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구브로 선교
본문
안디옥에 가면 '하비브 나자르'란 산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목수를 사랑하는 자의 산'이란 뜻입니다. 그 산은 서울 남산 만큼이나 큰데, 전체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그리고 산 전체에 몸을 굽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나 있습니다. 그 구멍은 굴로 연결 되는데, 길이가 26Km까지 들어간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굴 안에는 돌로 만든 설교단이 있고, 성도들이 세례 받을 때 쓸 수 있는 물도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길 읽으면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두 사람씩이나 파송한 안디옥 교회의 당시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수를 사랑한 자들이 모여서 예배드린 교회는 바로 이런 굴이었던 것입니다. 교회 건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의 삶 자체가 정함이 없는 나그네였습니다. 물질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목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려 있는 교회는 비록 현실적으로 힘들더라도 선교 사역에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브로 지역은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드린 선교의 성공적인 첫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결실이 있는데는 몇 가지의 조건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1.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0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구브로에 선교사를 보내십니다. 선교사를 보내신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사건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미국에서 한국까지 건너가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얼굴에 페인트를 뿌렸습니다. 나라를 사랑한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참 유별난 일들입니다. 유별나게들 사랑을 표현해요. 몸에 휘발유를 뿌려대서 자살을 하지 않나! 극단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나! 막가는 행동들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나라 사랑을 그렇게 표현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문이 갑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말들이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방의 조그만 나라를 사랑하셔서 많은 선교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사랑하셔서 선교사를 보내주십니다. 구브로가 몇 사람의 선교사로 인하여 얼마나 밝은 땅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악한 사탄의 통치 아래 있던 어두움의 구브로 땅이 몇 사람의 선교사로 인하여 얼마나 밝은 땅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구브로 선교는 구브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성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안디옥 교회가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안디옥 교회가 파송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브로 선교는 위로부터 온(유래) 것입니다.
구브로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구브로 선교는 안디옥 교회로서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구브로 지역 사람들로서도 꿈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브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 선교를 계획하셨고,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추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셨던 것처럼 구브로를 사랑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98장)
2. 교회와 선교사는 순종하였습니다.
0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따로 세우라!" 하셨을 때, 교회는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갔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약 26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외항(外港)입니다. 살라미 -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입니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버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구브로는 마가 요한의 부모의 고향입니다. 구브로는 사울의 가장 절친한 동역자의 고향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구브로를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 사역을 고향에서 시작하신 것처럼, 그들은 복음 사역을 고향에서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은 구브로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중심을 체받아 구브로 선교에 헌신한 선교의 맏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귀하고 순결한 맏물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이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졌을 때, 선교의 결실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집으로서 성령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성도가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움직여질 때, 그것은 성전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0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0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엘루마는 구브로 지역의 어두움의 권세를 대변하는 적 그리스도적 인물이었습니다. 엘루마:(모든 궤계('미끼로 잡다'의 '델로'()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활', '간교', 또는 '올무', '미끼' '거짓 선지자"사기꾼'등의 뜻)와 악행(부주의하고 반(反)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이 가득한 자 . - 마귀의 지식: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습니다. 박수(, 마고스)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릍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불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그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 20:6) 처벌했을 것입니다.
그는 구브로 섬의 총 역량을 동원하여 선교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그가 가진 마술과 그가 가진 기득권과 그가 가진 서기오 바울과의 친분을 사용하여 결사적인 반대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서기오 바울에게 믿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엘루마 -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박수와 동의어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한다.
선교지에는 이와같은 어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형태만 다를 뿐, 여러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난관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선교사들의 사랑도 끊어져서는 안됩니다.
4. 성령께서 승리하셨습니다.
0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구브로 선교는 양 세력의 결전에서 성령의 승리로 결판났습니다. (9회말에 이긴 것을 알고 야구를 보니까 홈런을 맞아도 문제가 안돼. 현재는 깜깜하나 어쨌든 우리는 이길 것이다. 490번 용서할 수 있는 경우란, 부모가 자식의 죄를 용서할 때 가능. 양치는 언덕: '요이찌는 깨끗하다! 왜 아버지가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계시니까! '나오미 이제 오느냐' 아버지는 문이 열릴 때마다. 용서하시는 주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 ) 엘루마는 안개와 어두움에 덮인 소경이 되고 맙니다. 바울의 승리는 바로 성령께서 어두움의 영을 물리침으로 끝을 맺습니다. 빛의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승리에 두 바울이 쓰임받습니다.
