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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은혜에 보답과 선교

본문

몇 사람이 천국을 견학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수문장인 베드로 사도가 그들을 맞아
천국의 이곳저곳을 자세히 안내해 주었습니다.
일행은 천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작업장을 방문했습니다.
작업장의 첫째 부서는 ‘접수처’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고,
천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낸 청원서를
땀을 뻘뻘 흘리며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두 번째 부서로 가 보았습니다.
‘발송처’라고 쓰인 두 번째 작업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청원서를 보시고
그들에게 보내는 선물을 포장하고, 발송하느라 역시 쉴 틈 없이 바빴습니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작업장 한쪽에 있는 마지막 부서로 갔습니다.
그곳의 간판은 ‘확인처’라고 적혀 있었는데,
천사 한 분만 의자에 앉아 한가히 졸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일행이 이유를 묻자,
베드로 사도는 “서글픈 일이라네….
축복 받고 나서 받았다는 확인서를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한가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말했습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천국서 오는 소포를 180일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특별 소포도 여러 번 받았을 것이고,
급하게 청해서 받은 퀵 서비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2003년 전반 신앙의 결산을 해보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시116:12-13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 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내게 주신 여호와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행한 바울의 설교를 통해
은혜에 보답하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에 이르러 지난 3년간 머물면서 목회 했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향한 바울의 고별설교로서 목회적 권면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권면의 말씀을 통해
선교적 사명을 다하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2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가를 간증을 통해 권면을 합니다.
1.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섬겼다고 간증합니까(17-19절)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지난 3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 머물면서 세웠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만나 최후의 만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눈물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권면을 합니다.
바울은 지난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사역했던 일을 세 가지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회상 속에서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3가지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상 속에서 중요한 단어는
19절에 주님을 섬긴다 는 말입니다.
그 앞에 있는 말들은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가를 수식하는 표현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이 주님을 섬기듯이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어떻게 교회를 섬겨야 합니까
1) 바울은 모든 겸손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섬기듯이 교회를 겸손히 섬겼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실망하게 합니다.
왜 봉사를 하다가 그만 둬 버립니까 겸손히 봉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 우리의 섬김에 열매가 없습니까 겸손히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한 두 번 겸손이 아니라 바울은 모든 겸손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히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면
마11:28절에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즉 온유와 겸손을 먼저 배워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합니다.
아무리 신학자가 되고 성경학자가 되어도
겸손하지 아니하면 교회를 섬길 수 없습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자인 두 거인 루터와 쯔빙글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방향이 서로 반대였습니다.
두 사람은 종교개혁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의견충돌로 얼굴을 붉혔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스위스의 산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두 마리의 염소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염소들은 다리의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합니다.
곧 한판 싸움이 붙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염소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염소의 등을 밟고 유유히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루터와 쯔빙글리는 이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3
염소에게서 `겸손'과 `양보'를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에 서로가 힘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가 낮추는 자세만이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2)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는 말은
그 만큼 교회를 섬기는데 눈물나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언제 납니까
물론 눈물도 여러 가지 눈물이 있습니다.
방송국에 가보면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연기자들이 한참 떠들고 놀다가도 큐! 하면
연기자들은 금방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눈물이 아니지요.
진짜 눈물은 말로다 못할 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어떤 때는 속도 상하고 자존심도 상하고
오해도 있고 억울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만두고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거부할 수 도 없습니다.
말도 다 못합니다. 그러니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 있으시죠 바울도 그렇게 교회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3) 참고 섬겼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여러 가지 시험들이 있습니다.
특히 잘 믿는다고 하는 직분자를 통해 시험을 받으면 참 참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험은 참는 것이 상책입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시험 당하면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인도차이나 선교지 방문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복음의 경주자들인데
필드에서 하는 경기와 산악오지에서 하는 경기는 다릅니다.
필드에서는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가 중요하지만
산악에서는 얼마나 참고 견디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사님 여러분 ! 선교지는 오지 산악경기입니다.
기록을 내려고 하지 말고 얼마나 참고 견디느냐에 승부를 거시기 바랍니다.
딤후2:12절 참으면 왕 노릇 할 줄 믿습니다.
그럼 바울이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교회를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도 왜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까 4
20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말은 복음을 말합니다.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하는 말은 어떤 곳에서든지
 꺼림이 없이 하는 것은 이익에 상관없이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 전하는데 있습니다.
장소가 어디든, 이익이 있든 없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그 자체가
바울에게는 기쁨이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분위기를 만들어져야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리를 만들어져야 봉사를 합니다.
분위기가 안 맞고 수준이 안 맞는다고 고상하게 거절합니다만
그러나 그 속에 들어다 보면
그에게는 분위기와 환경과 대우가 주님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21절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는 말은 그 누구도 상관없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고 합니다.
