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
본문
말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최초로 파송 받은 평신도 선교사가 누구일까요” “평신도 신분으로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힌트를 드리면 그 사람은 주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3년 반 동안 훈련 받은 제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평신도입니다만,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사람입니다. 누구일까요 바나바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8장 4절 이하를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식으로 교회에서 파송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집사님은 스스로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뿐,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 파송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같은 장 사도행전 8장 14절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사마리아로 파송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평신도가 아닌 목회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 즉 목회자의 자격으로 사마리아로 파송되었습니다. 우리 미션팀 처럼 잠깐 가서 말씀을 가르치는 단기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1장에 와서 처음으로 평신도 선교사가 파송됩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지방에 이어, 더 북쪽 지방인 안디옥이라는 곳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회의 끝에, 가장 덕망 있는 평신도 지도자 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는 안디옥에 파송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처음으로 선교사로 파송하였느냐는 점입니다. 저는 오늘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 바나바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1) 위로와 격려의 사람 바나바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한 후에,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였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수가 많아져서, 하루에 3,000명씩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유지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성도들 중에 어렵게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해 막대한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4장 36절과 37절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4:36~37)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후에 ‘바나바’라는 별명이 생긴 것입니다. 그 뜻은 영어로 ‘Son of Encouragement’,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격려의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습니다.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으로서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과 벌꿀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구브로 출신인 바나바는 이름난 부자였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땅을 팔아 헌금을 했습니다. 바나바의 이 헌신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많은 전도자들에게 선교비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격려의 사역자’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초대교회는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힘을 얻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가 바로 격려의 사역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남을 세워주는 격려의 사람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사역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사역입니다. 우리 가운데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격려는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격려는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정 사역자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 Garfield 고등학교에 죠니(Johnny)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모범생이었고, 다른 한 아이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부모님과 선생님이 상담하는 날이 있었는데 죠니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저희 아들 죠니의 학교생활이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저희 반에 죠니와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온 반 식구들이 격려를 얻습니다.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까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죠니의 부모님을 만나보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 그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온 아이는 모범생 죠니가 아니라, 말썽꾸러기 죠니였습니다. "선생님, 어제 선생님께서 우리 어머님께 해 주신 말을 기억합니다. 잘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내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고 하니, 저는 선생님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그리고 그날 평생 처음으로 숙제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계속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전교에서 가장 성적이 많이 향상된 아이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가 6개월 만에 말썽쟁이 죠니는 반에서 3등내에 드는 모범생으로 발전하게 만든 것입니다. 실수로 했던 칭찬 한 마디가, 모범생의 어머니인줄 알고 했던 칭찬 한 마디가 문제아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것입니다. 한 마디의 격려가 낙심했던 아이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칭찬과 격려는 문제아를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6개월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심방을 가서 저는 이렇게 종종 말합니다. “집이 좋습니다. 분위기가 밝은데요. 자동차 잘 사셨습니다. 야, 이 음식 맛있어요. 정말 음식 잘하시네요. ” 그랬더니 어느 자매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조건 다 좋다고 하시네요. 목사님은 다 맛있다고 하시고, 다 좋다고 하시네요. 솔직히 말씀 해주세요. ” 그 때 제가 뭘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뭘, 돈 드는 일도 아닌데. ”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격려하는데, 칭찬하는데 돈이 듭니까 한 푼도 안 들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칭찬에 인색합니다. 칭찬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허점도 있고 단점도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점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두 가지 장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여러분! 단점을 보지 말고 그 한 두 가지 장점을 보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눈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남의 결점과 단점만 찾아낸 후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하며, 나팔 불고 다니지 말고 격려와 칭찬을 하시기 바랍니다.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는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반면, 남을 비판만 하고 헐뜯는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왜요 자기 자신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는 비판하고 판단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밤낮 판단만 합니다. ”예수 믿는 게 왜 저 모양이야“ ”저거 집사 맞아 안수집사가 왜 저래“ ”저 친구가 교사라고 소가 다 웃겠다! 작년까지 개판 치던 친구였는데“ 늘 판단하고 평가해서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도 부족한데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점수를 매길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하고 점수 매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이 제대로 설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나 영적인 거목이나 교회의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 끝에 나옵니다.
