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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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키스탄 의료선교를 일주일 남겨놓고 있습니다.
선교현장에서 의료선교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 로버트 모페드(Robert Moffat, 아프리카에서 사역한 스코틀랜드 선교사)는 "의료 선교는 선교사 몫의 하나 반이다"라고 했습니다.
칼바르트는 교회의 궁극 목적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지 아니하면 많은 것들 중에 한가지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하는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
흔히 교회의 기능을 말하면서 선교, 교육, 친교, 봉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선교에 대한 오해이다. 교회가 교육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봉사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선교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교회의 한 프로그램이 되어서는 안된가는 것입니다.
또 교회의 모든 사역을 선교적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선교를 위한 교육, 선교를 위한 봉사, 선교를 위한 친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이 선교의 목적을 바르게 이루기 위해 균형있게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명령인 선교에 대해 눈을 뜨고 이 일에 온 성도들이 힘을 모으는 것을 보며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키르키스탄 의료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계속되어 발전되고 전문화되어 더욱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놀랍게 성장을 하고 한국의 선교도 세계적 수준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고,
세계복음주의협의회 신학위원장인 Dr. Peter Kuzmich는 최근 "19세기는 영국 시대, 20세기는 미국 시대라고 말한다면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 교회의 주도적 역할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시아는 지구 육지 면적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세계인구 60억 중에 30억 즉, 세계인구의 1/2이 아시아에 살고 있다. 인구20억의 중국, 9억의 인도가 아시아에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 중에 우리 한국은 아시아와 온 세계에 10,000명에 달하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세계제 2위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선교는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선교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해서 선교를 교파와 교회의 세력 확장 정도로 생각하거나 선교의 힘을 '돈'의 힘으로 착각하는 현상들이 남아 있습니다. 또 선교를 교회의 한 프로그램으로 착각하는 경향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주목적으로서 선교체질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교를 위한 교회의 역할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요 원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선교는 종말론적 믿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면 주님이 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종말론이다'-마틴 로이드죤스-
롬11;25-26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종말이 오니까 무서워서 선교하자는 것도 아니요. 무조건 때가 오면 주님이 오시겠지 하는 진화론적 여호와 하나님나라 도래 사상도 옳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생각으로 이 일에 동참에 해야 합니다.
마24:14 "이 천국복음이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전파해야 한다는 말씀) 그제야 끝이 오리라"
내가 복음을 전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때와 시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며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선교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과거 어느때 보다 교회는 모든 국가와 많은 문화권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네팔 역시 교회가 있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경우도 교회가 전혀 없는 곳은 아닙니다.
중동의 이슬람권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4. 6%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나라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참된 의미에서 범 세계적인 교회(Global Church)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은 점점 닥아오고 있습니다. 주님 재림을 두려워 하고 무서워하여 하는 피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주님의 그날을 준비하고 그날을 위해 일하는 선교 일군이 되어야 할 것이며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선교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2. 어린 선교사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사 모집시기가 대체로 늦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청년시기에 모집하는 것은 늦습니다.
선교학자 Ralph Winter도 "우리가 너무 늦다 건축가를 만든 다음에 선교사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 늦다"고 했다. 좀더 일찍부터 선교지 현지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유리하겠는가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사역할 때 십대 후반이었고, 우리나라에 와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죽을 때 27세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도 26세의 나이에 인천 앞바다에 발을 디뎠습니다.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는 25세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대개 한국 선교사의 경우 이것 저것을 하다보면 30이 넘어가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나면 30중반이 지납니다. 상당히 늦게 됩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선교사 비젼을 가지고 기도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능력있고 사명에 불타는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3. 선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선교는 한두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하나되었을 때 가능했던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천인 출신과 귀족 출신이 하나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양성 속에 일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지체는 서로 다 귀합니다. 누가 덜 귀하고 누가 더 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귀한사람, 덜 귀한 사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되는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되지 않는 교회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작은 일 하나를 할려고 해도 방해꾼이 있습니다. 또 그런 방해꾼이 두려워 담대하게 일하지를 못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네 파가 있었고 무슨 일을 할려고 하면 자존심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개척자 바울파에서 한마디합니다. 이것을 못봐주는 현 목회자 아볼로파에서 한마디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예수님의 직제자 베드로파에서 참다못해 한마디합니다. 이렇게 인간중심적으로 당을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본 그리스도파에서 충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아수라장이되고 기분들이 다 상해 있습니다. 모두들 '다음부터 교회일 하나보자'라고들 말합니다.
이런 교회는 성령님이 일하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도 듣지 않습니다. 귀들이 다 막혀버린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모두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며,서로 용납하며,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성령께서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4. 선교하는 교회는 성령께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전쟁은 군인들이 하지만 이를 주도하는 이는 명령자이듯이 선교에도 성령께서 주도하시어 교회를 통해 이루십니다.