즉 바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지는
복음에 001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폰 인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바울은 모든 일에 겸손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고 끝까지 참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철학은 오직 예수의 복음입니다.
바울의 삶의 철학을 한마디로 나타나는 말씀이 빌1:20절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오늘 우리도 교회를 섬기면서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모든 일에 겸손함시다, 힘들어도 눈물로 감당합시다,
끝까지 참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오직 복음이 전파되기 위하여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라는 명작이 있습니다.
친구로 똑 같이 신학교를 나와 신부가 된 두 사람이 있는데
치셤이란 신부는 중국 선교사로 들어가 죽을 고생만 하고
친구는 바티칸에서 대주교가 되어
지위와 명예를 얻고 대접을 받으며 일생을 마칩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이 천국의 열쇠를 누구에게 주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살고 영광을 누리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만 5
그러나 은혜 위에 은혜는 복음을 위해
얼마나 참고 견디며 고난을 잘 감당하는가 인 줄 믿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허리를 숙인 것 아닙니다.
노년에 평안하기 위하여 허리끈을 졸라맨 것 아닙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참은 것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전파 즉 선교를 위하여
허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참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는 손에 쥐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은 남다른 은혜를 깨달은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가
바울의 삶을 통해 어떻게 나타납니까
은혜를 깨달은 자는
1) 22절, 심령에 매임이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지금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드신 분이 성령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심령에 매임을 받아 라는 말은 성령에 이끌려 라는 말입니다.
은혜받은 성도는 성령님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성도는 자기 마음에 들어야 가지만
은혜 받은 성도는 자기 마음에 안 들어도 성령님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받은 성도는
2) 23절, 고난을 각오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예루살렘에 가면 굉장한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각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빌1: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은혜는 주를 위한 고난과 정비레 한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뒤 바울은 21장에 가이사랴에 이르러 빌립 집사 집에 들렀는데 6
거기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허리 따를 가져다가 자신의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는데 제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그때 바울이 하는 말이 행21:19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고 올라갑니다.
복음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몸이
결박 받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성도의 특징인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3) 24절, 자신의 달려갈 길을 알고 그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여러분들의 달려갈 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자세와 방법은 다를지 모르지만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인 것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이 우리 모두의 삶의 목표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에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다 마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을 수 있는
은혜 받아 주를 위해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선언이 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 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가는 길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고 당부하고 싶은 말입니다. 7
 모든 사람의 피 값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피 값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겔37:17-21절까지 보면 사도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기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는데
네가 만일 악인에게 말하여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합니다.
네게 맡겨진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 책임을 네게 묻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27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는 것은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의 사명을 다 감당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 우리가 피 값을 감당해야 합니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의 핵심은
28절에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두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1) 교회는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피 값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피 값은 바로 복음증거를 위해 순교를 각오한 신앙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밥값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피값을 해야 한다.
즉 복음을 위해 순교적인 신앙을 가질 때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피로 사신 교회를 가리켜 양 떼라고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조직도 아닙니다. 제도도 아닙니다.
교회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양떼라는 사실입니다.
양떼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직분자를 세웠습니다.
양떼가 목자를 잘 따라야 하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은
목자가 양떼를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8
자기를 위하여 또는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합니다.
삼가라는 말은 자신을 성찰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자신을 잘 살펴야 남을 잘 살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부부가 차에 연료를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어왔습니다.
주유소 직원이 연료를 넣으면서 앞 유리를 닦아주었습니다.
직원이 일을 마치자,
남편이 “유리가 아직 더러우니 한 번 더 닦아 줘요”라고 말했습니다. 직원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앞 유리를 닦으며
혹시나 자신이 보지 못한 벌레나 더러운 것이 있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직원이 일을 마쳤을 때,
남편이 화를 내며 “이게 다 닦은 거냐 당신은 유리 닦는 법도 몰라 하며
화를 내며 차에서 내려 싸우려는 자세입니다.
그때 옆에 있던 아내가 손을 내밀어 남편의 안경을 벗겨
휴지로 깨끗하게 렌즈를 닦아서 다시 남편의 얼굴에 씌워 주었습니다
남편은 그제야 무엇이 잘못된 줄을 알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주유소 직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직분자 중에서도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에 단점 허물 잘못된 것만 보이지 않습니까
먼저 자신의 심령의 렌즈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먼저 성찰해야만 교회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에베소 장로들에게만 권면 하는 말씀입니까
어찌 장로들에게만 하는 권면이겠습니까
우리 모든 직분자들에게 하는 권면인 것입니다.
