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하는 교회
본문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복음을 심고 복음이 꽃핀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잔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조상부터 섬긴 유대교의 잔재를 떨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했는데, 돌에 맞아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된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는 분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설교에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이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성전이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분노해서 돌을 들어 그를 쳤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사건으로 핍박이 노골화 되었고, 믿는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멀리는 다메섹이나 구레네와 구브로까지 피난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다메섹은 사울이 믿는 자는 잡기 위해 달려간 곳으로 유명하고, 구브로는 지금의 사이프러스 섬으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복음이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로 큰 도시로 헬라 문화가 왕성했습니다.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고, 그 중에 1/7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헬라인에도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0-21). ” 당시 복음은 주로 유대인에게만 제한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헬라인에게 직접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결과로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에도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긴 있습니다.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개종자들로, 할례까지 받아서 완전히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방인들에게 여전히 폐쇄적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제한과 차별이 없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이방인들에게 문을 열고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안디옥 교회는 설립부터 복음의 자유와 개방성이 가득했습니다. 교인들 구성원 자체가 유대이 아니라 헬라인들로 이루었습니다. 안디옥에 부흥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지도자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입니다. 누구보다 헬라인과 헬라문화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교회의 출발을 건전하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이 꽃핀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예수 나의 첫 사랑 되시네 내 첫 사랑 지존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 찬양하리 보좌 앞에 나의 삶이 향기로운 제사로 주께 드려지기 원하네 오직 주만 바라보며 나의 삶을 드리네 다른 길은 찾지 않으리 나의 온전한 열정과 나의 찬양 되시네 주의 길을 따라 가리라. ”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모시고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지도자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한만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24절). ” 자기 재산을 구제헌금에 바친 사람이고, 설교를 잘해서 바나바란 이름을 얻은 검증된 지도자입니다. 구브로 출신으로 유대교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지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와서 동역하였습니다. 만약 바나바의 초청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성경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와서 함께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5-26절). ” 교회는 자생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물을 주고 잘 가꾸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잘 가르치고 잘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강단의 높이만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에는 좋은 지도자가 있고, 잘 훈련된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영적 지도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인 것을 인정받았습니다. 우상숭배자와 다르고, 세상의 무신론자들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제자로 훈련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무얼 믿는지 모른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고백과 믿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삶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인정해야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인은 부모 형제보다 교인을 더 사랑합니다. 우리의 윤리적인 기준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고, 믿는 사람의 양심은 세상의 어떤 법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에 노예 되지 않습니다. 정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참 교인이 되고, 참 교회가 됩시다.
선교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교인이 되고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는 것 그 이상의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우리의 마지막 꿈이고 이상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은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첫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헬라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자 곧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3차에 걸친 바울의 선교를 후원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교회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의 발자취 따라 터키를 여행할 때 안디옥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인천에서 이스탐불로, 이스탄불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서 아데나로 가서 안디옥을 제일 먼저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초라한 시골 동네에 지나지 않지만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태와 같습니다. 죽어도 사시 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교회가 없어져도 없어지는 않는 것이 선교의 열매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선교하는 안디옥 교회는 지금도 살아서 수백 수천 교회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선교를 목적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교회는 둘이 모으든 셋이 모이든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부른 것은 선교를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른 나라들에게 선교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이방에 침략을 당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가장 불순종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말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1-3).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땅 끝까지 보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
우리 교회의 사명선언문도 선교를 최종 목적으로 말합니다. “선교지향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한다. ” 말세는 미지근하게 믿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차갑거나 뜨겁게 믿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토하여 지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자랑하지 말고, 너의 벌거벗은 것과 눈 먼 것을 고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부유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열심을 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19-20). ” 전심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영이 살아야 행복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야 신앙생활 잘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소그룹에 충실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개인주의나 전체주의가 아닙니다. 가족이나 공동체입니다.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혼자 고립되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군중 속에 고립도 안 됩니다. 나와 네가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가족 공동체를 맛보아야 합니다. 머리와 팔 다리가 한 몸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내가 기쁘면 남도 기쁜 지체 의식과 공동의 감각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전인적인 소그룹인 셀과 교제와 봉사를 중심으로 하는 은사소그룹이 있습니다. 소그룹이 살아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퍼져나갈 것입니다. 겨자씨 하나가 큰나무를 이루듯이 소그룹의 생명으로 교회는 진정한 성장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해서,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다리 놓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불신자들을 초청해서 신자로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가 없는 나라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적인 부름입니다. 우리 인생에 여러 소망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 선교가 최종 목적입니다. 이 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 이 복음 전합시다. 복음으로 세워지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일합시다. 선교합시다. 선교에 우리 일생의 목적을 둡시다.
