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하나님의 선교와 인간의 참여
본문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여러 선교사님과 가정, 그리고 선교사역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사순절을 준비하는 전 절기로서 사순절 전 둘째 주일의 설교 본문인 사도행전 16장 9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을 '개역개정판'으로 봉독 하겠습니다.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 함이러라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1)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아멘
오늘 우리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해서 마케도니아(유럽)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즉 선교지리학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9-10절). 다시 말하면, 복음이 시리아와 아시아로부터 오늘의 유럽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심적인 신학적 개념은, 선교의 주체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선교의 지역 선정과 그 선교사역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모든 일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주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선교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첫째로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계획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예수의 영을 통하여 두 차례나 그 길을 막으신 일입니다(6-7절은 소극적 측면). 둘째는 환상 가운데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을 불렀고, 바울과 일행은 이 환상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해석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일입니다(9-10절은 적극적 측면).
본문의 둘째 부분은 첫 부분의 연장으로서, 여기서는 마케도니아의 첫 도시 빌립보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11-15절).
사도 바울의 일행은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하였습니다.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거기서 일박한 후에, 다시 떠나 네압볼리에 도달하였습니다. 이곳은 빌립보의 항구 도시로 바울이 선교 거점으로 정한 빌립보와는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얼마후에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11-12절)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안식일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성밖으로 나가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거기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 모인 여인들 가운데에는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색 의류를 판매하는 상인 루디아도 있었습니다. 원래 소아시아 터키 반도 서부에 있는 두아디라는 자색 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자색 옷감은 실크로드를 거쳐 온 비단 다음으로 호사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색 옷감은 고가품의 고급의류였고, 필경 루디아는 꽤나 부유층 여인이라 생각됩니다.
바울 일행은 그들의 선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루디아의 마음 문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온집이 다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리하여 루디아의 집은 바울과 일행에게 빌립보 선교의 전초기지로 제공되었습니다(13-15, 30절).
이후로 바울의 빌립보 선교는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하였고(행16:16-40), 바로 그곳에 유럽 기독교의 모교회이자 바울이 세운 교회중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의 관계에서 하나의 '키워드'(key word, 열쇠말)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배려 그리고 도움과 돌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어려움에 처하여 있을 때, 외롭고 궁핍할 때 그를 위로하고 물질적으로 가장 크게 도움을 준 교회였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퍽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서 참조).
이토록 바울과 빌립보교회 관계와 그리고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유럽지역의 첫 교회를 성공적으로 세운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본문의 둘째 부분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인간의 참여'입니다. 선교의 주체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선교의 모든 주도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면서 그 선교의 방향을 정하시고 진행시켜 가시지만, 그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인간의 참여가 결코 배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즉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인간의 참여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것을 신학에서는 '신물적 상호관계'(die theonome Reziprozitat) 혹은 '신물적 상호작용'이라 합니다. 이 관계 개념은 '신령한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관계,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는 일'과의 관계,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면서도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실현되는 것의 관계, 즉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기적'과 인간이 힘써서 노력함으로써 개발된 '기술'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신물적 상호관계(혹은 작용)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을 말한다면, 두가지의 관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그 일은 바울과 그의 일행, 그리고 바울의 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루디아와 빌립보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와 인간의 참여'를 말하고 있는 아주 적절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와 우리 인간들의 참여'에 대하여 함께 살펴 보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즉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미시오데이'(Missio Dei)라는 선교개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란 단지 선교의 주체자(주인)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거창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를 유보하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 역사와 선교를 주관해 가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미 우리가 앞서 살펴 본바대로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행16:7)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케도냐 지방의 빌립보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마케도냐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행16:10).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하여, 그녀의 마음문을 열게 하시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하신 분 역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시고, 그곳에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 바울로 하여금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세우게 하신 이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체자가 되셔서 유럽에서의 첫 교회 빌립보 교회를 세우시고, 빌립보교회로 하여금 유럽선교와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토록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의 주체자가 되셔서 모든 선교를 주관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로 선교사로 부르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이 되십니다. 