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의 꿈을 가진 것을 감사
본문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구약을 잘 알게 되면 신약을 이해하기가 좋습니다. 나라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온 땅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고 다른 신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신들입니다. 송아지 각을 떠 놓고 불을 붙이지 말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태우신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여 어떤 신도 여호와 하나님과 똑같이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너무나도 포악하고 악을 행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망하시고 노아의 후손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노아의 후손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없이 고생 고생하여 바벨탑을 세웠는데 그 수고가 헛수고였습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없이 수고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그런 수고를 하지 않게 하려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파손된 선교사들을 위하여 물질로 후원을 하고 기도로 후원을 하는 것에 쓰임을 받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여야 할 일입니다.
불신앙적인 일은 더 큰 불행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큰 불행을 막기 위해서 뜨거운 열정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원을 하는 것입니다. 1902년 6월11일.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 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다가 눈을 넓은 땅으로 돌리고 큰 꿈을 그리고 있을 때에 아주 좋은 일군을 만났는데 사도바울의 마음에 꼭 들고 후계자의 역할을 할만한 디모데를 만난 것입니다. 디모데는 형제들에게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버지로부터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터인데 그것들을 거절하고 외할머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디모데는 가는 곳마다 덕을 세워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보통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그 희생을 기꺼이 지불하였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셔서 동서양의 경계선을 넘어 유럽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선교의 꿈을 가진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시선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야를 넓혀 지구촌 구석구석을 바라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선교는 대부분은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실 때 개인이나 민족에게 먼저 꿈을 주십니다. 성령은 젊은이들에게는 환상을 주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하십니다. (행2:17)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꿈과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꿈과 환상을 갖고 일을 해야 합니다.
첫째, 선교의 꿈을 가진 것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아시아 쪽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인간적인 열심과 생각만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아시아나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드로아로 내려가서 마게도니아의 환상을 본 후에야 비로소 떠날 것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 꿈과 환상을 지닌 다음에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언제나 위대한 꿈과 환상을 주신 후에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가장 큰 일에 이르기까지 꿈과 환상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비두니아는 그 당시에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이기 때문에 거기에 가려고 애를 많이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그대신에 드로아로 가게 되어 거기에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것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로아로 파송하심에는 큰 뜻이 있음을 믿고 열심히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습니다. 애도니럼 저스든은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였으나 인도에 문이 열리지 않아 버마로 가서 버마에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인도를 지망하였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한국에 파송하여 아름다운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힘있게 의지하고 전한 사람들은 전도의 문을 넓게 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렇게 반대를 하는 것을 보니 포기다 하고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많은 사람들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실패를 하지만 꿈을 간직한 사람은 성공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케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빌립보지역에 가서 강가에 안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루디아는 이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빌립교회를 세우는데 한몫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장사를 하면서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순풍을 만나면 2일이 걸리고 역풍을 만나면 5일 이상 걸렸지만 성령께서 도우셔서 이틀 만에 빌립보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안 온 식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아 이웃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루디아의 봉사정신을 참으로 뛰어났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기도처로 가는 길에 귀신에 붙잡혀 점을 쳐서 주인을 이롭게 하는 여인을 만나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여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점을 보지 못하므로 수입이 끊어진 것을 더큰 것으로 생각을 하고 바울과 실라는 관가로 끌고 가서 고발하자 관가에서 신분도 확인도 하지 않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루디아와 같은 부자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붙잡혀 점을 보는 여인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위험한 곳을 지날 때에는 음성으로 확신을 주시고 어려운 일을 할 때에는 좋은 협력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여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기도의 사역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꿈을 허락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면 소망의 기도를 하였고 평강을 위한 기도를 하였고 통찰력을 위한 기도를 하였고 환란에 대한 기도를 하였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늘 묵상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가 큰 꿈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일찍이 알게 되었고 끝까지 사도 바울의 목회 사역을 도왔습니다.
둘째, 선교의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운 것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꿈을 가진 후 그 꿈을 현실로 옮겨 놓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가는 꿈을 꾸고 그러한 환상을 가졌었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었다면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환상을 본 후 곧 마게도니아로 가려고 힘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16:9)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구체화시켜야 합니다. 기독교는 불가능 것을 가능케 하는 종교입니다. 귀신에 붙잡혀 꺼꾸러져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점점 말라가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 와서 무엇을 하실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소서 하였습니다.
