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사역의 청사진
본문
이제 바야흐로 그 유명한 바울의 전도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전도 여행을 했는데 오늘 본문이 그 모든 전도 여행의 첫 걸음입니다.
앞에서 빌립도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만 그때 빌립은 교회에서 파송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을 피하다 보니 사마리아에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까지 간 김에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에 선교적인 비전이 있어서 빌립을 그리로 파송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다릅니다. 처음부터 선교적인 비전이 있어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에 의해서 정식으로 파송된 첫 번째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사람을 파송한 것은 안디옥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라고 얘기합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선택된 것도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택해서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는 것 같지만 이 모든 일을 기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개교회주의가 무척 강합니다. 무조건 ‘우리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를 부끄러워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나가던 교회니까 안 나갈 수 없어서 나가기는 나가는데,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는 말 한 마디도 못하는 것은 옆에서 보기에도 답답하게 보입니다.
제가 교회 개척을 시작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 중의 하나가 그런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자랑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도 제가 다니는 교회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 고민과 갈등 끝에 신학을 시작하면서,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점이 “와, 이제는 떳떳하게 교회를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교회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 저에게 상당한 매력이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누군가가 당시 이런 제 마음을 안다면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옮기면 되지, 왜 고민하느냐”고 할 것입니다만, 교회를 옮기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때 저는 그 교회에서 집사 안수를 받은 항존직이었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고 주일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꼬박꼬박 나가면서 속으로는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더구나 청년들이 찾아와서 불만을 얘기하면 저 역시 속으로는 그들의 불만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 비단 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불만을 안으로 삭히면서 “지금은 동네 눈치가 있으니까 교회를 옮길 수 없지만 이사만 가면 교회를 옮긴다”는 마음으로, 교회 옮길 핑계를 찾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는 다니던 교회니까 그냥 나가지만 자식들은 바람직한 신앙 교육을 위해서 다른 교회에 보낸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우리 교회 만큼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는 어차피 자기가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것이지, 강제로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마지못해서 억지로 다니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지나쳐서 ‘우리 교회만’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매일반입니다. ‘우리 교회를’ 얘기해야지, ‘우리 교회만’ 얘기하는 것은 분명히 비정상입니다.
혹시 이 다음에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면 제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멀리 이사 간 사람에게 굳이 우리 교회로 나오라고 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교회는 자기가 신앙 생활하는데 가장 적합한 교회를 자기가 선택하면 됩니다.
모순 같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선택한 교회가 기왕이면 우리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멀리 이사 갔으면 무리해서 나오지 말고 근처에 있는 적당한 교회를 택해서 신앙 생활하라고 얘기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 교회는 계속 나오고 싶은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행13:4-5)
안디옥을 출발한 바울과 바나바가 지중해변에 있는 항구 도시 실루기아에 가서 배를 타고 구브로(키프로스)로 갔습니다. 바나바가 바로 구브로 섬 출신입니다. 먼저 구브로의 수도인 살라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만들었는데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흔히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합니다만 그 역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복음의 배경이 되는 구약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고 했는데 이 요한을 마가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린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요한의 집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요한을 바나바의 조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그런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생질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가 ‘아네프시오스’인데, 본래 ‘아네프시오스’는 조카가 아닌 사촌이라는 뜻입니다. 왜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개역성경에서 ‘아네프시오스’를 생질이라고 하는 바람에 요한을 바나바의 조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조카가 아닌 사촌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에는 사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요한, 셋이서 구브로 섬의 살라미에 있는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거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곳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는 첫 선교 사역지인 셈인데 그곳에서 핍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회심한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 거기서 얼마나 묵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오히려 바보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고서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는데, 교회가 시작된 다음에 초대교회 교인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우루루 몰려가서 앉은뱅이부터 일으켰겠습니까 설마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다음에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니 초대교회가 시작되자마자 다짜고짜 앉은뱅이부터 일으킨 것이 아니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건으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처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자체가 일종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된 교회는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는 곳이다, 이제 시작된 교회는 은과 금으로 힘을 삼는 곳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삼는 곳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살라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가 없고 바보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은 그 사건이 이제 시작된 선교 사역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보에는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고 또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는 짓은 박수인데 이름은 기가 막힙니다. 