1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 사역으로 승리리할 수 있었습니다.
두 선교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에 공급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구브로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함으로 나타납니다. 구브로 섬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구브로 선교는 은과 금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구브로 백성이 사는 길은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계한 이후부터 새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Bengel, Olshausen, Meyer).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Zahn, Lightfoot).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1:23;12:25;13:1)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음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2 서기오 바울은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께 쓰임을 받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0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서기오 바울은 구브로의 총독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지혜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직위나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호의적인 입장에서 서 있었습니다. , 관심을 두었습니다. 측근의 불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바와 사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브로 지역에 찾아 온 선교사들의 말씀에 무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헤롯이나 빌라도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듯이 바울과 바나바의 구브로에서의 선교사역은 그 지역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등뒤로 하고 살다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헤롯이나 빌라도와 달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살핀 후, 보고 믿었습니다. 구브로 지역 선교의 주목할만한 말씀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맺음말
우리는 이 시대에 여전히 일하시는 성령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교회로서 안디옥 교회처럼 이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들려 바울과 바나바처럼 쓰임받기 원합니다.
성령님의 전으로 성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이길 원합니다. 엘로마 같은 난관이 있겠지만, 바울과 바나바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사역하기 원합니다. 서기오 바울 같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음으로 열매를 맺는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이야길 읽으면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를 두 사람씩이나 파송한 안디옥 교회의 당시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수를 사랑한 자들이 모여서 예배드린 교회는 바로 이런 굴이었던 것입니다. 교회 건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의 삶 자체가 정함이 없는 나그네였습니다. 물질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목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열려 있는 교회는 비록 현실적으로 힘들더라도 선교 사역에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브로 지역은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드린 선교의 성공적인 첫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결실이 있는데는 몇 가지의 조건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1. 성령께서 시작하셨습니다.
0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구브로에 선교사를 보내십니다. 선교사를 보내신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사건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미국에서 한국까지 건너가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얼굴에 페인트를 뿌렸습니다. 나라를 사랑한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참 유별난 일들입니다. 유별나게들 사랑을 표현해요. 몸에 휘발유를 뿌려대서 자살을 하지 않나! 극단적인 구호를 외치면서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나! 막가는 행동들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나라 사랑을 그렇게 표현해야만 하는 것인가 의문이 갑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말들이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방의 조그만 나라를 사랑하셔서 많은 선교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사랑하셔서 선교사를 보내주십니다. 구브로가 몇 사람의 선교사로 인하여 얼마나 밝은 땅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악한 사탄의 통치 아래 있던 어두움의 구브로 땅이 몇 사람의 선교사로 인하여 얼마나 밝은 땅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구브로 선교는 구브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성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안디옥 교회가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안디옥 교회가 파송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브로 선교는 위로부터 온(유래) 것입니다.
구브로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구브로 선교는 안디옥 교회로서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구브로 지역 사람들로서도 꿈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브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 선교를 계획하셨고,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추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셨던 것처럼 구브로를 사랑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거듭났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98장)
2. 교회와 선교사는 순종하였습니다.
