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빌립보 선교
본문
유럽의 첫 성, 빌립보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발대 사도 바울 선교사 일행에 의하여 점령되어 가는 모습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영적 전쟁은 매우 치열하고 심오한 것이어서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이해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안을 열어 주셔서 전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 함께 이 복된 말씀을 이해하고 은혜를 받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빌립보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 칭찬 속에 있는 사탄의 음모를 극복하는 신앙으로 이루어집니다. (16-18)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듣고 싶어하는 칭찬입니까
그런데 바울 일행은 우군이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구호를 과감히 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왜일까요
여기서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헬라어 '호 데오스 호 휴시스토스')는 본래 뵈니게 사람들의 신(엘 헬루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히브리인들은 이 말로 야웨를 가리키고(민24:16;시78:35;사14:14;단3:26;4:32;5:
18,21;에스드라상2:3) 헬라인들은 제우스를 가리키는데에 사용하였습니다(Roberts, Skeat, Nock). 극존칭입니다.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닌데 자진하여 바울의 일행을 나팔 불어 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진하여 극존칭을 써 가면서 나선 것입니다. 이방지역에서 누구 하나 바울 일행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그때에,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닌데 자진하여 바울의 일행을 나팔 불어 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즈음과 같은 P. R. 의 시대에는 재정적인 투자를 해서라도 사고 싶어하는 상품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신통력을 가진 점쟁이로 알려진 소녀가 하는 말이니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같으면, 이런 소녀가 앞장 서서 외치는 것을 격려하고 좋다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지금 자기를 따라다니면서 자기를 높여주는 소녀의 칭찬을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보통 괴로워 한 것이 아니라 심히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호적인 소녀의 칭찬을 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설명을 유보하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하나는 사도 바울 일행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 왔지 자신을 선전하러 빌립보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바울일행을 높이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 일행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치명적인 사탄의 음모가 있습니다.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빌립보에서 확장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합니다. 바울 일행을 통하여 전파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 전하는 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소녀의 외침으로 인해 전도자들은 외관상으로는 뜻하지 않았던 유명세를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는 복음의 선포보다 귀신의 말에 더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얻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온 천하를 들어 사도 바울 일행을 칭찬한다 해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기뻐하는 일일 뿐입니다. 복음의 길을 막는 사탄의 음모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음모를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또 하나의 이유는 사탄이 복음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벤트(Wendt)는 거룩한 복음이 부정한 영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사탄이 복음 사역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사탄의 힘을 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저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복음을 마술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복음의 신용을 해치기 위함이었을 것'(존 스토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기를 극존칭으로 높이며 외치고 다닐지라도 담대히 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이와 아울러 그 소녀의 딱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Lenski). 어린 소녀가 사탄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와서 도우라'드로아에서 보았던 환상을 생각했을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지 않습니다. 영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만 떠들고 다니지 예수 그리스도를 듣지 않습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을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사도 바울도 이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받는 불이익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이 그 딱한 소녀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바울은 돌이켜 그 귀신에게 명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이로 인하여 칭찬을 가장하여 다가 온 사탄과의 거래는 끊어졌습니다. 사탄으로부터 올 수 있는 모든 유익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을 교묘히 막으려던 사탄의 궤계도 끊어졌습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지혜를 얻게 됩니다. `칭찬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로구나!'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잠27:21)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는 말씀대로 사람을 시련하시는 칭찬을 깨어서 분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비난보다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바나바도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대 예수살렘 교회 일곱 집사님들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란 분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행은 칭찬을 받을만한 충분한 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 일행은 한 가지 더 귀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칭찬 속에 담아 둔 사탄의 음모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칭찬을 받아야 함을 벌써 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칭찬 속에 얼마든지 스며들 수 있는 사탄의 음모를 경계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칭찬인가를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한 칭찬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말씀을 막는 칭찬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이런 영적 분별력!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에 참다운 칭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과 사탄의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하려는 망상을 끊으십시오. 그 안에 사탄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칭찬을 사모하십시오.
빌립보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2. 고난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이루어집니다. (19-23)
사도 바울 일행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극복하였을 때, 사탄은 또다른 시험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달콤한 칭찬이 아니라 쓰디쓴 고난입니다. 아무튼 복음이 유럽 땅에서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하니까요. 사도 바울 일행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극복하였을 때, 사탄은 세상(사람)으로부터 올 수 있는 모든 유익을 끊습니다. 대신 고난(苦難)으로 복음 전하는 자를 압박합니다. 복음 사역을 교묘히 막으려던 사탄의 궤계를 끊어버렸을 때, 사탄과의 거래를 끊어버렸을 때, 사탄은 쓰디쓴 고난으로 압박해 옵니다.