율법은 이런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여간 바보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총독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상당한 실력가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다가 소경이 되었고, 그것을 본 총독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모처럼 고등학교 때 친구 몇 명을 만났습니다. 신학을 한 이후로는 제가 토요일이나 주일에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 얼굴 보기가 참 힘들었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마침 한 친구의 생일이어서 전부 그 집으로 갔습니다. 거실에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제가 앉자마자 한 친구가 맥주를 내 앞에 올려놓더니,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목사 안수를 받기 전이었는데 제가 전도사라는 사실이 친구들에게는 마냥 신기하게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한 잔 받아, 임마! 네가 교회에서나 전도사지, 우리한테도 전도사냐” 제가 계속 안 마신다고 하자, 한 친구가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너, 그럼 지금부터 나를 설득해서 예수 믿게 해봐. 전도사면 그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전도사야 네 말주변으로 나를 설득시키면 전도사로 인정해 줄게. ”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설득에 관계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교역자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지도하던 학생 한 명이 저를 찾아와서 얘기했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독서실 총무와 교회에 대해서 제법 오랫 동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조금만 더 얘기하면 교회 올 것 같다면서, 그런데 자기 입심으로는 조금 부족하니까 나한테 한번 만나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내가 독서실로 가야 하는 거냐, 그 총무가 교회로 오는 거냐” 그랬더니 교회로 오는 것은 싫어한다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싫다고 했습니다. 싫다는 저의 대답이 다소 의외였나 봅니다. 걔 생각으로는, 나에게 얘기만 하면 내가 얼른 같이 가서 자기가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서 그 총무를 다음 주부터 교회에 출석하게 할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도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혹시 그 총무가 교회로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이미 교회에 올 마음이 있는 것이니까 굳이 나를 만날 것 없이 네가 얘기해도 된다. 그런데 내가 가야 만날 수 있다면 교회 올 마음이 없는 것이니까 내가 가서 떠들어도 어차피 말이 안 통한다. 내가 해서 되는 일은 네가 해도 되고, 네가 해서 안 되는 일은 내가 해도 안 되지, 내가 하면 되고, 네가 하면 안 되는 법은 없다. ”
비슷한 예로 기도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보다 목사가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가 클 것 같지 않습니까
무당 푸닥거리는 그렇습니다. 무당에게는 신이 내렸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신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푸닥거리를 하려면 자기가 직접 하지 못하고 무당에게 부탁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부 다 신(성령)을 받은 사람 아닙니까 목사가 기도하는 것이나, 목사 아닌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더 성령님의 간섭에 잘 순종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는 더 잘 들어주시고, 누구의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시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문제를 ‘설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예수를 설명하는 것은 간장 종지로 물을 붓는 것에 불과하지만 목사가 예수를 설명하는 것은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자기가 설명하는 것보다 목사가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줄로 압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설득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가 어떤 분인지 설명을 듣고 이해해서 믿는 분, 계십니까 예수는 설명을 듣고 말귀를 알아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상태에서 설명을 듣는 것입니다. 설명을 들어서 예수를 더 잘 믿을 수는 있어도 전혀 없는 믿음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는데,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일일이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했습니까 “너희들,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 너희들은 본래 종이 아니었다. 내가 택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가나안 땅을 예비해 두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곳에만 가면 이처럼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까 빨리 짐을 챙겨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씀에 동의해서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바로를 박살내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를 굴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어떻게 해서 회심하게 됩니까 바울이 알아듣게 설명을 해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를 장악하고 있던 엘루마가 박살나서 회심한 것입니다.
서기오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그곳의 총독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위도 있고 지혜도 있고 나름대로 종교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주장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지위나 지혜가 아닌 박수 엘루마였습니다.
그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살아온 인생 연륜에 어울리게 누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성실하게 산 사람일수록 쌓은 것도 많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앞가림을 하는 지혜도 있고 신령한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언제나 이 세상에 속한 악한 권세입니다.
한강 남북을 연결하는 다리가 몇 개나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천호대교, 올림픽대교, 잠실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한강대교, 원효대교, 마포대교, 서강대교, 당산대교, 양화대교, 성산대교, 행주대교…… 625 때만 해도 한강대교 하나뿐이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많은 다리들이 있습니다.