여러분, 바나바처럼 칭찬과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주위에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음식을 맛없게 만들었어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음 식사 때에는 반찬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샘 식구가 조금 부족해도 위로와 격려를 하시기 바랍니다.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 주위에 있는 사역자들을 많이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위로는 사역자들에게 더 큰 힘과 추진력을 발휘토록 도와줍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의 삶을 보고, 그의 생활 태도를 보고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로 ‘바나바’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나바처럼 위로의 사람이라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 없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을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아내, 아내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바나바와 같은 남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일으키는 바나바와 같은 부모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는 바나바와 같은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주님 중심의 사람 바나바
바나바는 주님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도착한 그의 첫 번째 고백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본문에 의하면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세상의 많은 조건에서 기쁨을 찾은 것이 아니라, 안디옥에 임한 주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주님께만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세반석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흔들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굳은 마음으로” 다시 말하면 “전심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얼마든지 많은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부로 출신의 부자였고, 레위 지파 후손으로 훌륭한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또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만큼 부와 지식과 지위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디옥 교회에 와서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고, 예수만을 높였습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전하지 아니하고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신도 선교사인 바나바의 장점입니다. 그는 주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사역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어느 마을에 굉장히 아름다운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서 앞을 다투어 청혼을 해왔습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서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돈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모두 뛰기를 시작하여 한 청년이 처녀를 거의 따라와서 잡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에, 이 처녀는 돈을 한 움큼 그 달려오는 청년 앞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줍느라고 그 처녀를 잡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 처녀가까이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돈다발을 떨어뜨렸습니다. 역시 그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청년이 그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갔을 때, 이때 처녀는 주머니에 남아 있던 돈을 몽땅 길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그 구혼자는 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처녀를 향해 계속 달렸습니다. 결국 세 번째 청년이 그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돈보다 신부만 바라보고 달렸던 청년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서 신부만을 보고 달렸던 청년처럼,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핵심은 놓친 채 곁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오클랜드에서 사역할 때 겪었던 일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처음 감리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복음을 듣고 믿게 되어 제가 4대째 입니다. 우리 아들이 5대째 감리교인이 되는 셈입니다. ”라고 말하며 집안이 감리교인인 것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장로교인인 것을 강조하며 “나는 한국의 장자 교단인 장로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장로교의 교리를 세운 칼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러를 너무 중요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한국에 있는 유명한 교회와 교계에 알려진 유명한 목사님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순복음이든, 주님을 우리 신앙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보다 칼빈을 칼빈 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 웨슬러보다 요한 웨슬러를 요한 웨슬러 되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명한 목사님보다 그 목사님을 오늘에 있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안디옥에 처음 도착한 그로써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교회의 조직도 세워야 하고, 새로운 일꾼들도 임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재정 상태도 조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가 안디옥에서 새롭게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에 관심이 있지 아니하고, 그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주님께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새롭게 임명된 청지기 여러분! 다른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사역의 가장 중심에 두었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육과 훈련팀의 교사로서, 예배와 찬양팀 일꾼으로서, 21세기 문화 사역팀 청지기로서, 사역을 해야 하지만, 주님을 사역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바나바처럼 일 중심의 사람들이 아닌, 주님 중심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오직 주님께만 시선을 맞추고 살았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은 믿음이 약합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성과 영성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바나바는 우리의 모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그는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큰 무리, 즉 어머 어마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과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실 때에도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러 가실 때나 기도하실 때나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성령의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하실 때에도 혼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일하실 때 성령의 권능에 의지하여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스웨덴의 사무엘 에데스타프 목사라는 분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요한복음 3장16절 말씀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요한복음 3장16절이 설교 본문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성도들이 실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유치부 아이들도 다 외우는 성경 구절로서, 성도들 대부분이 초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에데스타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말씀에 성령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에데스타프 목사님은 설교 중에 “스웨덴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순복음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열심히 중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설교하는 것과, 인간의 지식과 열심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마귀와의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그가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자,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마스터 키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마스터 키입니다.