위배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한테 물으면 위배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성경말씀에 하나도 위배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까 물었습니다. 그러니 아니요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단이요 삼단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곤 이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자신도 패망하고 다른 사람도 패망케 한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쌓는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나는 사실 진리를 받아 들여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기 위해섭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자 내가 율법주의가 아니 지만 율법주의자와 함께 있는 것 내가 연약한 자는 아니지만 연약한자들과 같이 있는 것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다율법주의자들을 유대인들을 약한자들을 하나라도 더 주의 품에 안기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명절에 처음부터 제사 지내지 않고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나신 분들은 복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분들은 친인척을 만날 때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떡하면 작은 파도들이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막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빛인 우리들이 그들에게 깊숙히 들어가서 비출 기회가 없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그냥 깊숙이 들어갑시다. 사도바울이 가보니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너희들이 엉터리같이 우상을 섬기느냐 정신이 나갔다고 비난했더라면 그들과 관계는 깨어집니다. 대신 그 들의 문화를 이용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주춤하고 있습니다. 움추러 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카돌릭이나 불교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문화를 이용해서 그들은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 카톨릭이 원래 제사를 지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한국카톨릭만 제사를 지냅니다. 그들이 순수한 복음을 들고 들어와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깨뜨릴려고 하다가 수많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문화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자고 들어왔는데 오늘날 주위의 사람을 보면 카톨린신자들이 너무 제사를 많이 지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그들 중심에 정말 복음적인 것들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참 복음이 역사하고 깨닫게 하면 지혜를 주시고 바르게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할 길은 바로 그 가정이나 공동체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미성년자 다른 종교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가 정의 문화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능력이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구에 들어가서 걸리면서 한평생 갈등을 가집니다. 명절만 되면 가슴이 내려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여 주어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그분의 생각과 말씀을 가지고 성육신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길은 열려있습니다. 귀한 기회를 통해서 우리 가 먼저 기독교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말은 성서적 문화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지켜온 것이 절대가 아니라 우리가 옛날부터 지켜온 것이 절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진리 안에서 자유치 못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으나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가 아직 마땅히 알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쌓고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알아야 할 것은 자기자신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문화권 속에서 자라 왔는지. 그것이 교회에 와서 그것이 교회에 와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그 어떤 곳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명절에는 여러분 어떤 갈등을 겪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닷가의 잔잔한 파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겁이 나서 늘 갈등 속에서 명절을 보내고 그러지 맙시다.
추석은 무엇입니까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을 우리 기독교가 깊이 따져보면 그것은 하 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라는 것을 가르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12월 25일이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 문화를 이용해서 태양신이 아니라 예수님과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로 바꾸었습니다. 정말 온전한 신앙관을 가지고 거부하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할 일을 행하면 정말 추석명절에 온 인류가 참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덕을 쌓으면서 이번 명절 정말 최고의 기쁨을 누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거하는 귀한 계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지혜를 동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만 거룩하고 수준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기란 힘듭니다. 그런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영광받기를 원합니다. 그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참 위 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고 매사에 그분을 인정하면서 사는 삶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의 사명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힘든 일임을 압니다. 그래서 이일이 당연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번주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있습니다. 명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그 리스도인의 사명이지만 여러 가지 갈등으로 고민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선교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함께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어려운 일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상대가 이미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것 이라고 이야 기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너무 강팍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교에 많은 경험과 연구를 한 사람들은 가장 힘든 것이 문화의 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문화권의 문 화를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문화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틀린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가지만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멈추어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여지고 맙니다. 문화는 사람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가치관이 정립되어질 때 그 가치관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는 한 행동이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로들자면 유교문화권속에 살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가치관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으면 그것이 아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절대로 변화지 않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한 공동체가 옳다라고 기준하는 것들의 집합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가 다르고 미국, 아프리카의 문화가 다릅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작은 것들을 보고 문화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의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것에 대해선 별로 파고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이 내재되어있는 문 화가 가져다 주는 것들에 인해서 내 가치관을 만들어 가는 것을 이해하고 깨뜨리지 않으면 절대 그들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 한 선교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아서 어디로 갈까 계속기도하던 중에 너무 나 가고 싶어하던 환상의 섬 하와이를 선택했습니다. 