이렇게 준비하라
선교를 어떻게 준비합니까 선교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수다한 무리가 주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힘이 곧 선교의 힘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할수록 선교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차고 넘침으로 소아시아와 에베소와 아테네와 로마까지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산불이 번질 때에는 바람을 타고 불같이 번져갑니다. 복음의 바람, 성령의 강한 바람이 불어야 복음 전파와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가족의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예수 믿는 즐거움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행복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셀의 부흥과 교회의 참된 성장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삼천 명 오천 명으로 부흥할 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선교할 수 있는 재정이 넘쳐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재정적인 뒷받침을 했습니다. 물질적인 헌신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는가,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는가에 따라 물질에 대한 헌신이 달라집니다. “형제들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해서 거룩한 물질로 헌신합시다. 빌 게이츠가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를 진정한 부자로 만든 것은 자선사업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은 물질입니다. 많이는 못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합시다.
선교하기 위해서는 전심으로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탄식해서 안 됩니다. 물질적인 헌신도 해야 하고, 영적인 헌신도 해야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을 골고루 다 쓸 수 있으면 좋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4). ” 선교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선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이 임할 때 예루살렘을 넘어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할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여호와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4-46). ” 에베소에 성령의 은사와 충만함이 임할 때 로마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행19:5-7). ” 금요일 기도회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선교합시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선교 센터를 준비합시다. 아무리 선교에 대한 비전이 좋아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합니다. 거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신혼의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집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 센터는 선교를 준비하고, 선교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릇입니다. 교회 이상입니다. 교육관 이상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접촉점을 연결하고, 세상 사람들이 출입함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게 합니다. 선교 센터는 공개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땅 끝에 있는 사람이라도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년 후를 대비해야 합니다. 달라지고 변화한 삶을 따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선교 센터는 곧 훈련된 일군들의 몫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선교 센터를 섬길 수 있는 은사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비록 해외 선교지에는 나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선교 센터는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봉사하고 일해야 합니다. 평신도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까 주일만 아니라, 수업이 없는 토요일을 중심으로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문화에 목말랐습니까 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는 준비해야 합니다. 찬양하기 원합니까 찬양의 샘에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터지도록 준비합시다. 가정이 행복합니까 소중한 가정을 도울 수 있는 가정 사역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셀 사역을 준비합시다. 카페와 로비에 모여서 삼삼오오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생각할 때 영적 리더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선교와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 합시다. 중보 기도의 불을 밝힐 기도의 용사로 준비합시다. 선교할 수 있는 훈련과 언어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체육관이나 전문어학원이나 문화센터에서 봉사할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남의 필요를 알고, 남을 섬길 줄 아는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선교 센터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가정과 가정을 연결하는 섬김과 봉사의 네트워크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입니다. 노인 사역을 이해하고 진행할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이나 선교 방송을 운영할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 센터를 통해 추수할 곡식이 많은 세상과 넓은 세상을 바라봅시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것입니까 이 일을 감당할 준비를 합시다.
우리는 단독 주택에서 생활하다가 아파트로 주거 환경을 바꾸었습니다. 버스나 열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이제는 승용차를 주 교통수단으로 삼습니다. 대가족으로 살다가 핵가족으로 삽니다. 최근에는 두 자녀도 아니고 한 자녀, 심지어는 결혼까지 기피해서 출산 장려금까지 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주일도 없이 말 그대로 밤낮 일벌레로 일하다가 이제는 5일 근무제가 정착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가를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유선 전화 시대가 가고 핸드폰과 인터넷이 주도하는 혁명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생존이 아니라 삶의 질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환경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누가 이런 변화를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환경이 변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삽니다. 이 시대의 리더가 됩니다. 세계 선교의 지상 명령을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이 변해야 합니다. 준비합시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멀리 가든 여기에 머물러 있던, 크게 하던 적게 하던, 이제는 우리 앞에 선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우리의 삶에 선교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수많은 영적 자손들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하는 자는 하늘의 별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는 영광스런 미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진합시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멸망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선교하는 삶을 살 때 죽어도 다시 살고, 수백 수천 배의 영적 후손들을 볼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잔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조상부터 섬긴 유대교의 잔재를 떨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했는데, 돌에 맞아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된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스데반은 사도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선을 분명히 그는 분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설교에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이나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성전이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분노해서 돌을 들어 그를 쳤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사건으로 핍박이 노골화 되었고, 믿는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멀리는 다메섹이나 구레네와 구브로까지 피난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다메섹은 사울이 믿는 자는 잡기 위해 달려간 곳으로 유명하고, 구브로는 지금의 사이프러스 섬으로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복음이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로 큰 도시로 헬라 문화가 왕성했습니다.