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스터 키는 성령충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바나바처럼 믿음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 바나바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로 복음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지만, 바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 (행9:26) 예루살렘 공동체가 아무도 사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잡아 죽이던 그가 예수를 믿고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울의 신원 보증을 서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자기 고향인 다소로 가는 바람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게 되었을 때, 바나바는 10여 전에 헤어진 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갔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안디옥에서 다소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4시간 이상 달려야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 거리를 바나바는 걸어서 갔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를 가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개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우던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전통적인 유대 풍습에 의하면 이방인들을 개 취급할 정도로 이방인들을 멀리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과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과 베드로와 이방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데 전통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베드로는 슬그머니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는 척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많은 회중들 앞에서 믿음의 대선배인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며 사과를 받아 낼 만큼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울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와서 1년 동안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팀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이 바나바를 돕는 동역의 관계가 계속 되다가, 후에는 상황이 바뀌어 집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기록되다가, 나중에는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가 섞여서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뒤로 가게 되면 바나바가 뒤로 빠져서 '바울과 바나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자기가 신원 보증을 해서 사역자가 되고 자기의 사역을 도와주던 바울을 나중에는 오히려 섬기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인격 중에 가장 큰 인격은 남을 섬기는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자기보다 신분도 낮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선임자입니다. 바울은 뒤늦게 온 후배입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인의 인격인 줄로 믿습니다. 바나바의 모습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바나바와 같은 분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이가 어려도 세워진 주님의 일꾼들을 진심으로 섬겨주는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어른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비록 현재에는 빨강, 노란, 파란 색깔의 물을 머리에 들이고, 귀에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귀고리를 차고, 속옷이 보일 정도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 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인격의 선배님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배움이 짧고 믿음의 연조는 짧아도 사랑으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바나바와 같이 인격이 훌륭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폭스 잭슨(Fox Jackson)이라는 신학자가 바나바에 대해서 기록한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나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의 장기를 찾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크리스쳔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했으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으며,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상 바울은 세계 교회 진보에 공헌한바 컸지만, 바나바는 초대교회를 살맛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의 격려사역, 사람을 세워주는 코칭, 멘토링 사역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앞으로 우리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의 과제가 있다면 모든 사람을 격려해 줄 바나바와 같은 멘토를 찾는 것입니다. 지금 진정으로 우리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 바나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가 있는 곳에 전도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 교회가 부흥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있는 교회를 세상이 우러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위로와 격려의 사람, 바나바를 우리 삶의 모델로 삼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오직 주님께만 시선을 맞추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둔 바나바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귀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인격의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지방에 이어, 더 북쪽 지방인 안디옥이라는 곳에도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회의 끝에, 가장 덕망 있는 평신도 지도자 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는 안디옥에 파송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평신도로서 처음으로 선교사로 파송하였느냐는 점입니다. 저는 오늘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 바나바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1) 위로와 격려의 사람 바나바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한 후에,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였습니다. 날마다 구원받는 수가 많아져서, 하루에 3,000명씩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유지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성도들 중에 어렵게 살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해 막대한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4장 36절과 37절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4:36~37)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후에 ‘바나바’라는 별명이 생긴 것입니다. 그 뜻은 영어로 ‘Son of Encouragement’,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격려의 사역자’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습니다.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으로서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과 벌꿀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구브로 출신인 바나바는 이름난 부자였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땅을 팔아 헌금을 했습니다. 바나바의 이 헌신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많은 전도자들에게 선교비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격려의 사역자’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초대교회는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힘을 얻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가 바로 격려의 사역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남을 세워주는 격려의 사람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사역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사역입니다. 우리 가운데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격려는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격려는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정 사역자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 Garfield 고등학교에 죠니(Johnny)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모범생이었고, 다른 한 아이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부모님과 선생님이 상담하는 날이 있었는데 죠니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저희 아들 죠니의 학교생활이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저희 반에 죠니와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이 아이로 말미암아 온 반 식구들이 격려를 얻습니다.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까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죠니의 부모님을 만나보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 그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온 아이는 모범생 죠니가 아니라, 말썽꾸러기 죠니였습니다. "선생님, 어제 선생님께서 우리 어머님께 해 주신 말을 기억합니다. 