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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선교는 믿음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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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한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사랑이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부부간의 사랑이겠습니까 아니면 형제간의 사랑이겠습니까 아니면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이겠습니까
2000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에게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남북 이산가족이 평양에서 만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신청했지만 그중 200명이 선발 되었고 그 중에도 138명이 생사를 확인하여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자식이 부모를 만나게 되는 가족이 딱 한 가족 있는데 71세 된 아들이 109세 된 어머니와의 만남입니다. 또 형제지간도 많이 만나는 것 같습니다. 또 부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만나는 것은 효도이고, 형제가 만나는 것은 사랑이고, 부부를 만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부부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산가족의 만남을 보면서 걱정되는 부분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북에서 처와 자식을 놓고 온 사람이 남한에 와서 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살았는데 50년 동안 숨겨 살다가 이번에 비로소 그 사실을 실토하고 만나겠다고 한다면 만나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잘 이해되면 좋겠습니다만 염려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염려는 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은 더 깊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염려되는 문제를 감수하고서라도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부모된 입장에서 자식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실 부부문제가 있어서 이혼을 결심하다가도 자식 때문에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미국에 계시던 어느 목사님은 50년만에 북한에 가서 자식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50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날, 많은 선물을 싸 가지고 찾아가서 반가와 "OO야! , OO야!" 하면서 이름을 부르지만 자식들은 그저 냉담한 표정만 보였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들들의 반응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어 차에 타는데 뒤에서 "아버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반가워서 책임자에게 울면서 사정을 했습니다. "제가 너무나 듣고 싶었던 소리였는데 이제야 불러 주었습니다. 제발 하루만 더 있다 가도록 도와 주십시오. " 아버지와 아들들은 그간의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왜 내게 그렇게 냉담했느냐, 내가 보고싶지도 않았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아버지를 보고싶은 마음보다는 저희가 너무 고생을 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아버지를 너무나 그리워 했습니다. "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풀려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 이산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가 자식을 향한 마음이 저렇게 크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저는 이 부모의 자식사랑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도 보십시오.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립니다. 자식이 어떤 형편인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자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죽어가는 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세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구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 생명이 얼마나 천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도 북한에서 굶어 죽어가는 우리의 동족들을 보십시오. 얼마 전에도 북한에 다녀왔던 분의 얘기를 들으면 엄마들이 아기를 낳아 기르지 못하니 내다 버린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이 경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생명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도록 세계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하시며 이 세계를 가슴으로 품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조그만 팔레스타인 땅에 산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철저한 민족주의자인지 자기 민족 아닌 다른 민족은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이방인은 다 개"라고 칭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주님,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세상을 사랑했던 비전도 사라졌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도록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을 보내신 이유도 세계를 가슴에 품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사역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연장선 상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계속되도록 주의 몸 된 교회를 남겨 놓으셨는데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확장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교회는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이 가지신 세상을 향한 사랑, 주님이 가지셨던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세계 선교의 비전을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 성경은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진 안디옥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역사를 알고 그 일을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보다 더 큰 교회, 예루살렘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안디옥 교회보다 지도자들도 많았고 컸습니다. 베드로는 한번 전도를 하면 삼천명에서 오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성령받은 120문도가 있었습니다. 구제도 많이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교회에게 맡기지 않고 그보다 아주 작은 안디옥 교회에 세계 선교의 사역을 맡기셨을까요 그러나 한편으로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큰 교회를 통해서만 역사하지 않으시고 작은 교회일지라도 바르게 선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쓰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1. 큰 마음을 가진 교회가 선교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교회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교사들이고 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나바는 유대인이며 귀족출신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땅을 바칠만한 부자였던 사람입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즉 니게르라는 말은 얼굴이 검은 흑인을 뜻하는 것으로 시므온이 흑인이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 구레네도 북 아프리카의 지명으로 루기오도 시므온과 같이 흑인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안디옥 교회는 상당수의 흑인이 있었고 이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헤롯 왕의 친동생은 아니지만 가끔 유모의 젖을 빨던 동생으로 귀족의 신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안디옥 교회는 귀족들과 서민들, 흑인들까지 함께 모여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헌신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입니다. 누구보다 정통 유대인이며 부자집 자녀로 많이 배운 사람이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주님께 헌신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디옥 교회의 인물들을 보면서 한가지 느끼게 되는 것은 여러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어 하나를 이루어 가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안디옥 교회가 정말 큰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규모 면에서가 큰 교회가 아니라 큰 마음을 가진 교회라는 뜻입니다.