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고, 그 중에 1/7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헬라인에도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20-21). ” 당시 복음은 주로 유대인에게만 제한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헬라인에게 직접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결과로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에도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긴 있습니다.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개종자들로, 할례까지 받아서 완전히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방인들에게 여전히 폐쇄적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제한과 차별이 없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이방인들에게 문을 열고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안디옥 교회는 설립부터 복음의 자유와 개방성이 가득했습니다. 교인들 구성원 자체가 유대이 아니라 헬라인들로 이루었습니다. 안디옥에 부흥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지도자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입니다. 누구보다 헬라인과 헬라문화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바나바를 파송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교회의 출발을 건전하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이 꽃핀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예수 나의 첫 사랑 되시네 내 첫 사랑 지존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 찬양하리 보좌 앞에 나의 삶이 향기로운 제사로 주께 드려지기 원하네 오직 주만 바라보며 나의 삶을 드리네 다른 길은 찾지 않으리 나의 온전한 열정과 나의 찬양 되시네 주의 길을 따라 가리라. ”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모시고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지도자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한만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24절). ” 자기 재산을 구제헌금에 바친 사람이고, 설교를 잘해서 바나바란 이름을 얻은 검증된 지도자입니다. 구브로 출신으로 유대교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지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려와서 동역하였습니다. 만약 바나바의 초청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성경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와서 함께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5-26절). ” 교회는 자생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물을 주고 잘 가꾸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잘 가르치고 잘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강단의 높이만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에는 좋은 지도자가 있고, 잘 훈련된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영적 지도로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인 것을 인정받았습니다. 우상숭배자와 다르고, 세상의 무신론자들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바른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제자로 훈련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교회입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무얼 믿는지 모른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라는 고백과 믿는 것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삶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인정해야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인은 부모 형제보다 교인을 더 사랑합니다. 우리의 윤리적인 기준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높고, 믿는 사람의 양심은 세상의 어떤 법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에 노예 되지 않습니다. 정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참 교인이 되고, 참 교회가 됩시다.
선교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교인이 되고 교회다운 교회를 이루는 것 그 이상의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우리의 마지막 꿈이고 이상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은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첫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헬라인으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가 세계 선교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자 곧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3차에 걸친 바울의 선교를 후원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교회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의 발자취 따라 터키를 여행할 때 안디옥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인천에서 이스탐불로, 이스탄불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서 아데나로 가서 안디옥을 제일 먼저 방문했습니다. 지금은 초라한 시골 동네에 지나지 않지만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태와 같습니다. 죽어도 사시 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교회가 없어져도 없어지는 않는 것이 선교의 열매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선교하는 안디옥 교회는 지금도 살아서 수백 수천 교회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선교를 목적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교회는 둘이 모으든 셋이 모이든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부른 것은 선교를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른 나라들에게 선교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이방에 침략을 당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가장 불순종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온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말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1-3).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땅 끝까지 보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
우리 교회의 사명선언문도 선교를 최종 목적으로 말합니다. “선교지향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한다. ” 말세는 미지근하게 믿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차갑거나 뜨겁게 믿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토하여 지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자랑하지 말고, 너의 벌거벗은 것과 눈 먼 것을 고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부유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열심을 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19-20). ” 전심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영이 살아야 행복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야 신앙생활 잘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소그룹에 충실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개인주의나 전체주의가 아닙니다. 가족이나 공동체입니다.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혼자 고립되어도 안 되고, 그렇다고 군중 속에 고립도 안 됩니다. 나와 네가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 가족 공동체를 맛보아야 합니다. 머리와 팔 다리가 한 몸임을 경험해야 합니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내가 기쁘면 남도 기쁜 지체 의식과 공동의 감각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전인적인 소그룹인 셀과 교제와 봉사를 중심으로 하는 은사소그룹이 있습니다. 소그룹이 살아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퍼져나갈 것입니다. 겨자씨 하나가 큰나무를 이루듯이 소그룹의 생명으로 교회는 진정한 성장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해서,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다리 놓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불신자들을 초청해서 신자로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가 없는 나라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적인 부름입니다. 우리 인생에 여러 소망들이 있지만, 결국에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 선교가 최종 목적입니다. 이 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어떤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 이 복음 전합시다. 복음으로 세워지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일합시다. 선교합시다. 선교에 우리 일생의 목적을 둡시다.