한강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은 엄청난 자본과 기술, 노동력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무슨 다리를 공사할 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공식을 하면서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공법으로 다리를 놓으면서 돼지 대가리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말로는 밀레니엄 시대라고 하는데 전혀 밀레니엄 시대같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한강에 다리를 놓는 대규모 공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지위, 실력을 갖춘 사람일 것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낱 돼지 대가리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예수를 모르면 별 수 없습니다. 영험하다는 점술가를 가장 많이 찾아다니는 직업 중 하나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우리 나라에서 정치인은 가장 상류 집단입니다. 그래도 점쟁이 말 한 마디에 쩔쩔맵니다. 실제로 우리 나라 모 재벌 기업은 관상 보는 사람을 신입사원 면접위원으로 참가시켜서 합격, 불합격을 관상쟁이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들이 과연 제정신인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늘 있는 일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런 서기오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으니 여태까지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박수 엘루마로서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방해했는데, 그랬다가 바울의 한 마디에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13:9-11)
이런 내용은 우리가 특히 오해하기 쉬운 내용입니다. “와, 역시 바울은 능력이 있으니까 멀쩡했던 사람도 말 한 마디에 소경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해서 그렇게 했다는 얘기는 바울에게 남다른 ‘영빨’이 있어서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 바울의 작품이 아니라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일을 기획하시고 추진하신 분이 성령님이셨습니다.
바울이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그 첫 번째 사건으로 서기오 바울이 회심한 일이 기록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서기오 바울에게 열심히 예수를 변증해서 그를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을 결박하는 것으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열심히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을 잘하면 상대방이 알아듣고, 말을 잘못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이 세상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분이면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꾸준히 힘을 길렀다가 일이 있을 때마다 연로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드시지 않도록 도와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면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능력’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전부 다 능력 있는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목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도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게 하옵시고……”라는 구절이 안 들어가면 기도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면 어차피 전부 ‘능력 있는 말씀’이지, ‘능력 없는 말씀’도 있습니까 말씀에는 원래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선포된 말씀에 어느 만큼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지,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서 순종까지 저절로 해결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힘써 그 분께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순종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관계없이 우리를 통하여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그런 일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빌립도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만 그때 빌립은 교회에서 파송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을 피하다 보니 사마리아에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까지 간 김에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에 선교적인 비전이 있어서 빌립을 그리로 파송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다릅니다. 처음부터 선교적인 비전이 있어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에 의해서 정식으로 파송된 첫 번째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사람을 파송한 것은 안디옥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라고 얘기합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선택된 것도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택해서 두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는 것 같지만 이 모든 일을 기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성령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개교회주의가 무척 강합니다. 무조건 ‘우리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를 부끄러워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나가던 교회니까 안 나갈 수 없어서 나가기는 나가는데,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는 말 한 마디도 못하는 것은 옆에서 보기에도 답답하게 보입니다.
제가 교회 개척을 시작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 중의 하나가 그런 것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자랑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도 제가 다니는 교회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오랜 고민과 갈등 끝에 신학을 시작하면서,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점이 “와, 이제는 떳떳하게 교회를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교회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 저에게 상당한 매력이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누군가가 당시 이런 제 마음을 안다면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옮기면 되지, 왜 고민하느냐”고 할 것입니다만, 교회를 옮기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때 저는 그 교회에서 집사 안수를 받은 항존직이었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고 주일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꼬박꼬박 나가면서 속으로는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더구나 청년들이 찾아와서 불만을 얘기하면 저 역시 속으로는 그들의 불만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을 달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 비단 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불만을 안으로 삭히면서 “지금은 동네 눈치가 있으니까 교회를 옮길 수 없지만 이사만 가면 교회를 옮긴다”는 마음으로, 교회 옮길 핑계를 찾으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는 다니던 교회니까 그냥 나가지만 자식들은 바람직한 신앙 교육을 위해서 다른 교회에 보낸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우리 교회 만큼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는 어차피 자기가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것이지, 강제로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마지못해서 억지로 다니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지나쳐서 ‘우리 교회만’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기는 매일반입니다. ‘우리 교회를’ 얘기해야지, ‘우리 교회만’ 얘기하는 것은 분명히 비정상입니다.
혹시 이 다음에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기면 제 마음이 바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멀리 이사 간 사람에게 굳이 우리 교회로 나오라고 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교회는 자기가 신앙 생활하는데 가장 적합한 교회를 자기가 선택하면 됩니다.
