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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첫 선교사 파송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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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지금까지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와 베드로를 중심으로 소개되었습니다. 13장부터는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가장 크고 두 번째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세 번째가 안디옥이었는데, 안디옥은 그때 당시에 인구가 50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유대 땅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예루살렘과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민족적이라면 안디옥 교회는 다분히 국제적이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뿌리깊은 유대의 전통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 2,000년 동안 자기들만 선민이었고, 자기들만 율법이 있고, 자기들만 할례를 받았고, 자기들에게만 성전이 있었으니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다는 말은 그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루살렘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받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자기들끼리 예배하고 자기들끼리 교제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핍박이 있게 한 것입니다. 아마 그 박해가 없었으면 그들은 전부 예루살렘에서 마르고 닳도록 살았을 것입니다만 박해 때문에 사방으로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박해로 인해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는데,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서부터 비로소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있었던 것처럼 안디옥 교회에도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우리가 잘 아는 사울, 곧 바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의 레위인으로 본래 예루살렘 교회 사람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막 시작될 당시,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왔던 그의 본명은 요셉입니다만 요셉이라는 본명보다 바나바(권위자)라고 하는 별명이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행4:36-37). 나중에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과 사귀려고 했지만 모두들 사울을 의심하여 아무도 만나주지 않을 때 그를 사도들에게 데리고 간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행9:26-27). 안디옥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들렸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으로 파송한 사람이 바나바였고(행11:22), 고향 다소에 가있던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또한 바나바였습니다(행11:25-26).
이런 바나바에 비해서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니게르’는 라틴어로 ‘검다’는 뜻입니다. 흑인을 가리켜서 니그로라고 하는데, 같은 말입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요즘 말로 하면 ‘깜둥이 시므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적에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사람이 구레네 시몬인데, 일설에 의하면 구레네 시몬과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레네는 지금으로 하면 북부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입니다. 세계 지도에서 찾아보면 이집트 바로 옆에 있는 나라가 리비아입니다.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던 사람은 흑인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나중에는 그야말로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는 귀한 십자가를 지게 된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구레네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시므온과 동향 사람으로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만 짐작할 뿐입니다. 또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은 헤롯과 친형제는 아니지만 같은 유모에게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나엔은 어려서부터 왕궁에서 자란 지체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해서 전부 하층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귀족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바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 다소에서 온 사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그룹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골수 유대인들로만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와는 뭔가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행13:2)
‘주를 섬긴다’는 얘기는 헬라어로 ‘레이투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Worship이라고도 하고 service라고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 비해서 개신교는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조금 약합니다. 천주교는 예전 중심인데, 개신교는 설교가 중심이다 보니, 마치 설교를 듣는 것이 곧 예배의 전부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찬양을 한 시간 하면 뭔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 한 시간을 들으면 오히려 지루하기만 합니다. 특히 요즘은 어느 교회에서나 찬양예배를 많이 드리는데 이런 감정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한 듯한 개인적인 감정에 치중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소홀히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시간 내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가슴 뿌듯함이 한 시간 동안 설교를 들은 ‘지루한 느낌’보다 가치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더욱 여호와 하나님의 뜻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설교의 중요성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동생이 결혼하기 전에 저의 집에서 잠깐 같이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동생을 교회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한사코 안 가겠다고 버티던 동생이 ‘꼭 한 번’이라는 조건을 걸며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었습니다. 교회 가야 하는데, 동생이 계속 미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계속 채근했더니, 지금 들어가봐야 설교 시작 안 했으니까 더 있다가 설교 시작할 때 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윽박질러서 억지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마지못하여 앉아 있던 동생은 설교가 끝나자마자, 약속 지켰다고 하면서 나가버렸습니다.
저는 예배드리는 것을 얘기했는데, 그때 제 동생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설교 시간에 앉아 있는 것을 같은 뜻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를 신자들도 합니다.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라고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 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을 소홀히 여기는 핑계로만 이 말을 씁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폐단이 예배가 시작된 다음에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만 들어오면 지각이 아닌 줄로 아는 것입니다. 교회는 설교를 듣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러 오는 곳입니다. “교회 간다” “예배드리러 간다” “교회 빼먹었다” “예배 빼먹었다”는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만 “교회 간다”와 “설교 들으러 간다”, “교회 빼먹었다”와 “설교 빼먹었다”는 같은 뜻이 아닙니다.