가서 가장 어려운 지역을 선택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전체를 다녀도 생각한 만큼 어려운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정말 입을 것이 없어서 인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살고 있는 누드비치를 선택했습니다. 양복을 차려 입고 성경을 옆에 끼고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새까만 양복을 입고 새까만 성경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모두 기겁을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접근하고 communication이 되어야 전도가 되는데 아무에게도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사명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지만 실패했다고 하 나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얻어서 다음날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성경책도 놓고 옷을 다 벗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 처럼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갖고 간 복음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집회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처소를 예비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겼습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를 할 때 옷을 입고 해야 할 것인가 벗고 해야 할 것인가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강단 준비실에서 기도하면서 처음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옷을 입고 그들에게 접근했을 때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안았다 지금도 내가 옷을 입고 밖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이 과연 말씀을 듣겠는가 그래서 용기를 갖고 옷을 다 벗었습니다. 그리곤 차마 나가기가 힘들어서 눈을 감고 강단에 나와서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다 옷을 입고 앉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 근본적인 진리, 복음을 전하는 문제를 중요시 보고 기준을 두는 것보다. 벗느냐 입느냐, 먹느냐 안먹느냐는 문제로 우리는 너무 많은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공동체가 달라지면 문화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문화에서는 할아버지를 존경하면서 할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국문화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자란 어떤 문화 권 속에서의 나를 깨지 않고는 너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나와 너 사이에 communication이 될 수 없고 결국은 내가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에게 증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절대적인 문화는 없습니다. 지역이 달라지거나 시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요즘 아이 들이 부르는 노래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아이들은 옛날의 노래를 부르면 재미없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항상 타인을 쉽게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경우 가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상들에게 큰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에 세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사실은 한국의 문화는 불교나 유교문화가 아닙니다. 샤머니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를 보면 굉장히 샤머니즘적입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가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적인 한국에 그것을 뿌리 내리기 위해선 그 문화를 수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 한국의 문화는 불교와 유교가 다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교문화권속에서 그들이 갖고 있는 신념이 무엇입니까 조상들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고 있다고 확 실히 믿습니다. 그래서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면서 많이 희미해 졌습니다. 죽은 조상이 무슨 귀신이 되어서 당신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냐고 물으면 많은 젊은 사람들이 우리 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꼭 죽은 신이 와서 드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죽었다고 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죽어도 부모의 그 날을 생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요 성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유교의 근본목적은 조상신들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유교중국인들은 조상신에게 제사하는데 돈을 태워서 조상신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일 년에 엄청난 돈을 태 웁니다. 그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그들의 행동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같은 넓은 마음을 갖지 않는 한 한국의 문화 속에 복음을 전하기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보면 본문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적지 않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절대적인 진리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소한 것에 분쟁하며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가치관의 기준이 책임이라면 한국 가치관의 기준은 관계입니다. 어떤 사소한 일로 인해서 너와 나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면 그 관계를 깨뜨린 사람은 몹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지 않는 많은 친척들과 관계를 깨뜨려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람같이 보지 않습니다. 왜냐면 관계를 깨뜨렸기 때문에.. 그러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좋아 하시지 않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주님이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고 나를 다스리게 한다면 우리릐 어떤 것 때문에 상대방과 관계를 깨뜨리진 않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보다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과 관계를 깨뜨리면 서 일한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사소한 문제란 바로 절대적가치 기준이 아닌 문화 적 문제였습니다. 8장성경에 보면 여기에 다루는 내용은 우상에게 드리는 제물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를 지내고 많이 차려놓았던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습니다. 저도 자라면서 그 제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 까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갈등을 초월했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팔공산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고기랑 음식들을 다 준비해놓고 실수로 고기는 냉장고에 놓아두고 야채만 가지고 온 관계로 정상에서 야채만 먹고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바위 밑에 진수성찬이 마련되어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나누어 주었더니 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어 야 될지 먹지 말아야 될지를 의논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내 기준에서 판단하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저는 교회생활하면서 제사음식 먹으면 된다 안된다를 두고 분쟁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사건을 두고 어떻게 다루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도 우상에게 좀더 많은 정성을 드리면 잘 돌보아준다고 생각해서 많이 차렸습니다. 많이 차려서 남으니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그때 정상적으로 나온 것보다 우상에게 절한 것이 훨씬 쌌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편지를 썼습니다. 성경8장2절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는 것이요 깨달은 사도바울이 보니까 그들이 이런 상태라 고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1절에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 라고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판단해서 관계를 깨뜨리지 말고 그 입장을 생각해서 수용해라. 그래서 사도바울이 설명하기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라 만약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그 음식이 꺼림직 하면 먹지 말라 꺼림직 해서 불편해하면서 먹으면 그것이 죄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물질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믿음으로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거라고 믿고 먹으면 괜찮습니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부 터 왔기 때문에 감사와 기도로 먹으면 다 거룩하여 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먹지 않는 사람들을 믿음 이 약해서라고 판단해서도 안되며 그것을 먹는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어떤 공간에 파리가 한 마리 들어왔습니다.