사도행전13:1-4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가 주님을 예배할 때 성령께서 영적 지도자들에게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이란 곧 선교를 가르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입니다.
이 명령은 교회가 뜨겁게 기도할 때 하시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온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하므로 성령의 능력가운데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를 섬겨"라는 말씀을 보면 유대적인 금식과 다른 금식임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율법에 규정하고 있습니다(레16:29-31:23)
유대인들의 금식은 국가적인 차원의 금식이고 다분히 형식적인 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금식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금식은 주님의 명령을 쫓아 영혼 구원을 위해 온 성도들이 한 마음 되어 기도하는 하나의 영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령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무십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게도 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잠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명령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업을 계획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도 주장하시고 선교현장에도 주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순수히 성령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라 가려 할 때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시고 유럽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행16:6-10).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령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그의 일을 하시도록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면 항상 성령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5. 선교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선교를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는 선교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와 선교단체와 협력하기 보다 단독적인 사역을 더 보람있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단독 선교를 표방하는 것은 교회규모가 클수록 더 큰 유혹이 된다.
어떤 선교 전문가는 "20세기의 선교가 서구중심의 실내악정도의 수준이었다면 21세기의 선교는 오케스트라 수준의 조율과 하모니를 요청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모니는 단순히 선교의 하나의 방법론이 아니라 선교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교회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 소산물인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도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교회가 이일에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협력은 선진 선교를 위한 필수적인 덕목이다.
롬16:25-26에 '과거에는 숨겨 있다가 내가 받은 복음의 비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구원받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도 이것을 깨닫고 선교에 쓰여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동역자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롬16: 에 보면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이들이 무릎 선교사들입니다. 기도동역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기도로 선교의 동역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 대각성 운동(1741)기간에 회심하고 침례교 대 설교가가 된 빠카스(Isaac Backus)박사는 임종시에 주치의사에게 내가 살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의사의 말이 30분밖에 안남았다고 하니까 나는 남은 30분을 세계의 구원을 얻지 못한 영혼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며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운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선교를 위해 10분이라도 기도에 투자해 주십시요.
보어(Harry. R. Boer)는 "다락방 전에는 선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령의 생명력을 퍼뜨릴 성령이 아직 임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18:18-20)
제자는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부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는가 바로 다락방에서 부터였다. 다락방 이전의 무능했고 무력했고 무지했던 그들이 이곳 저곳에 가서 영혼 구원의 불꽃을 점화시켜 세상을 시끄럽게(소동) 하였습니다.
선교는 물질로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전도 헌금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고 했습니다(빌4:18).
선교헌금만 보내면 큰일을 한 것처럼 자축하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 어린아이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보내는 선교사가 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6. 보내는 선교사에게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보내는 선교사들에게도 똑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보내는 선교사들이 선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돈만 보내는 선교를 할 때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포스터는 "그리스도가 "가라"한 것을 교회는 이기심과 무관심 때문에 "쓰라" "보내라" "주라"로 대치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교의 개념이 모금 활동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만큼 너무나 값싸게 취급되고 있다. 선교라는 것이 일 년 예산을 위한 캠페인이나 건축 기금 운동처럼 단지 돈을 모으기 위한 또 하나의 호소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 라고 지적합니다.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빨리 빨리' 거두려는 선교적 사행심이 생기게 되고 선교사들은 이런 교회들 때문에 실적주의, 보고서 중심의 선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가 과업지향성(task-orientation)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외화내빈(외적으로는 화려 내적으로는 빈약)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활동은 많은데 복음을 나타내지 못할 때 열매가 없게 됩니다.
얼마전 복음주의 선교계간지(Evangelical Missions Quartly)는 "미전도 종족이 왜 미전도 상태로 남아 있는가"(Why are the unreached unreached)라는 논문을 통해 그 주범을 추수지향성(harvest mentality)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남아있는 과업은 추수지가 아니라 아직 씨도 뿌리지 않은 불모지가 대부분입니다. 불모지를 개간하고 먼 훗날의 결실을 바라보며 힘써 파종하고 묘목을 심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 그것은 많은 고난과 땀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적주의의 눈으로 보아서는 답답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보내는 선교사도 알고 보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또 본국에 남아 선교사를 지원해야 하는 선교사는 나가는 선교사 보다는 훨씬더 많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안에 무릎 선교사를 많이 확산 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직접가든 간접으로 하든 선교를 필수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종로교회는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 한 마음이 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 선교의 동역이 있는 교회, 선교훈련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현장에서 의료선교가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 로버트 모페드(Robert Moffat, 아프리카에서 사역한 스코틀랜드 선교사)는 "의료 선교는 선교사 몫의 하나 반이다"라고 했습니다.