막9:23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그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하였습니다. 그일로 아이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 신앙으로 '하면 된다'는 강한 정신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의 꿈과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매일 바라보고 소원하면 그 일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 목표를 정하여 좇아가려고 합니다. 또한 좇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삶의 의욕을 느낍니다. 하지만 늘 좇기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앞날이 불투명할 뿐 아니라 당면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좇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뜬구름을 잡을 듯이 허황된 것들을 좇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실이나 객관적인 사실은 무시하고, 뭔가 앞날에 좋은 일만 있을 것처럼 여기면서 뛰어가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직전인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만 속으로는 탄식과 절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좇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여호와 하나님의 높은 뜻과 그 큰 경륜 속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뜻을 압니다. 과거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고 미래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 현실이 절대로 잘못된 것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이 큰 뜻과 경륜으로써 나를 부르고 계심을 믿고 이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무조건 따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인이란 주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없나이다"라고 아뢰었을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다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만이 주님을 바로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대개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은 쉽게 도중하차(途中下車)합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기를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서기관의 자원하는 마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
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응답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추측컨대 이 사람은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만 산 사람이 어찌 이런 고생을 할 수 있겠나"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 같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면 무언가 근사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를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를 따르고 그 은혜를 입으려면 세상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너는 그렇게 버릴만한 사람이 못 된다 따라서 나를 따라오는 것은 안된다"라고 엄히 견책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목표달성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다른 사람도 넘어지게 만듭니다. 마음을 정리하여 가장 기본적인 구속의 도를 생각하고 그 도를 깨닫고 믿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다른 사람은 부친 장사부터 하고 난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주님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좇는 일에 있어서 무언가 단서를 달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사족(蛇足)을 달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燔祭)로 바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서 자기 아내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의하면 틀림없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주님을 마지못해 따라가다가 결국 가룟유다가 되기 쉽습니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바울을 저버린 데마 같은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주님은 복음사업에 우리를 쓰시기 위해 부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적절한 직임을 주시면서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인 가치가있고 사활적(死活的, Vital)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어중간한 입장에 서지 말고 우리의 태도를 확실히 합시다. 그래서 이제 주님을 온전히 좇고 온전히 배우며 주님 명령하시는 대로 준행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감사함으로 맡겨야 합니다.
바울이 꿈과 환상을 갖고 담대히 나갈 때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첫 안식일에 기도하러 가던 바울 일행은 자주 장사를 하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배드릴 장소를 찾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하여(행16:14) 바울로 하여금 그녀의 집에 유숙하게 하셨고 그곳을 예배의 장소로 정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것 때문에 그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감옥에 들어가 간수를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의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을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선교를 위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 나아가는 자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마28:20)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의 꿈을 가진 사람에게 임마누엘로 큰 기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작하시면 반드시
마무리하시고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을 때 먼저 이스라엘 경 내에서만 사역해야 함을 아시고 이방으로 가자고 했을 때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마무리하셨습니다. 먼저 12 제자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그 다음 오순절 성령 강림과 더불어 복음이 유다 → 사마리아 → 땅끝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아직 성령을 받기 전에 그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기까지는 잠잠히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망의 상태를 완전히 제거하신 후 그때부터 요구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 단계로 자기의 구원 사역을 완수해 나가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가는 法을 배워야 합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한 걸음씩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인간 개인에게는 미래에 대한 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소원을 받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즉 분명한 비젼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비젼은 누구든지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비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지에 대해서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실현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한 걸음씩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System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어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는 매 단계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한 것입니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여호와 하나님이 방주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합니다. 자기의 을 실현 못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뜻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보다 앞선다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로막은 문을 여셔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것은 그의 영혼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정성스럽게 제단을 쌓음을 통해 지난 심판기간동안 경험했던 바와 앞으로 해야 할 과제들이 얼마나 그를 마음 깊숙이 움직였음을 나타내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다음에 구원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보다 구원 수단에게 헌신과 경배를 주셨습니다. 러시아는 찬란한 교회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그 백성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무관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력 있는 관계로부터 흘러내리는"교제"가 없을 때 그 모든 찬란한 건물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고 불 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상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아가 종교개혁을 감행했을 때 놋뱀을 파괴한 것을 기억한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눈은 모세에게 놋뱀을 세우라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고 구원의 수단인 놋뱀에게만 머물고 우상화하다가 민족이 타락한 것입니다.