0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따로 세우라!" 하셨을 때, 교회는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갔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루기아는 안디옥 서쪽 약 26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외항(外港)입니다. 살라미 - 구브로섬 동쪽에 위치한 해안도시입니다.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일은 버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구브로는 마가 요한의 부모의 고향입니다. 구브로는 사울의 가장 절친한 동역자의 고향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구브로를 사랑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 사역을 고향에서 시작하신 것처럼, 그들은 복음 사역을 고향에서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은 구브로를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중심을 체받아 구브로 선교에 헌신한 선교의 맏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귀하고 순결한 맏물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이 성령에 의하여 움직여졌을 때, 선교의 결실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집으로서 성령의 뜻대로 움직여지고, 성도가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움직여질 때, 그것은 성전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0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0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엘루마는 구브로 지역의 어두움의 권세를 대변하는 적 그리스도적 인물이었습니다. 엘루마:(모든 궤계('미끼로 잡다'의 '델로'()에서 유래된 단어로 '교활', '간교', 또는 '올무', '미끼' '거짓 선지자"사기꾼'등의 뜻)와 악행(부주의하고 반(反)신앙적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케하는 것)이 가득한 자 . - 마귀의 지식: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는 총독 관저에서 일하는 유대인으로 그의 신분은 '거짓 선지자 박수'였습니다. 박수(, 마고스)는 당시 마술적 또는 주술적 치료 행위릍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여기에 거짓 선지자라고 덧불여진 점으로 보아 자칭 하늘의 계시자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그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활동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그의 행동에 미혹되었거나 아니면 총독이 그를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를 율법에 따라(레 20:6) 처벌했을 것입니다.
그는 구브로 섬의 총 역량을 동원하여 선교사역을 방해하였습니다. 그가 가진 마술과 그가 가진 기득권과 그가 가진 서기오 바울과의 친분을 사용하여 결사적인 반대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서기오 바울에게 믿지 못하게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엘루마 - 아람어 또는 아랍어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어는 6절에서 언급된 박수와 동의어다. 본래의 뜻은 요술장이 또는 마법사로 통한다.
선교지에는 이와같은 어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형태만 다를 뿐, 여러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난관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선교사들의 사랑도 끊어져서는 안됩니다.
4. 성령께서 승리하셨습니다.
0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구브로 선교는 양 세력의 결전에서 성령의 승리로 결판났습니다. (9회말에 이긴 것을 알고 야구를 보니까 홈런을 맞아도 문제가 안돼. 현재는 깜깜하나 어쨌든 우리는 이길 것이다. 490번 용서할 수 있는 경우란, 부모가 자식의 죄를 용서할 때 가능. 양치는 언덕: '요이찌는 깨끗하다! 왜 아버지가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계시니까! '나오미 이제 오느냐' 아버지는 문이 열릴 때마다. 용서하시는 주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 ) 엘루마는 안개와 어두움에 덮인 소경이 되고 맙니다. 바울의 승리는 바로 성령께서 어두움의 영을 물리침으로 끝을 맺습니다. 빛의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승리에 두 바울이 쓰임받습니다.
1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 사역으로 승리리할 수 있었습니다.
두 선교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브로에 공급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구브로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함으로 나타납니다. 구브로 섬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십니다. 구브로 선교는 은과 금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구브로 백성이 사는 길은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 처음으로 바울(Paul)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로는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된다. 사울이라는 이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서 사울이 회계한 이후부터 새사람된 표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Bengel, Olshausen, Meyer). 오히려 바울이라는 이름을 본래부터 갖고 있었는데 서기오 바울을 만난 이후부터 저자가 사울을 로마식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Zahn, Lightfoot).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유대식 이름 외에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1:23;12:25;13:1) 특히 사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므로(22:28) 로마식 이름을 가졌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바울이라는 사울의 로마식 이름을 이제야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제 비로소 사울이 이방선교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이방 지역에서는 로마식 이름으로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여질 것이고 설교에도 도음이 되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2 서기오 바울은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께 쓰임을 받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0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서기오 바울은 구브로의 총독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지혜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직위나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열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루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호의적인 입장에서 서 있었습니다. , 관심을 두었습니다. 측근의 불경건한 술수를 물리치고 바나바와 사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브로 지역에 찾아 온 선교사들의 말씀에 무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헤롯이나 빌라도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듯이 바울과 바나바의 구브로에서의 선교사역은 그 지역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등뒤로 하고 살다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헤롯이나 빌라도와 달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살핀 후, 보고 믿었습니다. 구브로 지역 선교의 주목할만한 말씀의 열매가 되었습니다.
맺음말
우리는 이 시대에 여전히 일하시는 성령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교회로서 안디옥 교회처럼 이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들려 바울과 바나바처럼 쓰임받기 원합니다.
성령님의 전으로 성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회이길 원합니다. 엘로마 같은 난관이 있겠지만, 바울과 바나바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사역하기 원합니다. 서기오 바울 같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음으로 열매를 맺는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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