그들이 관원들에게 고소한 내용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싫어하는 로마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편견으로 충동질을 합니다.
-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였다!' 거짓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말을 왜곡시킵니다. 그러나 19절 말씀에서 우리는 실상을 보지 않습니까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권이 없어지니까 대적하고 나서는 세력이 된 것입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충동질을 했고, 거짓 증언을 하고, 말을 왜곡시킵니다. 그들은 한 소녀가 일평생 사탄의 종노릇을 하며 살더라도 자신에게 물질적 혜택만 준다면 입이 벌어지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한 소녀가 일평생 매여 있던 사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더라도 물질적 손해가 오면 펄펄 뛰며 음모를 꾸미는 돈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종의 주인은 물질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복음 전하는 자를 이토록 무섭게 매도합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충동질을 하고, 거짓 증언을 하고, 말을 왜곡시는 데서 사탄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침묵함으로 사도들이 고난을 이겨 나가자 이제 신체적으로 압박해 옵니다.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습니까 어린 소녀를 사탄의 종노릇에서 구원한 이 선한 일의 결과가 고작 이렇게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칭찬과 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런 고난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옷은 찢어 벗겨졌습니다.
매로 많이 맞은 몸에서는 수많은 피멍울이 맺혔습니다.
치료받지 못한 채 착고에 채이고, 감옥에 갇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부당한 인간의 음모 속에서 어떻게 대처합니까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도 바울 일행은 면서도 어떻게 대처합니까
1 우선, 일체 말이 없습니다. 마치 내가 바로 사람입니다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 장본인입니다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쳐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선한 일을 하고도 인간들의 간교한 음모에 의하여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일체 말이 없습니다. 그는 아마 스데반을 생각했을른지 모릅니다. 지난 날 자신이 그들처럼 무지몽매 했음을 생각했을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런 부당한 인간의 음모에 의하여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일체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고통스런 나의 이 커다란 고난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경륜을 깊이 생각하지 못할 뿐입니다.
바울 일행들에게 부당한 음모를 꾸몄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충동질에 휘말려서 바울 일행의 옷을 찢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옥문을 여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날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난은 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최미화씨의 책에는 고난당하는 형제에게 이런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가 지방대표 선수보다 실력은 월등하지만
훈련은 훨씬 혹독하게 받습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침묵을 지키는 것은 사탄의 궤계를 묶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2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24-25)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생사가 달린 곳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칼이란 형틀이 있어서 목에 씌운 형틀의 잔혹함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다는 것입니다. 당시 착고에는 두 사람이 양편에 같이 묶여 있었다는 것이니 몹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낮에 몹시 많은 매를 맞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는 신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기사를 본문에서 대합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얼마나 충격적인 소식입니까 어떻게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이 극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답을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바로 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봅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0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가 감옥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왜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에베소서를 펴자마자 1장 서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
그들은 감옥에서 건축자들에 의하여 버려진 모퉁이 돌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없이 비난을 받으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얻어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옥에 갇치면서 비로소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찬송이 나올 수밖에요!
그들은 버려진 모퉁이 돌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들의 고난에 찬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찬송이 나올 수밖에요!
찬송하리로다 !
1 4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2 5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06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3 9 그 뜻의 비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4 1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 때, 그들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서 있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어떤 감옥이 여러분을 감싸고 있습니까 몰이해와 절망, 아픔과 한치 앞을 내어다 볼 수 없는 골짜기를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지금은 바로 기도할 수 있는 기회요, 찬송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맺음말
인생 길에서 우리는 잘 나가는 때를 만납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면전에 소낙비처럼 내립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탄의 음모는 달콤한 방식으로 우리를 늘 유혹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씁쓸한 고난으로 사탄이 공격해 올지라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사람들을 향해 침묵하십시오.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여십시오. 씁쓸한 고난으로 사탄이 공격해 올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기도하다 틈을 내어 찬양하십시오. 건축자들에 의하여 버려진 모퉁이 돌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묵상하실 때, 우리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달콤한 칭찬의 날에 사탄의 음모를 분별합시다.
씁쓸한 고난의 날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합시다.
우리가 선 땅은 천국의 한 지경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날 빌립보성이 사도 바울 일행에게 점령된 것처럼!