참된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은 죽은 형식주의가 아니라 영혼의 언어인 것이다. 이 영혼의 언어는 자기의 가장 깊고 거룩한 부분을 말로 표현하며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노아가 먼저 제단을 쌓고 그 다음 주거지를 만들고 그 다음 마지막으로 포도원을 건설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 할만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먼저 물질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서 형통하려면 자기를 죽이는 일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 하시는 대로 한걸음씩 옮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인 일은 더 큰 불행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큰 불행을 막기 위해서 뜨거운 열정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원을 하는 것입니다. 1902년 6월11일.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 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다가 눈을 넓은 땅으로 돌리고 큰 꿈을 그리고 있을 때에 아주 좋은 일군을 만났는데 사도바울의 마음에 꼭 들고 후계자의 역할을 할만한 디모데를 만난 것입니다. 디모데는 형제들에게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도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버지로부터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터인데 그것들을 거절하고 외할머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디모데는 가는 곳마다 덕을 세워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보통 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그 희생을 기꺼이 지불하였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셔서 동서양의 경계선을 넘어 유럽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선교의 꿈을 가진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시선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야를 넓혀 지구촌 구석구석을 바라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선교는 대부분은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실 때 개인이나 민족에게 먼저 꿈을 주십니다. 성령은 젊은이들에게는 환상을 주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하십니다. (행2:17)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꿈과 환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꿈과 환상을 갖고 일을 해야 합니다.
첫째, 선교의 꿈을 가진 것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꿈과 환상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아시아 쪽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인간적인 열심과 생각만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아시아나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을 때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드로아로 내려가서 마게도니아의 환상을 본 후에야 비로소 떠날 것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 꿈과 환상을 지닌 다음에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언제나 위대한 꿈과 환상을 주신 후에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가장 큰 일에 이르기까지 꿈과 환상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비두니아는 그 당시에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이기 때문에 거기에 가려고 애를 많이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그대신에 드로아로 가게 되어 거기에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것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 가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로아로 파송하심에는 큰 뜻이 있음을 믿고 열심히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습니다. 애도니럼 저스든은 인도에 선교사로 가려고 하였으나 인도에 문이 열리지 않아 버마로 가서 버마에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인도를 지망하였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한국에 파송하여 아름다운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힘있게 의지하고 전한 사람들은 전도의 문을 넓게 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렇게 반대를 하는 것을 보니 포기다 하고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많은 사람들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실패를 하지만 꿈을 간직한 사람은 성공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케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빌립보지역에 가서 강가에 안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루디아는 이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빌립교회를 세우는데 한몫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장사를 하면서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왔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순풍을 만나면 2일이 걸리고 역풍을 만나면 5일 이상 걸렸지만 성령께서 도우셔서 이틀 만에 빌립보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안 온 식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아 이웃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루디아의 봉사정신을 참으로 뛰어났습니다.
바울의 일행이 기도처로 가는 길에 귀신에 붙잡혀 점을 쳐서 주인을 이롭게 하는 여인을 만나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여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점을 보지 못하므로 수입이 끊어진 것을 더큰 것으로 생각을 하고 바울과 실라는 관가로 끌고 가서 고발하자 관가에서 신분도 확인도 하지 않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루디아와 같은 부자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붙잡혀 점을 보는 여인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위험한 곳을 지날 때에는 음성으로 확신을 주시고 어려운 일을 할 때에는 좋은 협력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여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기도의 사역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꿈을 허락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를 살펴보면 소망의 기도를 하였고 평강을 위한 기도를 하였고 통찰력을 위한 기도를 하였고 환란에 대한 기도를 하였고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를 늘 묵상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가 큰 꿈을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일찍이 알게 되었고 끝까지 사도 바울의 목회 사역을 도왔습니다.
둘째, 선교의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운 것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꿈을 가진 후 그 꿈을 현실로 옮겨 놓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가는 꿈을 꾸고 그러한 환상을 가졌었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었다면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환상을 본 후 곧 마게도니아로 가려고 힘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16:9)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구체화시켜야 합니다. 기독교는 불가능 것을 가능케 하는 종교입니다. 귀신에 붙잡혀 꺼꾸러져서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점점 말라가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 와서 무엇을 하실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소서 하였습니다.