부활 후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며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똑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예수를 모르거나 처음 믿는 교인이라면
 수고하고 무건운 짐진 자들아 내 내게로 오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다 내게로 오라 고 하시겠지만
그 단계가 지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정말 이제는 주님없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한다면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대신 내 양들을 돌보라 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부르신 이유인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 하면서 당부하는 또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9
29-32절까지에서 한 마디로 말하면
 흉악한 이리 떼를 경계하라 는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1) 이리는 양을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목사만 목자라고 생각하고 짐을 다 떠맡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리는 바로 삯군 목자를 말합니다.
양떼를 생각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목자를 말합니다.
교회에 직분은 계급도 아니요 직급도 아닙니다.
직책입니다. 책임입니다. 돌보는 것입니다.
특히 교사 순장님들, 여러분 양떼를 맡았으면 돌보아야 합니다.
전화도 해 주고 기도도 해 주고 심방도 해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2) 흉악한 이리떼는 교인들을 자꾸 분열시킵니다.
이리 떼는 겉으로 보기에는 양의 탈을 쓰고 말은 그럴 듯하게 합니다만 자기를 좇게 만듭니다. 자기를 좋아하게 만듭니다.
오늘 바울은 이런 이리 떼를 경계하라고 합니다.
흉악한 이리 때는 가만히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리 떼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31절 내가 삼 년이나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 합니다.
교회가 이리 떼로부터 보호를 받아 순수한 교회가 되려면
직분자들의 눈물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 32절 지금 내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즉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 안에서 이리 떼의 유혹을 받는 줄 아십니까
이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유대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마을에 명의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모두 그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도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임종을 앞둔 의사를 찾아가 울부짖었다.
“이제 우리의 질병은 누가 고쳐줍니까” 하니
그때 명의는 간신히 힘을 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10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세 명의 명의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겠소.
그 명의의 이름은 ‘음식’과 ‘수면’과 ‘운동’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적절한 음식과 깊은 잠과 적당한 운동은 사람의 건강을 지켜주는 명의입니다. 여기에 육체보다 훨씬 중요한 영혼의 건강을 지켜주는 명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맛좋게 먹어야 보약이 되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는 사람은 늘 영혼이 건강할 줄 믿습니다.
눈물이 있고 말씀에 은혜를 받는 사람은
32절에 보면
1)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주신다고 합니다.
2) 기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기업은 세상에서 받는 기업은 아닙니다. 영원한 기업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 마지막 권면의 말이 무엇입니까35절
물질 탐하지 마라, 도리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받는 자가 되지 말고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는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거지라고 합니다.
꼭 먹을게 없어야만 거지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거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정신적 거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되려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6:10절에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까 주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가 되어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그 자체가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가 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줄 수 있도록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교회가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요 바로 선교입니다.
중국의 허버트 잭슨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서 물려받은 자동차는
뒤에서 밀고 시동을 걸어야만 되는 차였다.
그래서 선교사는 드디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옆에 있는 학교를 찾아가서 자동차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11
필요할 때마다 어린이들이 뒤에서 차를 밀어주도록 허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차를 밀고 몇 바퀴를 돌면서 시동을 걸든지,
아니면 자동차를 앞의 언덕길 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주면
거기에서부터 타고 언덕을 내려 달리면서 시동을 걸었습니다.
그는 2년 동안이나 이 방법으로 자동차를 운전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잭슨 선교사의 건강이 나빠져서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의 후임자로 한 젊은 선교사가 도착했습니다.
잭슨 선교사는 그에게 자동차를 인계해 주면서 자기가 그 동안 어떻게 머리를 써서 자동차의 시동을 걸어왔는지를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젊은 선교사가
자동차의 엔진 부분 뚜껑을 열어서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잭슨 선교사님, 이 자동차의 문제는 별 것 아닌 것 같은데요.
저 줄이 느슨하여 그랬던 것 같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 줄을 단단히 조였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 올라가서 시동 스위치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동차의 시동이 ‘부르릉’ 하면서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잭슨 선교사는 2년간이나 안 해도 될 고생을 하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동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 동력을 잇는 벨트가 느슨해졌기 때문입니다.
혹 이야기 중에 깨닫는 것이 없습니까
나도 처음 은혜 받아 물 불 안 가리고 바치고 줄 때는
신앙생활 신바람이 났는데
신앙생활 오래 하다보니 욕심 때문에 주는 벨트가 느슨해져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동력이 전달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아니하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선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동력을 힘입는 시동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맥추감사주일과 선교주일을 맞이하여
한 해의 절반을 살아오면서 천국에서 온 은혜의 소포를 받고
잘 받았다고 확인 감사를 했으면 합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다시 한 번 바울의 권면을 통해
선교의 벨트를 단단히 조을 수 있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일찍이 우리 내일 교회의 표어가 주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입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복음이요 선교입니다.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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