책을 많이 쓰신 "워치만 니"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그분의 일화 가운데 유명한 두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 그 중 한가지입니다. 목사님에게 문제가 생겨서 여호와 하나님께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꿈으로 보여 주신 내용입니다.
큰 강이 있었습니다. 배가 지나가는데 커다란 바위 때문에 도저히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강에 물을 부어 주셨는데 그 바위보다 더 높은 수위를 가지도록 물을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이 없을 때는 바위에 걸려 배가 나가지 못하는데 물이 많아져 바위를 덮으니 배는 그 위를 유유히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목사님에게는 높은 산 위에 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작물이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산 위까지 물을 길러 날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물을 길러 놓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을 길러 놓으면 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밑에 사는 땅 주인이 물을 한번도 기르지 않고 뚝을 터트려 목사님이 길러 놓은 물을 다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은 모두 밑으로 흘러 목사님의 땅에 작물은 자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여 목사님은 아래 땅 주인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그러나 그 땅 주인은 잘못없다고 얘기할 뿐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문제 때문에 기도하던 중 여호와 하나님께서 위와 같은 꿈을 주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문제의 바위를 뽑을까 아니면 더 은혜를 줄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물을 길러다가 아랫집 논에 먼저 붓고 난 후 자신의 논에 물을 부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랫 땅 주인이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큰 마음의 증거입니다. 이런 마음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이 일을 통해 하나됨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이런 큰 마음은 이들의 사역, 즉 전도와 교육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분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지식차이가 있어도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숙제는 하나됨에 있습니다. 유엔이 있고, G8정상회담, 세계올림픽 등이 있는 이유는 하나가 되자는 뜻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여 경제문제를 논하고 군사문제를 논하고 운동을 같이 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주시지 않으면 안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전도하고 교육하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게 내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도자는 두 가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가지는 선지자이고 한가지는 교사의 역할입니다. 선지자는 예언자의 뜻이 아니라 전도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사는 성경교사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한다면 좁은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억울해도 참고 희생하지 않으면 절대로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전도자의 마음속에는 큰 마음이 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이 비록 없다고 할지라도 큰 마음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없으면 마음조차 좁아지기 쉽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속에는 큰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가 목표이기에 참고,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전도받아 온 사람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습이 천태만상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가르쳐서 그리스도인을 만들려면 넓은 가슴이 없이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되는 비결, 여호와 하나님의 큰 사역을 감당하는 비결,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세우셨다는 교회가 되는 비결을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전도하는 일과 교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과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가정에서 살아보십시오. 누가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전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 가정으로 시집보내셨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 사람을 만나게 하셨는가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전도하려는 넓은 마음없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내게 주어진 시험이 커다란 바위라고 할지라도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그를 감싸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승리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또한 교사의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그럴수도 있지"하면서 그를 설득하고 사랑하고 가르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큰 교회입니다. 큰 마음을 가진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비록 작지만 이런 큰 마음을 가질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선교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은 좁은 마음입니다. "목사님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전도되지 않았는데 외국에까지 가서 전도합니까 우리나라에도 도와 줄 사람이 많은데 외국에까지 도와주어야 합니까 우리도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데 북한 주민을 걱정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만약 안디옥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이런 마음으로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은 순서의 개념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인 개념입니다. 제가 전쟁을 해 보지 않았지만 생각은 됩니다. 한 곳에서 승리를 할때까지 기다렸다가 승리하면 다른 곳으로 나아갑니까 힘이 약할수록 게릴라 전으로, 여기서 싸우고, 저기서 싸우면서 적을 교란시켜야 하듯이 복음도 이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큰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2. 기도하는 교회가 선교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
두 가지 내용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한 것과 성령의 계시를 받아 성령의 역사에 순종했음을 말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에게 선교사를 세우고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이 심부름을 보냅니다. 그런데 심부름을 보낼때 '다른 아이들은 쉬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가는구나'하고 푸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 수업을 들어오셨는데 출석부를 챙기지 못하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시킵니다. "얘 너 교무실에 가서 출석부 좀 가져 오너라" 평소에는 교무실 근처에도 가지 않던 아이는 교무실 문을 활짝 열더니 뚜벅뚜벅 걸어가서 출석부를 꺼내 듭니다. 옆에서 다른 선생님이 묻습니다. "얘 너는 누군데 그것을 가져가니" 아이는 목에 힘을 주고 크게 대답합니다. "저희 선생님이 가져오라고 시키셨습니다. " 남들은 모두 공부하고 앉아 있는데 그렇게 교무실까지 다녀와도 뿌듯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어도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 그래도 선생님이 나를 믿으시는구나' 라는 것 때문 아닙니까 선생님이 나를 믿어 주고 신뢰한다는 것이 그 마음에 큰 기쁨이 되어서 일도 재미있는 것입니다. 고생스럽다거나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안디옥 교회에 계시를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을 따로 세워서 복음 선교를 위해 보내라고 하십니다. 