막9:23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그 아이의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하였습니다. 그일로 아이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긍정적 신앙으로 '하면 된다'는 강한 정신적인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의 꿈과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매일 바라보고 소원하면 그 일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언가 목표를 정하여 좇아가려고 합니다. 또한 좇아가려고 할 때 비로소 삶의 의욕을 느낍니다. 하지만 늘 좇기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앞날이 불투명할 뿐 아니라 당면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좇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뜬구름을 잡을 듯이 허황된 것들을 좇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실이나 객관적인 사실은 무시하고, 뭔가 앞날에 좋은 일만 있을 것처럼 여기면서 뛰어가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직전인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만 속으로는 탄식과 절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좇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여호와 하나님의 높은 뜻과 그 큰 경륜 속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뜻을 압니다. 과거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고 미래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내 현실이 절대로 잘못된 것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이 큰 뜻과 경륜으로써 나를 부르고 계심을 믿고 이에 진실하게 응답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무조건 따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인이란 주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없나이다"라고 아뢰었을 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다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자만이 주님을 바로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대개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은 쉽게 도중하차(途中下車)합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기를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서기관의 자원하는 마음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
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응답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추측컨대 이 사람은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편안하게만 산 사람이 어찌 이런 고생을 할 수 있겠나"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 같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면 무언가 근사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를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나를 따르고 그 은혜를 입으려면 세상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너는 그렇게 버릴만한 사람이 못 된다 따라서 나를 따라오는 것은 안된다"라고 엄히 견책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목표달성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다른 사람도 넘어지게 만듭니다. 마음을 정리하여 가장 기본적인 구속의 도를 생각하고 그 도를 깨닫고 믿는 일에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다른 사람은 부친 장사부터 하고 난 다음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 주님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좇는 일에 있어서 무언가 단서를 달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조건,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사족(蛇足)을 달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燔祭)로 바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서 자기 아내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의하면 틀림없이 안 된다고 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주님을 마지못해 따라가다가 결국 가룟유다가 되기 쉽습니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바울을 저버린 데마 같은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주님은 복음사업에 우리를 쓰시기 위해 부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적절한 직임을 주시면서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인 가치가있고 사활적(死活的, Vital)인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어중간한 입장에 서지 말고 우리의 태도를 확실히 합시다. 그래서 이제 주님을 온전히 좇고 온전히 배우며 주님 명령하시는 대로 준행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감사함으로 맡겨야 합니다.
바울이 꿈과 환상을 갖고 담대히 나갈 때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첫 안식일에 기도하러 가던 바울 일행은 자주 장사를 하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배드릴 장소를 찾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게 하여(행16:14) 바울로 하여금 그녀의 집에 유숙하게 하셨고 그곳을 예배의 장소로 정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것 때문에 그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감옥에 들어가 간수를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의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을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선교를 위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선교를 위해 나아가는 자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마28:20)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의 꿈을 가진 사람에게 임마누엘로 큰 기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일을 시작하시면 반드시
마무리하시고 다시 시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을 때 먼저 이스라엘 경 내에서만 사역해야 함을 아시고 이방으로 가자고 했을 때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마무리하셨습니다. 먼저 12 제자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그 다음 오순절 성령 강림과 더불어 복음이 유다 → 사마리아 → 땅끝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아직 성령을 받기 전에 그들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기까지는 잠잠히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망의 상태를 완전히 제거하신 후 그때부터 요구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 단계로 자기의 구원 사역을 완수해 나가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가는 法을 배워야 합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한 걸음씩 여호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인간 개인에게는 미래에 대한 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소원을 받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즉 분명한 비젼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나의 비젼은 누구든지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비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지에 대해서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실현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한 걸음씩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System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어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까지 여러 단계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는 매 단계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한 것입니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여호와 하나님이 방주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합니다. 자기의 을 실현 못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의 뜻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보다 앞선다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로막은 문을 여셔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은 것은 그의 영혼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정성스럽게 제단을 쌓음을 통해 지난 심판기간동안 경험했던 바와 앞으로 해야 할 과제들이 얼마나 그를 마음 깊숙이 움직였음을 나타내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다음에 구원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보다 구원 수단에게 헌신과 경배를 주셨습니다. 러시아는 찬란한 교회로 가득한 곳이다. 그러나 그 백성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무관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력 있는 관계로부터 흘러내리는"교제"가 없을 때 그 모든 찬란한 건물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고 불 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인 사상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아가 종교개혁을 감행했을 때 놋뱀을 파괴한 것을 기억한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눈은 모세에게 놋뱀을 세우라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고 구원의 수단인 놋뱀에게만 머물고 우상화하다가 민족이 타락한 것입니다.
참된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은 죽은 형식주의가 아니라 영혼의 언어인 것이다. 이 영혼의 언어는 자기의 가장 깊고 거룩한 부분을 말로 표현하며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가시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노아가 먼저 제단을 쌓고 그 다음 주거지를 만들고 그 다음 마지막으로 포도원을 건설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 할만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먼저 물질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에서 형통하려면 자기를 죽이는 일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 하시는 대로 한걸음씩 옮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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