칼바르트는 교회의 궁극 목적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지 아니하면 많은 것들 중에 한가지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하는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
흔히 교회의 기능을 말하면서 선교, 교육, 친교, 봉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선교에 대한 오해이다. 교회가 교육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봉사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선교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가 교회의 한 프로그램이 되어서는 안된가는 것입니다.
또 교회의 모든 사역을 선교적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선교를 위한 교육, 선교를 위한 봉사, 선교를 위한 친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다양한 사역들이 선교의 목적을 바르게 이루기 위해 균형있게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여호와 하나님 명령인 선교에 대해 눈을 뜨고 이 일에 온 성도들이 힘을 모으는 것을 보며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키르키스탄 의료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계속되어 발전되고 전문화되어 더욱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놀랍게 성장을 하고 한국의 선교도 세계적 수준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21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고,
세계복음주의협의회 신학위원장인 Dr. Peter Kuzmich는 최근 "19세기는 영국 시대, 20세기는 미국 시대라고 말한다면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 교회의 주도적 역할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아시아는 지구 육지 면적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는 세계인구 60억 중에 30억 즉, 세계인구의 1/2이 아시아에 살고 있다. 인구20억의 중국, 9억의 인도가 아시아에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아시아 중에 우리 한국은 아시아와 온 세계에 10,000명에 달하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세계제 2위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선교는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선교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해서 선교를 교파와 교회의 세력 확장 정도로 생각하거나 선교의 힘을 '돈'의 힘으로 착각하는 현상들이 남아 있습니다. 또 선교를 교회의 한 프로그램으로 착각하는 경향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주목적으로서 선교체질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교를 위한 교회의 역할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요 원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1. 선교는 종말론적 믿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면 주님이 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종말론이다'-마틴 로이드죤스-
롬11;25-26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종말이 오니까 무서워서 선교하자는 것도 아니요. 무조건 때가 오면 주님이 오시겠지 하는 진화론적 여호와 하나님나라 도래 사상도 옳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생각으로 이 일에 동참에 해야 합니다.
마24:14 "이 천국복음이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전파해야 한다는 말씀) 그제야 끝이 오리라"
내가 복음을 전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때와 시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며 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선교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과거 어느때 보다 교회는 모든 국가와 많은 문화권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네팔 역시 교회가 있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경우도 교회가 전혀 없는 곳은 아닙니다.
중동의 이슬람권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4. 6%의 기독교인들이 있다. 나라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참된 의미에서 범 세계적인 교회(Global Church)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말은 점점 닥아오고 있습니다. 주님 재림을 두려워 하고 무서워하여 하는 피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고 주님의 그날을 준비하고 그날을 위해 일하는 선교 일군이 되어야 할 것이며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선교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2. 어린 선교사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사 모집시기가 대체로 늦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청년시기에 모집하는 것은 늦습니다.
선교학자 Ralph Winter도 "우리가 너무 늦다 건축가를 만든 다음에 선교사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 늦다"고 했다. 좀더 일찍부터 선교지 현지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유리하겠는가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사역할 때 십대 후반이었고, 우리나라에 와선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죽을 때 27세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도 26세의 나이에 인천 앞바다에 발을 디뎠습니다.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는 25세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대개 한국 선교사의 경우 이것 저것을 하다보면 30이 넘어가고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나면 30중반이 지납니다. 상당히 늦게 됩니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선교사 비젼을 가지고 기도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도 능력있고 사명에 불타는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3. 선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선교는 한두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하나되었을 때 가능했던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천인 출신과 귀족 출신이 하나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양성 속에 일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의 지체는 서로 다 귀합니다. 누가 덜 귀하고 누가 더 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귀한사람, 덜 귀한 사람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되는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되지 않는 교회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작은 일 하나를 할려고 해도 방해꾼이 있습니다. 또 그런 방해꾼이 두려워 담대하게 일하지를 못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네 파가 있었고 무슨 일을 할려고 하면 자존심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개척자 바울파에서 한마디합니다. 이것을 못봐주는 현 목회자 아볼로파에서 한마디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예수님의 직제자 베드로파에서 참다못해 한마디합니다. 이렇게 인간중심적으로 당을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본 그리스도파에서 충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아수라장이되고 기분들이 다 상해 있습니다. 모두들 '다음부터 교회일 하나보자'라고들 말합니다.
이런 교회는 성령님이 일하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도 듣지 않습니다. 귀들이 다 막혀버린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모두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며,서로 용납하며,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성령께서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4. 선교하는 교회는 성령께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전쟁은 군인들이 하지만 이를 주도하는 이는 명령자이듯이 선교에도 성령께서 주도하시어 교회를 통해 이루십니다.