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는 돌아다니기도 하도 내게 붙기도 해도 괜찮은데 내가 그 파리에 대해서 조금의식하게 되면 파리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그 파 리를 잡지도 못하면서 잡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마치 우리는 진리보다 진리 밖의 인간의 어떤 것에 붙들 리게 될 때 마치 참 진리는 놓치고 거짓된 것을 가지고 분쟁하면 한평생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술 담배 때문에 고민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이것을 먹어야 되는지 안해 야 되는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야 된다 안된다. 라고 쉽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한국에 상당히 위기에 처해있을 때 복음이 들어오면서 이 주초문제로 인해서 위기가 왔습니다. 먹고 지낼 것도 없는데 술을 담아서 엄청난 양식을 소비할 때 한국교회가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주 금연운동을 했습니다. 술을 안먹는 사람들은 성경에 술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부분을 꺼내놓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술을 먹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첫 기적을 무엇으로 이루셨는데..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지난 겨울에 신부님과 같이 성지순례를 갔는데 한 신부님은 담배를 안피시더라구요 여쭤보니 내게도 도움 이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 같아 끊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끊을 수 있었냐고 물으니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해서 끊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부는 줄담배를 피우셨습니다. 그런데 담배피우 실 땐 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에 우리가 다 옳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기독교는 서양문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서양문화가 아닙니다. 서양악기는 강대상에 아무리 올라와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동양악기가 올라오면 은혜가 안됩니다. 마치 굿판 벌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가치관의 잘못이지 정말 동양악기는 들어오면 굿판이고 서양악기는 들어오면 성서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성경에 보면 동양 악 기들이 더 성서적입니다. 은혜를 끼쳤습니다. 무엇을 사용하든지 우리가 진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느냐 복음 자체에 문제가 있느냐에 기준을 두지 않고 외적인 것에 기준을 두면 항상 문제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서 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다 성서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지순례를 가면서 평신도와 이야기를 했는데 기독교는 이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으니 성경말씀에 위배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에 위배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한테 물으면 위배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성경말씀에 하나도 위배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까 물었습니다. 그러니 아니요 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단이요 삼단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곤 이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자신도 패망하고 다른 사람도 패망케 한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쌓는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나는 사실 진리를 받아 들여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하기 위해섭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자 내가 율법주의가 아니 지만 율법주의자와 함께 있는 것 내가 연약한 자는 아니지만 연약한자들과 같이 있는 것 다 이유가 있습니다. 다율법주의자들을 유대인들을 약한자들을 하나라도 더 주의 품에 안기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명절에 처음부터 제사 지내지 않고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나신 분들은 복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분들은 친인척을 만날 때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어떡하면 작은 파도들이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막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빛인 우리들이 그들에게 깊숙히 들어가서 비출 기회가 없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그냥 깊숙이 들어갑시다. 사도바울이 가보니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너희들이 엉터리같이 우상을 섬기느냐 정신이 나갔다고 비난했더라면 그들과 관계는 깨어집니다. 대신 그 들의 문화를 이용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주춤하고 있습니다. 움추러 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카돌릭이나 불교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문화를 이용해서 그들은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 카톨릭이 원래 제사를 지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한국카톨릭만 제사를 지냅니다. 그들이 순수한 복음을 들고 들어와서 죽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깨뜨릴려고 하다가 수많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문화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자고 들어왔는데 오늘날 주위의 사람을 보면 카톨린신자들이 너무 제사를 많이 지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면 안됩니다. 그들 중심에 정말 복음적인 것들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참 복음이 역사하고 깨닫게 하면 지혜를 주시고 바르게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할 길은 바로 그 가정이나 공동체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미성년자 다른 종교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가 정의 문화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능력이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입구에 들어가서 걸리면서 한평생 갈등을 가집니다. 명절만 되면 가슴이 내려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보여 주어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그분의 생각과 말씀을 가지고 성육신의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길은 열려있습니다. 귀한 기회를 통해서 우리 가 먼저 기독교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말은 성서적 문화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지켜온 것이 절대가 아니라 우리가 옛날부터 지켜온 것이 절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진리 안에서 자유치 못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으나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가 아직 마땅히 알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덕을 쌓고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알아야 할 것은 자기자신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문화권 속에서 자라 왔는지. 그것이 교회에 와서 그것이 교회에 와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그 어떤 곳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명절에는 여러분 어떤 갈등을 겪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닷가의 잔잔한 파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겁이 나서 늘 갈등 속에서 명절을 보내고 그러지 맙시다.
추석은 무엇입니까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을 우리 기독교가 깊이 따져보면 그것은 하 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라는 것을 가르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12월 25일이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그 문화를 이용해서 태양신이 아니라 예수님과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로 바꾸었습니다. 정말 온전한 신앙관을 가지고 거부하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할 일을 행하면 정말 추석명절에 온 인류가 참 우리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덕을 쌓으면서 이번 명절 정말 최고의 기쁨을 누리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거하는 귀한 계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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