모순 같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선택한 교회가 기왕이면 우리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멀리 이사 갔으면 무리해서 나오지 말고 근처에 있는 적당한 교회를 택해서 신앙 생활하라고 얘기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 교회는 계속 나오고 싶은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행13:4-5)
안디옥을 출발한 바울과 바나바가 지중해변에 있는 항구 도시 실루기아에 가서 배를 타고 구브로(키프로스)로 갔습니다. 바나바가 바로 구브로 섬 출신입니다. 먼저 구브로의 수도인 살라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유대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만들었는데 살라미에는 유대인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흔히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합니다만 그 역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복음의 배경이 되는 구약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고 했는데 이 요한을 마가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린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요한의 집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요한을 바나바의 조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그런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생질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가 ‘아네프시오스’인데, 본래 ‘아네프시오스’는 조카가 아닌 사촌이라는 뜻입니다. 왜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개역성경에서 ‘아네프시오스’를 생질이라고 하는 바람에 요한을 바나바의 조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조카가 아닌 사촌입니다.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에는 사촌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여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요한, 셋이서 구브로 섬의 살라미에 있는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거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곳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는 첫 선교 사역지인 셈인데 그곳에서 핍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회심한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메시지를 전했는지, 거기서 얼마나 묵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오히려 바보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고서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었는데, 교회가 시작된 다음에 초대교회 교인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우루루 몰려가서 앉은뱅이부터 일으켰겠습니까 설마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다음에 베드로의 설교로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니 초대교회가 시작되자마자 다짜고짜 앉은뱅이부터 일으킨 것이 아니라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건으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이 처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 자체가 일종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된 교회는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는 곳이다, 이제 시작된 교회는 은과 금으로 힘을 삼는 곳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삼는 곳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살라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가 없고 바보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은 그 사건이 이제 시작된 선교 사역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보에는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고 또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바예수는 구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는 짓은 박수인데 이름은 기가 막힙니다. 율법은 이런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여간 바보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총독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상당한 실력가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다가 소경이 되었고, 그것을 본 총독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모처럼 고등학교 때 친구 몇 명을 만났습니다. 신학을 한 이후로는 제가 토요일이나 주일에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 얼굴 보기가 참 힘들었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마침 한 친구의 생일이어서 전부 그 집으로 갔습니다. 거실에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제가 앉자마자 한 친구가 맥주를 내 앞에 올려놓더니,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목사 안수를 받기 전이었는데 제가 전도사라는 사실이 친구들에게는 마냥 신기하게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한 잔 받아, 임마! 네가 교회에서나 전도사지, 우리한테도 전도사냐” 제가 계속 안 마신다고 하자, 한 친구가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너, 그럼 지금부터 나를 설득해서 예수 믿게 해봐. 전도사면 그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못하면서 무슨 전도사야 네 말주변으로 나를 설득시키면 전도사로 인정해 줄게. ”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설득에 관계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부교역자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지도하던 학생 한 명이 저를 찾아와서 얘기했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독서실 총무와 교회에 대해서 제법 오랫 동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조금만 더 얘기하면 교회 올 것 같다면서, 그런데 자기 입심으로는 조금 부족하니까 나한테 한번 만나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내가 독서실로 가야 하는 거냐, 그 총무가 교회로 오는 거냐” 그랬더니 교회로 오는 것은 싫어한다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싫다고 했습니다. 싫다는 저의 대답이 다소 의외였나 봅니다. 걔 생각으로는, 나에게 얘기만 하면 내가 얼른 같이 가서 자기가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서 그 총무를 다음 주부터 교회에 출석하게 할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도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혹시 그 총무가 교회로 와서 나를 만나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이미 교회에 올 마음이 있는 것이니까 굳이 나를 만날 것 없이 네가 얘기해도 된다. 그런데 내가 가야 만날 수 있다면 교회 올 마음이 없는 것이니까 내가 가서 떠들어도 어차피 말이 안 통한다. 내가 해서 되는 일은 네가 해도 되고, 네가 해서 안 되는 일은 내가 해도 안 되지, 내가 하면 되고, 네가 하면 안 되는 법은 없다. ”
비슷한 예로 기도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보다 목사가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가 클 것 같지 않습니까
무당 푸닥거리는 그렇습니다. 무당에게는 신이 내렸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신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푸닥거리를 하려면 자기가 직접 하지 못하고 무당에게 부탁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부 다 신(성령)을 받은 사람 아닙니까 목사가 기도하는 것이나, 목사 아닌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더 성령님의 간섭에 잘 순종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는 더 잘 들어주시고, 누구의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시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문제를 ‘설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예수를 설명하는 것은 간장 종지로 물을 붓는 것에 불과하지만 목사가 예수를 설명하는 것은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자기가 설명하는 것보다 목사가 설명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줄로 압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설득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가 어떤 분인지 설명을 듣고 이해해서 믿는 분, 계십니까 예수는 설명을 듣고 말귀를 알아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상태에서 설명을 듣는 것입니다. 설명을 들어서 예수를 더 잘 믿을 수는 있어도 전혀 없는 믿음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는데,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일일이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했습니까 “너희들, 왜 이렇게 살고 있느냐 너희들은 본래 종이 아니었다. 내가 택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가나안 땅을 예비해 두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곳에만 가면 이처럼 남의 나라에서 종노릇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러니까 빨리 짐을 챙겨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씀에 동의해서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바로를 박살내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를 굴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어떻게 해서 회심하게 됩니까 바울이 알아듣게 설명을 해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를 장악하고 있던 엘루마가 박살나서 회심한 것입니다.