사도행전13:1-4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가 주님을 예배할 때 성령께서 영적 지도자들에게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 이란 곧 선교를 가르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입니다.
이 명령은 교회가 뜨겁게 기도할 때 하시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온 교회가 금식하며 기도하므로 성령의 능력가운데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를 섬겨"라는 말씀을 보면 유대적인 금식과 다른 금식임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율법에 규정하고 있습니다(레16:29-31:23)
유대인들의 금식은 국가적인 차원의 금식이고 다분히 형식적인 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금식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의 금식은 주님의 명령을 쫓아 영혼 구원을 위해 온 성도들이 한 마음 되어 기도하는 하나의 영적 운동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령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무십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게도 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을 잠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명령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업을 계획하시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도 주장하시고 선교현장에도 주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순수히 성령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라 가려 할 때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시고 유럽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행16:6-10).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령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그의 일을 하시도록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면 항상 성령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5. 선교에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선교를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는 선교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와 선교단체와 협력하기 보다 단독적인 사역을 더 보람있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단독 선교를 표방하는 것은 교회규모가 클수록 더 큰 유혹이 된다.
어떤 선교 전문가는 "20세기의 선교가 서구중심의 실내악정도의 수준이었다면 21세기의 선교는 오케스트라 수준의 조율과 하모니를 요청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모니는 단순히 선교의 하나의 방법론이 아니라 선교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될 것이다.
교회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 소산물인 선교단체들과 선교사들도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교회가 이일에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협력은 선진 선교를 위한 필수적인 덕목이다.
롬16:25-26에 '과거에는 숨겨 있다가 내가 받은 복음의 비밀, 곧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구원받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도 이것을 깨닫고 선교에 쓰여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동역자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롬16: 에 보면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이들이 무릎 선교사들입니다. 기도동역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기도로 선교의 동역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 대각성 운동(1741)기간에 회심하고 침례교 대 설교가가 된 빠카스(Isaac Backus)박사는 임종시에 주치의사에게 내가 살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의사의 말이 30분밖에 안남았다고 하니까 나는 남은 30분을 세계의 구원을 얻지 못한 영혼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며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운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선교를 위해 10분이라도 기도에 투자해 주십시요.
보어(Harry. R. Boer)는 "다락방 전에는 선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령의 생명력을 퍼뜨릴 성령이 아직 임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18:18-20)
제자는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부른 자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는가 바로 다락방에서 부터였다. 다락방 이전의 무능했고 무력했고 무지했던 그들이 이곳 저곳에 가서 영혼 구원의 불꽃을 점화시켜 세상을 시끄럽게(소동) 하였습니다.
선교는 물질로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전도 헌금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고 했습니다(빌4:18).
선교헌금만 보내면 큰일을 한 것처럼 자축하고 스스로 위안을 받는 어린아이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보내는 선교사가 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6. 보내는 선교사에게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보내는 선교사들에게도 똑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보내는 선교사들이 선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돈만 보내는 선교를 할 때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포스터는 "그리스도가 "가라"한 것을 교회는 이기심과 무관심 때문에 "쓰라" "보내라" "주라"로 대치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교의 개념이 모금 활동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만큼 너무나 값싸게 취급되고 있다. 선교라는 것이 일 년 예산을 위한 캠페인이나 건축 기금 운동처럼 단지 돈을 모으기 위한 또 하나의 호소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 라고 지적합니다.
작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빨리 빨리' 거두려는 선교적 사행심이 생기게 되고 선교사들은 이런 교회들 때문에 실적주의, 보고서 중심의 선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가 과업지향성(task-orientation)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외화내빈(외적으로는 화려 내적으로는 빈약)의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활동은 많은데 복음을 나타내지 못할 때 열매가 없게 됩니다.
얼마전 복음주의 선교계간지(Evangelical Missions Quartly)는 "미전도 종족이 왜 미전도 상태로 남아 있는가"(Why are the unreached unreached)라는 논문을 통해 그 주범을 추수지향성(harvest mentality)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남아있는 과업은 추수지가 아니라 아직 씨도 뿌리지 않은 불모지가 대부분입니다. 불모지를 개간하고 먼 훗날의 결실을 바라보며 힘써 파종하고 묘목을 심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 그것은 많은 고난과 땀과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실적주의의 눈으로 보아서는 답답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보내는 선교사도 알고 보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또 본국에 남아 선교사를 지원해야 하는 선교사는 나가는 선교사 보다는 훨씬더 많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안에 무릎 선교사를 많이 확산 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직접가든 간접으로 하든 선교를 필수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종로교회는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 한 마음이 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 선교의 동역이 있는 교회, 선교훈련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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