잘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내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인정해 주신다고 하니, 저는 선생님의 기대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그리고 그날 평생 처음으로 숙제를 해 왔습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계속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전교에서 가장 성적이 많이 향상된 아이로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가 6개월 만에 말썽쟁이 죠니는 반에서 3등내에 드는 모범생으로 발전하게 만든 것입니다. 실수로 했던 칭찬 한 마디가, 모범생의 어머니인줄 알고 했던 칭찬 한 마디가 문제아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것입니다. 한 마디의 격려가 낙심했던 아이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칭찬과 격려는 문제아를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6개월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심방을 가서 저는 이렇게 종종 말합니다. “집이 좋습니다. 분위기가 밝은데요. 자동차 잘 사셨습니다. 야, 이 음식 맛있어요. 정말 음식 잘하시네요. ” 그랬더니 어느 자매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조건 다 좋다고 하시네요. 목사님은 다 맛있다고 하시고, 다 좋다고 하시네요. 솔직히 말씀 해주세요. ” 그 때 제가 뭘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뭘, 돈 드는 일도 아닌데. ”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격려하는데, 칭찬하는데 돈이 듭니까 한 푼도 안 들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칭찬에 인색합니다. 칭찬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허점도 있고 단점도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점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두 가지 장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여러분! 단점을 보지 말고 그 한 두 가지 장점을 보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눈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남의 결점과 단점만 찾아낸 후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하며, 나팔 불고 다니지 말고 격려와 칭찬을 하시기 바랍니다.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는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반면, 남을 비판만 하고 헐뜯는 사람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왜요 자기 자신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는 비판하고 판단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밤낮 판단만 합니다. ”예수 믿는 게 왜 저 모양이야“ ”저거 집사 맞아 안수집사가 왜 저래“ ”저 친구가 교사라고 소가 다 웃겠다! 작년까지 개판 치던 친구였는데“ 늘 판단하고 평가해서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도 부족한데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점수를 매길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하고 점수 매길 수 있습니다. 교회는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이 제대로 설 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나 영적인 거목이나 교회의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 끝에 나옵니다.
여러분, 바나바처럼 칭찬과 격려하는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주위에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음식을 맛없게 만들었어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음 식사 때에는 반찬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샘 식구가 조금 부족해도 위로와 격려를 하시기 바랍니다.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들이나 안수집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 주위에 있는 사역자들을 많이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위로는 사역자들에게 더 큰 힘과 추진력을 발휘토록 도와줍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자기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의 삶을 보고, 그의 생활 태도를 보고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로 ‘바나바’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나바처럼 위로의 사람이라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망 없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남편을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아내, 아내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바나바와 같은 남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일으키는 바나바와 같은 부모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모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는 바나바와 같은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주님 중심의 사람 바나바
바나바는 주님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도착한 그의 첫 번째 고백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본문에 의하면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세상의 많은 조건에서 기쁨을 찾은 것이 아니라, 안디옥에 임한 주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주님께만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세반석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흔들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굳은 마음으로” 다시 말하면 “전심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얼마든지 많은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부로 출신의 부자였고, 레위 지파 후손으로 훌륭한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또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만큼 부와 지식과 지위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디옥 교회에 와서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고, 예수만을 높였습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전하지 아니하고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신도 선교사인 바나바의 장점입니다. 그는 주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사역의 최우선 순위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어느 마을에 굉장히 아름다운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서 앞을 다투어 청혼을 해왔습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서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돈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모두 뛰기를 시작하여 한 청년이 처녀를 거의 따라와서 잡을 만큼 가까이 왔을 때에, 이 처녀는 돈을 한 움큼 그 달려오는 청년 앞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줍느라고 그 처녀를 잡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 처녀가까이 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돈다발을 떨어뜨렸습니다. 역시 그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청년이 그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갔을 때, 이때 처녀는 주머니에 남아 있던 돈을 몽땅 길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그 구혼자는 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처녀를 향해 계속 달렸습니다. 결국 세 번째 청년이 그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돈보다 신부만 바라보고 달렸던 청년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서 신부만을 보고 달렸던 청년처럼,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핵심은 놓친 채 곁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오클랜드에서 사역할 때 겪었던 일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안은 처음 감리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복음을 듣고 믿게 되어 제가 4대째 입니다. 우리 아들이 5대째 감리교인이 되는 셈입니다. ”라고 말하며 집안이 감리교인인 것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장로교인인 것을 강조하며 “나는 한국의 장자 교단인 장로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장로교의 교리를 세운 칼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러를 너무 중요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한국에 있는 유명한 교회와 교계에 알려진 유명한 목사님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순복음이든, 주님을 우리 신앙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칼빈보다 칼빈을 칼빈 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 웨슬러보다 요한 웨슬러를 요한 웨슬러 되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유명한 목사님보다 그 목사님을 오늘에 있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였던 바나바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안디옥에 처음 도착한 그로써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교회의 조직도 세워야 하고, 새로운 일꾼들도 임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재정 상태도 조사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가 안디옥에서 새롭게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에 관심이 있지 아니하고, 그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주님께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새롭게 임명된 청지기 여러분! 