이렇게 준비하라
선교를 어떻게 준비합니까 선교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수다한 무리가 주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힘이 곧 선교의 힘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할수록 선교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차고 넘침으로 소아시아와 에베소와 아테네와 로마까지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산불이 번질 때에는 바람을 타고 불같이 번져갑니다. 복음의 바람, 성령의 강한 바람이 불어야 복음 전파와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가족의 구원을 경험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예수 믿는 즐거움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행복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셀의 부흥과 교회의 참된 성장을 경험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삼천 명 오천 명으로 부흥할 때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선교할 수 있는 재정이 넘쳐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재정적인 뒷받침을 했습니다. 물질적인 헌신은 단순히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믿음이 있는가,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는가에 따라 물질에 대한 헌신이 달라집니다. “형제들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와 선교를 위해서 거룩한 물질로 헌신합시다. 빌 게이츠가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를 진정한 부자로 만든 것은 자선사업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은 물질입니다. 많이는 못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합시다.
선교하기 위해서는 전심으로 기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탄식해서 안 됩니다. 물질적인 헌신도 해야 하고, 영적인 헌신도 해야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을 골고루 다 쓸 수 있으면 좋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4). ” 선교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선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이 임할 때 예루살렘을 넘어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 성령이 임할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여호와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4-46). ” 에베소에 성령의 은사와 충만함이 임할 때 로마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행19:5-7). ” 금요일 기도회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선교합시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선교 센터를 준비합시다. 아무리 선교에 대한 비전이 좋아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합니다. 거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신혼의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작고 아름다운 집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 센터는 선교를 준비하고, 선교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릇입니다. 교회 이상입니다. 교육관 이상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접촉점을 연결하고, 세상 사람들이 출입함으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게 합니다. 선교 센터는 공개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땅 끝에 있는 사람이라도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년 후를 대비해야 합니다. 달라지고 변화한 삶을 따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교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선교 센터는 곧 훈련된 일군들의 몫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선교 센터를 섬길 수 있는 은사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비록 해외 선교지에는 나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선교 센터는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봉사하고 일해야 합니다. 평신도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까 주일만 아니라, 수업이 없는 토요일을 중심으로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문화에 목말랐습니까 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는 준비해야 합니다. 찬양하기 원합니까 찬양의 샘에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터지도록 준비합시다. 가정이 행복합니까 소중한 가정을 도울 수 있는 가정 사역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셀 사역을 준비합시다. 카페와 로비에 모여서 삼삼오오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생각할 때 영적 리더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선교와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 합시다. 중보 기도의 불을 밝힐 기도의 용사로 준비합시다. 선교할 수 있는 훈련과 언어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체육관이나 전문어학원이나 문화센터에서 봉사할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남의 필요를 알고, 남을 섬길 줄 아는 구체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선교 센터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가정과 가정을 연결하는 섬김과 봉사의 네트워크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할 것입니다. 노인 사역을 이해하고 진행할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이나 선교 방송을 운영할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 센터를 통해 추수할 곡식이 많은 세상과 넓은 세상을 바라봅시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것입니까 이 일을 감당할 준비를 합시다.
우리는 단독 주택에서 생활하다가 아파트로 주거 환경을 바꾸었습니다. 버스나 열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이제는 승용차를 주 교통수단으로 삼습니다. 대가족으로 살다가 핵가족으로 삽니다. 최근에는 두 자녀도 아니고 한 자녀, 심지어는 결혼까지 기피해서 출산 장려금까지 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주일도 없이 말 그대로 밤낮 일벌레로 일하다가 이제는 5일 근무제가 정착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가를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유선 전화 시대가 가고 핸드폰과 인터넷이 주도하는 혁명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생존이 아니라 삶의 질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환경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누가 이런 변화를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환경이 변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삽니다. 이 시대의 리더가 됩니다. 세계 선교의 지상 명령을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이 변해야 합니다. 준비합시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멀리 가든 여기에 머물러 있던, 크게 하던 적게 하던, 이제는 우리 앞에 선교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우리의 삶에 선교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수많은 영적 자손들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한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하는 자는 하늘의 별같이 빛난다고 했습니다. 열방이 주께 돌아오는 영광스런 미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진합시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멸망하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왕성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선교하는 삶을 살 때 죽어도 다시 살고, 수백 수천 배의 영적 후손들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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