그러나 이 영적 전쟁은 매우 치열하고 심오한 것이어서 성령의 도움 없이는 이해조차도 불가능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안을 열어 주셔서 전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이 함께 이 복된 말씀을 이해하고 은혜를 받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빌립보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 칭찬 속에 있는 사탄의 음모를 극복하는 신앙으로 이루어집니다. (16-18)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듣고 싶어하는 칭찬입니까
그런데 바울 일행은 우군이 외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구호를 과감히 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왜일까요
여기서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헬라어 '호 데오스 호 휴시스토스')는 본래 뵈니게 사람들의 신(엘 헬루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히브리인들은 이 말로 야웨를 가리키고(민24:16;시78:35;사14:14;단3:26;4:32;5:
18,21;에스드라상2:3) 헬라인들은 제우스를 가리키는데에 사용하였습니다(Roberts, Skeat, Nock). 극존칭입니다.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닌데 자진하여 바울의 일행을 나팔 불어 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진하여 극존칭을 써 가면서 나선 것입니다. 이방지역에서 누구 하나 바울 일행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그때에,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닌데 자진하여 바울의 일행을 나팔 불어 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즈음과 같은 P. R. 의 시대에는 재정적인 투자를 해서라도 사고 싶어하는 상품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더구나 신통력을 가진 점쟁이로 알려진 소녀가 하는 말이니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세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같으면, 이런 소녀가 앞장 서서 외치는 것을 격려하고 좋다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지금 자기를 따라다니면서 자기를 높여주는 소녀의 칭찬을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보통 괴로워 한 것이 아니라 심히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호적인 소녀의 칭찬을 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설명을 유보하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 하나는 사도 바울 일행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러 왔지 자신을 선전하러 빌립보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바울일행을 높이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 일행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치명적인 사탄의 음모가 있습니다.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빌립보에서 확장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합니다. 바울 일행을 통하여 전파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 전하는 자에게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소녀의 외침으로 인해 전도자들은 외관상으로는 뜻하지 않았던 유명세를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는 복음의 선포보다 귀신의 말에 더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얻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온 천하를 들어 사도 바울 일행을 칭찬한다 해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기뻐하는 일일 뿐입니다. 복음의 길을 막는 사탄의 음모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음모를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또 하나의 이유는 사탄이 복음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벤트(Wendt)는 거룩한 복음이 부정한 영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사탄이 복음 사역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사탄의 힘을 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의 저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복음을 마술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복음의 신용을 해치기 위함이었을 것'(존 스토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기를 극존칭으로 높이며 외치고 다닐지라도 담대히 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이와 아울러 그 소녀의 딱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Lenski). 어린 소녀가 사탄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와서 도우라'드로아에서 보았던 환상을 생각했을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지 않습니다. 영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만 떠들고 다니지 예수 그리스도를 듣지 않습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을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사도 바울도 이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받는 불이익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이 그 딱한 소녀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바울은 돌이켜 그 귀신에게 명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이로 인하여 칭찬을 가장하여 다가 온 사탄과의 거래는 끊어졌습니다. 사탄으로부터 올 수 있는 모든 유익은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을 교묘히 막으려던 사탄의 궤계도 끊어졌습니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지혜를 얻게 됩니다. `칭찬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로구나!'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잠27:21)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는 말씀대로 사람을 시련하시는 칭찬을 깨어서 분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비난보다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바나바도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초대 예수살렘 교회 일곱 집사님들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란 분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행은 칭찬을 받을만한 충분한 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 일행은 한 가지 더 귀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칭찬 속에 담아 둔 사탄의 음모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칭찬을 받아야 함을 벌써 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칭찬 속에 얼마든지 스며들 수 있는 사탄의 음모를 경계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칭찬인가를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한 칭찬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말씀을 막는 칭찬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이런 영적 분별력!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에 참다운 칭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과 사탄의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하려는 망상을 끊으십시오. 그 안에 사탄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칭찬을 사모하십시오.
빌립보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2. 고난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이루어집니다. (19-23)
사도 바울 일행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극복하였을 때, 사탄은 또다른 시험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달콤한 칭찬이 아니라 쓰디쓴 고난입니다. 아무튼 복음이 유럽 땅에서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하니까요. 사도 바울 일행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극복하였을 때, 사탄은 세상(사람)으로부터 올 수 있는 모든 유익을 끊습니다. 대신 고난(苦難)으로 복음 전하는 자를 압박합니다. 복음 사역을 교묘히 막으려던 사탄의 궤계를 끊어버렸을 때, 사탄과의 거래를 끊어버렸을 때, 사탄은 쓰디쓴 고난으로 압박해 옵니다.