설교 중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설교 시간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제가 고개를 들고 바로 앉으라고 얘기하면, 다 듣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는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얘기입니다. 애초에 고개를 숙이면 설교가 안 들리기 때문에 바로 앉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고 앉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앉으라고 한 것인데, 말귀를 못알아듣습니다. 자기가 어떤 자세로 앉아있든지 설교만 들으면 그것이 예배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여름이면 예배 시간에 주보로 부채질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하면 더워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것도 말이 안 맞는 얘기입니다. 제가 애초에 “덥지도 않은데 왜 주보로 부채질을 하십니까 하지 마십시오. ”라고 얘기했으면, “아닙니다. 지금 덥습니다. ”가 말이 됩니다. 그런데 “예배 중이니까 부채질하지 마세요. ”라고 했으면, 예배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더운지, 덥지 않은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예배 드리는 것으로 보이세요 저는 그냥 여기 앉아있기만 하지, 예배 드리는 거 아니예요. ”는 말이 됩니다만, 더우니까 부채질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는 설교가 중심이라는 얘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 설교를 듣기만 하면 그것이 곧 예배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배 시간에는 ‘높으신 분을 알현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하여간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성령님께서 친히 안디옥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거룩’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자주 나옵니다. 신약성경에 125회, 구약성경에 379회 모두 504회나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말하는 거룩과 교회 밖에서 말하는 거룩이 서로 다릅니다. 교회 밖에서는 성스럽고 위대한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라는 한글날 노래 가사에 교회 밖에서 말하는 거룩의 뜻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세종대왕같은 위인을 가리켜서 거룩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그런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을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하는데,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나와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이 곧 거룩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으로 얘기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거룩한 사람들이고, 지금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바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또 분문에서 성령이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는데, 이렇게 따로 세우는 것이 곧 거룩한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네 형제가 전쟁에 참가했는데 위로 세 형제가 죽고 막내인 라이언 일병만 생존했습니다. 밀러 대위를 포함한 여덟 명의 군인이 그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밀러 대위를 포함한 여덟 명의 군인은 라이언 일병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라이언 일병을 구해 오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그 임무를 부여받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했겠지만,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부여받는 순간부터 그들의 임무가 바뀐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놀이가 아닌 실제 전시 상황이었습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임무를 포기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 영화 줄거리에서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이 간다는 것이 이치적으로 합당합니까 자기들 여덟 명의 목숨이 라이언 일병이라는 한 사람의 생명보다 못하다는 말입니까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가는 내내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합니다. 하지만 갈등은 갈등이고 임무는 임무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이유로 임무를 외면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자기들이 동의하는지 여부도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군인인 이상, 그리고 자기들에게 명령이 내려진 이상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그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바로 그렇습니다. 성령이 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해 오라고 따로 세움을 받았으면 라이언 일병을 구해와야 하고, 성령께서 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움을 받았으면 성령께서 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따로 세움을 받았으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저에게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과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령께서 대신 해주는 것이 신앙인 줄로 오해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빌고, 일만 있으면 돼지 대가리를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던 무속 신앙이 그대로 기독교의 옷을 입어서 그렇습니다.
앞에서 제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만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령께서 대신 해주는 것이 신앙이라면, 그 영화에서는 밀러 대위를 포함한 여덟 명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라이언 일병을 구해오라고 지휘본부에다 명령을 내리고 자기들은 그 명령이 어느 만큼 잘 준행되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는 뜻이 됩니다.
무릇 신앙 생활은 자기가 원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의 간격을 메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있는데 그것을 이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요청해서 그 능력을 빌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화수 떠놓고 빌고 돼지 대가리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처럼 신앙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 신령한 방법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이상한 폐단이 생겨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있는데 그것을 이룰 능력은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잘 보여서 그 능력을 빌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간절함이 동원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제가 이만큼 간절히 원하는데도 안 들어주실 겁니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앙 열심이 간절함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기도하면서도 “간절히 믿사오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간절히 믿는다는 것이 우리말로 어법이 맞습니까 간절히 바랄 수는 있습니다만 간절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표현이 왜 나오느냐 하면, 믿음의 근거가 자기의 간절함이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뭐든지 된다고 들은 풍월이 있는데, 자기에게 간절히 필요한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간절히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종교의 형태는 취했을지 몰라도 신앙은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신앙은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님의 간섭을 받는 정도가 곧 그 사람의 신앙 수준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간섭을 받고, 그 간섭에 순종하는 것은 한꺼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상당 기간 동안 꾸준히 훈련되어야 하고 또 상당 기간 동안 꾸준히 훈련되기 위해서 그만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간섭을 받는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감자나 무를 채써는 것도 그렇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보다 나이 마흔 넘은 어머니가 훨씬 잘 썰게 마련입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은 어머니가 써는 것이 신기하게 보여서 나름대로 어머니를 흉내내보려고 아무리 신경써도 잘 안 되는데, 어머니는 가스불 줄이라고 얘기하면서 다른 데 신경쓰면서 썰어도 잘 썹니다.