다른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사역의 가장 중심에 두었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육과 훈련팀의 교사로서, 예배와 찬양팀 일꾼으로서, 21세기 문화 사역팀 청지기로서, 사역을 해야 하지만, 주님을 사역의 가장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바나바처럼 일 중심의 사람들이 아닌, 주님 중심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오직 주님께만 시선을 맞추고 살았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사람은 믿음이 약합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동시에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성과 영성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바나바는 우리의 모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그는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큰 무리, 즉 어머 어마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과 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어나실 때에도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러 가실 때나 기도하실 때나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성령의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을 하실 때에도 혼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일하실 때 성령의 권능에 의지하여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스웨덴의 사무엘 에데스타프 목사라는 분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요한복음 3장16절 말씀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요한복음 3장16절이 설교 본문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성도들이 실망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유치부 아이들도 다 외우는 성경 구절로서, 성도들 대부분이 초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에데스타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말씀에 성령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에데스타프 목사님은 설교 중에 “스웨덴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순복음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열심히 중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설교하는 것과, 인간의 지식과 열심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어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능력이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마귀와의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 사람이었습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그가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자, 안디옥 교회에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마스터 키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마스터 키입니다.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스터 키는 성령충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바나바처럼 믿음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 바나바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로 복음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지만, 바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 (행9:26) 예루살렘 공동체가 아무도 사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잡아 죽이던 그가 예수를 믿고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울의 신원 보증을 서 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자기 고향인 다소로 가는 바람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 교회가 놀랍게 부흥하게 되었을 때, 바나바는 10여 전에 헤어진 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갔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안디옥에서 다소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4시간 이상 달려야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 거리를 바나바는 걸어서 갔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를 가서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개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는지,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우던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전통적인 유대 풍습에 의하면 이방인들을 개 취급할 정도로 이방인들을 멀리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과 스스럼없이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과 베드로와 이방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데 전통 유대인들이 들어오자, 베드로는 슬그머니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는 척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많은 회중들 앞에서 믿음의 대선배인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며 사과를 받아 낼 만큼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울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와서 1년 동안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팀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울이 바나바를 돕는 동역의 관계가 계속 되다가, 후에는 상황이 바뀌어 집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기록되다가, 나중에는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가 섞여서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뒤로 가게 되면 바나바가 뒤로 빠져서 '바울과 바나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자기가 신원 보증을 해서 사역자가 되고 자기의 사역을 도와주던 바울을 나중에는 오히려 섬기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인격 중에 가장 큰 인격은 남을 섬기는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자기보다 신분도 낮고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나바는 선임자입니다. 바울은 뒤늦게 온 후배입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인의 인격인 줄로 믿습니다. 바나바의 모습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바나바와 같은 분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이가 어려도 세워진 주님의 일꾼들을 진심으로 섬겨주는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어른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비록 현재에는 빨강, 노란, 파란 색깔의 물을 머리에 들이고, 귀에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귀고리를 차고, 속옷이 보일 정도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는 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격려하는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인격의 선배님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배움이 짧고 믿음의 연조는 짧아도 사랑으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바나바와 같이 인격이 훌륭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폭스 잭슨(Fox Jackson)이라는 신학자가 바나바에 대해서 기록한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나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매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의 장기를 찾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크리스쳔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했으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으며,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상 바울은 세계 교회 진보에 공헌한바 컸지만, 바나바는 초대교회를 살맛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의 격려사역, 사람을 세워주는 코칭, 멘토링 사역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앞으로 우리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의 과제가 있다면 모든 사람을 격려해 줄 바나바와 같은 멘토를 찾는 것입니다. 지금 진정으로 우리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 바나바와 같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가 있는 곳에 전도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 교회가 부흥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있는 교회를 세상이 우러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위로와 격려의 사람, 바나바를 우리 삶의 모델로 삼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보다 오직 주님께만 시선을 맞추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둔 바나바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귀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바나바와 같은 훌륭한 인격의 사람들이 세상 가운데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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