서기오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그곳의 총독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서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위도 있고 지혜도 있고 나름대로 종교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주장하는 것은 그에게 있는 지위나 지혜가 아닌 박수 엘루마였습니다.
그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셈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살아온 인생 연륜에 어울리게 누리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성실하게 산 사람일수록 쌓은 것도 많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앞가림을 하는 지혜도 있고 신령한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언제나 이 세상에 속한 악한 권세입니다.
한강 남북을 연결하는 다리가 몇 개나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천호대교, 올림픽대교, 잠실대교, 성수대교, 영동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한강대교, 원효대교, 마포대교, 서강대교, 당산대교, 양화대교, 성산대교, 행주대교…… 625 때만 해도 한강대교 하나뿐이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많은 다리들이 있습니다.
한강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은 엄청난 자본과 기술, 노동력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무슨 다리를 공사할 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공식을 하면서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공법으로 다리를 놓으면서 돼지 대가리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말로는 밀레니엄 시대라고 하는데 전혀 밀레니엄 시대같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한강에 다리를 놓는 대규모 공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지위, 실력을 갖춘 사람일 것입니다. 배울 만큼 배웠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한낱 돼지 대가리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예수를 모르면 별 수 없습니다. 영험하다는 점술가를 가장 많이 찾아다니는 직업 중 하나가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우리 나라에서 정치인은 가장 상류 집단입니다. 그래도 점쟁이 말 한 마디에 쩔쩔맵니다. 실제로 우리 나라 모 재벌 기업은 관상 보는 사람을 신입사원 면접위원으로 참가시켜서 합격, 불합격을 관상쟁이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들이 과연 제정신인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늘 있는 일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런 서기오 바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으니 여태까지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박수 엘루마로서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방해했는데, 그랬다가 바울의 한 마디에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13:9-11)
이런 내용은 우리가 특히 오해하기 쉬운 내용입니다. “와, 역시 바울은 능력이 있으니까 멀쩡했던 사람도 말 한 마디에 소경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성령 충만해서 그렇게 했다는 얘기는 바울에게 남다른 ‘영빨’이 있어서 그런 일이 가능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 바울의 작품이 아니라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일을 기획하시고 추진하신 분이 성령님이셨습니다.
바울이 3차에 걸친 전도 여행 중에 그 첫 번째 사건으로 서기오 바울이 회심한 일이 기록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서기오 바울에게 열심히 예수를 변증해서 그를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을 결박하는 것으로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열심히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을 잘하면 상대방이 알아듣고, 말을 잘못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이 세상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영에 속한 싸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은 분이면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꾸준히 힘을 길렀다가 일이 있을 때마다 연로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드시지 않도록 도와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면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능력’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전부 다 능력 있는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목사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도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게 하옵시고……”라는 구절이 안 들어가면 기도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면 어차피 전부 ‘능력 있는 말씀’이지, ‘능력 없는 말씀’도 있습니까 말씀에는 원래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선포된 말씀에 어느 만큼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지,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서 순종까지 저절로 해결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힘써 그 분께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순종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관계없이 우리를 통하여 훨씬 더 많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그런 일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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