선생님이 어느 학생을 어떤 이유로 신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에게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주님을 섬기는 운영의 방식은 금식과 기도였습니다. 법대로, 경험대로가 아닙니다. 늘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금식은 밥을 굶는 것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기도하고 대화하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에는 죽어도 좋다는 것이 금식기도입니다. 식사시간까지 아까워 기도하는 것이 금식기도입니다. 특히 주를 섬기는 일에 기도했습니다. 주를 섬긴다는 것은 봉사와 예배입니다.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금식기도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봉사를 왜 못하십니까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못하십니까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주를 향해 봉사하는 일에도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는 나중 문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맡기셨는데 저는 이 일을 감당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고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 전에 안 되는 말부터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에도 금식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이 자리에 오시기 전에 금식하신 분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금식을 하고 기도하면서 이 자리에 오셨다면 여러분은 어느 때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이 말씀을 통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봉사하기 위해, 예배하기 위해 기도하는 성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도하는 일을 더 잘해야 할 줄로 압니다. 안디옥 교회는 기도 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우연한 가운데 번개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시간도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성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하는 동안에 세계 선교의 비전을 깨닫고 감당하는 능력까지 받은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일하기 전에도 기도했고 일하고 나서도 기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절대로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주님도 큰 일을 감당하실 때 언제나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12제자를 세우셨을 때 먼저 밤새 기도하셨고,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에도 먼저 기도했고, 메사야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에도 먼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보다 앞설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일도, 예배 드리는 일도 기도하지 않고 할 때에는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생활의 출발점이고 모든 일을 끝내는 종지부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의 과정을 이끌어 가는 능력이 기도 속에 있습니다. 특별히 금식하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과 위로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성령이 지시하시는 일은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3절에"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라고 하시니 아무런 이유 없이 즉시 안수기도하고 파송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큰 결단이었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세워진지 1년 밖에 안된 아주 햇병아리 교회였습니다. 그것도 이방지역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큰 기둥인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세워질 때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양적 부흥에 질적 성장을 위해 초빙된 사람이 사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그 후에 안디옥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라고 하신 말씀은 대단히 어려운 주문입니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 우리는 더 배워야 하고 더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도 짓고 교육관도 짓고 주차장도 마련해야 합니다 더 큰 교회에게 시켜보세요"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 여러분이 처해 있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아무런 이유 없이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세계 선교를 시작한 교회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금식하고 기도하고.. "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이런 일도 마땅히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틀림없는 진리이고 가장 잘 하는 일입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고 손해 보는 일 같아도 주를 섬기는 일에 더욱 충성하고 기도하므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란서 파리 어느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헌금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아마 접시에 헌금을 했나 봅니다. 그러니 누가 얼마를 한지 알았고 혹은 큰 돈을 내고 거슬러 갈 수도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한 맹인이 1프랑 헌금하기도 어려운데 자그마치 27프랑을 헌금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큰 돈을 헌금할 수 있습니까" 맹인은 대답했습니다. "제가 어느 사람에게 물어보니 한 사람이 1년 동안 전기 불을 밝히는데 27프랑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불 켤 이유가 없으니 27프랑을 저축할 것을 예상하고 모아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이 비추도록 하고 싶어서 이 헌금을 드립니다" 돈있는 사람이 헌금하고 희생하고, 순종하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주를 섬겨 금식기도 하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안디옥 교회가 일을 맡은 것입니다. 충성은, 순종은, 헌신은 부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도하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교사가 되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주간에 우리의 젊은이 12명을 태국으로 단기선교훈련으로 보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이 있으리라고 생각 되지만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재정능력이 있어야 되고 넉넉해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물질은 선교하는데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하려는 의지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기도하고 불신자를 위해 전도하고 가르치겠다는 것이 선교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선교는 기도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중국, 북한에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협력선교를 해 왔습니다. 가지는 않았지만 보내는 선교사로서 후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헌금을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단기선교훈련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태국의 치앙마이와 방콕으로 세계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비록 이들이 하는 일은 작은 일일런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가는 선교사의 시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에 크신 복과 은혜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보다 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교회로 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가든지 보내든지, 사역을 감당하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큰 교회로 세워져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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