그들이 관원들에게 고소한 내용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싫어하는 로마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편견으로 충동질을 합니다.
-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였다!' 거짓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말을 왜곡시킵니다. 그러나 19절 말씀에서 우리는 실상을 보지 않습니까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이권이 없어지니까 대적하고 나서는 세력이 된 것입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충동질을 했고, 거짓 증언을 하고, 말을 왜곡시킵니다. 그들은 한 소녀가 일평생 사탄의 종노릇을 하며 살더라도 자신에게 물질적 혜택만 준다면 입이 벌어지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한 소녀가 일평생 매여 있던 사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더라도 물질적 손해가 오면 펄펄 뛰며 음모를 꾸미는 돈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종의 주인은 물질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복음 전하는 자를 이토록 무섭게 매도합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충동질을 하고, 거짓 증언을 하고, 말을 왜곡시는 데서 사탄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침묵함으로 사도들이 고난을 이겨 나가자 이제 신체적으로 압박해 옵니다.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습니까 어린 소녀를 사탄의 종노릇에서 구원한 이 선한 일의 결과가 고작 이렇게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칭찬과 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런 고난이 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옷은 찢어 벗겨졌습니다.
매로 많이 맞은 몸에서는 수많은 피멍울이 맺혔습니다.
치료받지 못한 채 착고에 채이고, 감옥에 갇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부당한 인간의 음모 속에서 어떻게 대처합니까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도 바울 일행은 면서도 어떻게 대처합니까
1 우선, 일체 말이 없습니다. 마치 내가 바로 사람입니다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 장본인입니다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쳐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선한 일을 하고도 인간들의 간교한 음모에 의하여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일체 말이 없습니다. 그는 아마 스데반을 생각했을른지 모릅니다. 지난 날 자신이 그들처럼 무지몽매 했음을 생각했을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이런 부당한 인간의 음모에 의하여 부당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일체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고통스런 나의 이 커다란 고난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과 경륜을 깊이 생각하지 못할 뿐입니다.
바울 일행들에게 부당한 음모를 꾸몄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충동질에 휘말려서 바울 일행의 옷을 찢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옥문을 여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날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고난은 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최미화씨의 책에는 고난당하는 형제에게 이런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가 지방대표 선수보다 실력은 월등하지만
훈련은 훨씬 혹독하게 받습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침묵을 지키는 것은 사탄의 궤계를 묶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2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24-25)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생사가 달린 곳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칼이란 형틀이 있어서 목에 씌운 형틀의 잔혹함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다는 것입니다. 당시 착고에는 두 사람이 양편에 같이 묶여 있었다는 것이니 몹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은 낮에 몹시 많은 매를 맞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는 신음밖에 나올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기사를 본문에서 대합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얼마나 충격적인 소식입니까 어떻게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이 극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답을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바로 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봅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0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가 감옥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왜요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들이 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에베소서를 펴자마자 1장 서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
그들은 감옥에서 건축자들에 의하여 버려진 모퉁이 돌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유없이 비난을 받으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얻어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옥에 갇치면서 비로소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찬송이 나올 수밖에요!
그들은 버려진 모퉁이 돌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들의 고난에 찬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찬송이 나올 수밖에요!
찬송하리로다 !
1 4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2 5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06 이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3 9 그 뜻의 비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4 1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 때, 그들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서 있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어떤 감옥이 여러분을 감싸고 있습니까 몰이해와 절망, 아픔과 한치 앞을 내어다 볼 수 없는 골짜기를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지금은 바로 기도할 수 있는 기회요, 찬송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맺음말
인생 길에서 우리는 잘 나가는 때를 만납니다. 사람들의 칭찬이 면전에 소낙비처럼 내립니다. 그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탄의 음모는 달콤한 방식으로 우리를 늘 유혹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씁쓸한 고난으로 사탄이 공격해 올지라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사람들을 향해 침묵하십시오. 대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여십시오. 씁쓸한 고난으로 사탄이 공격해 올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기도하다 틈을 내어 찬양하십시오. 건축자들에 의하여 버려진 모퉁이 돌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묵상하실 때, 우리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달콤한 칭찬의 날에 사탄의 음모를 분별합시다.
씁쓸한 고난의 날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합시다.
우리가 선 땅은 천국의 한 지경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날 빌립보성이 사도 바울 일행에게 점령된 것처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