잘 썰고 싶은 마음이 어느 만큼 강렬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지금까지 어느 만큼 많이 썰어보았고, 잘 썰 수 있는 실력이 어느 만큼 몸에 배었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어머니가 써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데 자기가 썰면 그렇게 안 된다는 사실 때문에 이내 싫증을 냅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칼을 쥐었다가도 이내 그만두고 맙니다. 그것이 전부 살림 연륜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상당히 함축적입니다. 사건에 따라서는 자세하게 부연 설명하는 사건도 있지만 몇 십 년이나 되는 세월도 훌쩍 뛰어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하고, 성령이 얘기해서 따로 택하고, 기도하고, 안수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하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폐단 중에 하나가 신앙 생활이 전부 발작적입니다. 은혜만 받으면 발작을 하는데 그 거룩한 발작이 별로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자기에게 누적되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금방 고갈하는 것입니다. 그릇에 물이 철철 넘쳐서 굉장히 물이 많은 것 같은데 알고 봤더니 간장 종지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넘치기는 넘치는데 목도 제대로 추기기 힘듭니다.
삼계탕을 끓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어도 30-40분간 계속 끓여야 합니다. 아무리 화력이 센 가스 렌지에서 끓이더라도 그 30-40분을 대신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그렇습니다. 어느 만큼 간절히 원하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어느 만큼 자기 안에 누적되어 있는 실력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공부를 상당히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친구는 공부 못할 짓만 합니다. “오늘부터는 마음 잡고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지” 이런 얘기를 가끔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 먹고서 실제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려니 책상이 너저분하더랍니다. 그러면 먼저 책상 청소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계획표를 짭니다. 형광팬으로 색깔을 입혀가면서 예쁘게 짭니다. 그 다음에 공부를 하려니 속이 좀 출출하더랍니다. 그러면 라면을 하나 끓여 먹습니다. 밥까지 말아서 맛있게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책상에 앉으면 배가 부르니까 슬슬 졸립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첫 날인데, 라면만 끓여 먹고 바로 이부자리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냥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잡니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다가 밤 중에 깨어서 시계를 보면 새벽 두 시입니다. 그럼 그때는 뿌듯한 마음으로 이불에 들어갑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하는 결심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결심은 분명히 있습니다. 공부 할 수 있는 책상도 있고, 공부방도 있고, 심지어는 공부하다가 밤 중에 먹을 야식도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는데, 딱 하나 “졸린 눈 비벼 뜨면서 실제로 공부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말로는 “공부해야지” “공부해야지” 하면서도 성적표만 받으면 400명 중에서 398등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그렇게 하더라는 말씀입니다. 간절하다는 이유로 과정을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자기 안에 누적된 실력은 없으면서 어금니만 앙다물면 그것이 신앙인 줄 압니다.
봄에 씨를 뿌렸으면 여름내내 잡초를 매고 거름을 주면서 꾸준히 가꾸어야 가을에 수확이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자마자 풍성한 수확을 간절히 열망하면 그 열망 정도에 따라 여름에 수확이 되기도 하고 밥까지 굶어가면서 더 강렬하게 열망하면 봄에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래 정상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10년 믿은 것과 30년 믿은 것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10년 믿은 사람은 30년 믿은 사람을 당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10년 믿고도 30년 믿은 사람보다 나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10년 믿은 사람이 칭찬들을 일이 아닙니다. 30년 믿은 사람이 욕먹을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그 사람을 따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간섭을 상당히 오랫 동안 꾸준히 받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사람이 한꺼번에 180도로 훼까닥한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거기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파하다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아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가이사랴를 거쳐서 다시 다소로 갔습니다. 또 갈라디아서의 기록에 의하면 아라비아에서 삼 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다소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소에 있던 중에 바나바의 방문을 받아 같이 안디옥에 와서 바나바와 더불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가르친 것이 또 일 년입니다.
그 모든 기간을 거쳐서 오늘 본문에서 성령님에 의해서 따로 세움받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나올 내용은 바울이 성령님의 간섭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내용들입니다. 그의 입술과 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선포되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나타났던 일과 동일한 일이 동일한 성령님의 간섭 아래 동일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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