특히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 즉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으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 길을 가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사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같은 일들을 많이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잠언의 지혜자가 통찰한 것처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 있다는 것,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을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나는 1960년대 말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대구선교회에서 인선을 하고 (물론 대구선교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임) 나로 하여금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갈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때는 개인적인 사정들이 그 결정과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막 시작하였고, 가정의 맏아들로서의 책임도 있었고, 그리고 나의 꿈과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으로 유학 가는 일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는 계속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때는 서울 새문안교회 대학부를 지도하였고, 야간으로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으로 일했으며, 낮으로는 대학원생으로, 또한 연희동 B지구 영세민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주민조직 훈련생으로, 대학원 교수의 조교로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는 대학원생으로 연세대 연합신학원에서 공부하는 2년간의 기간은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였고,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연세대 연합신학원에 입학한 것도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원래 장신대 대학원에서 박창환 교수님의 제자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우리 학교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으니다른 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심히 섭해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을 막으시고 연신원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나는 연신원에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신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대학원에 오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때에 비로소 박 교수님께서 나를 무척 섭섭하게 한, 그 거절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게서 나를 인도 하시는 그 손길을, 그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대학원에서의 신학 수업은, 그동안의 나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심한 충격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 도전은 나로 하여금 교회의 의미와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묻게 했으며, 또한 지금의 교리 문제로 고뇌하게 하고, 신학은 왜하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묻게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도전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은 나로 하여금 '어찌할꼬'라는 위기의식을 갖게 하였고, 인식의 전환을 가져 오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인식의 전환은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일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보는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나는 이같은 새로운 인식으로 한국의 어려운 역사적인 상황에서 1970년대 초반을 젊은 목사로서 '정열을 다하여'(leidenschaglich)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나는 미국 유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 길도 막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길, 새로운 길을 보이시고, 그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 길이 독일로 가는 선교사의 길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선교사길을 막으시고, 또한 미국의 유학길을 막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일 선교사로 부르시고 택하셔서 그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독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라인데, 놀랍게도 나로 하여금 독일 선교사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1976년 5월에 한국교회(예장 통합과 KNCC)의 파송과 독일교회(뷔르템베르그주 교회와 EKD)의 초청과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독일 남부지방 전역에 흩어져 사는 한인 교포 목회(선교)를 위한 선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만 7년을 봉직하였으며, 3년은 하이델베르그 대학 신학부 실천신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만 10년만에 1986년 3월에 귀국하여 목회자로 신학대학 총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지금은 목회자들을 위한 연구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나는 지난날의 여정을 회고하고 회상해보면,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손길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심을 새로운 길을 예비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놀라운 손을 보면서 감격하고 놀라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할 정도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막으심은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를 인도하시고 간섭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선교 역사에 우리들의 참여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교를 주도하시지 마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같은 인식이 우리들에게 분명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를 협력하도록 참으로 훌륭한 동역자 루디아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이들, 여호와 하나님의 동역자로, 즉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열매를 열게 합니다. 이것을 농원주인과 농원지기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과수원의 주인이고, 과수원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수원을 과수원지기인 우리들에게 맡겨 일하게 하시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과수원지기가 열심히 일해야만, 즉 과수원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풀을 뽑아 주고,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농약을 치며 관리를 잘해야 아름답고 알찬 열매(과실)을 얻게 되는 이치는 선교사역에도 해당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과수원에 선교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시고 선교 현장에 파송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선교를 이룩하십니다.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한 선교의 열매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도구로서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선교의 공장에서 마이스터(Meister)입니다. 우리는 마이스터인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잡힌 '공구'(Werkzeug)입니다. 마이스터는 공구 없이는 아무일도 못합니다. 마이스터는 좋은 공구를 잡고서 비로소 훌륭한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공구(혹은 도구)로 사용하셔서 선교사역을 이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훌륭한 선교사로, 도구로 사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 함이러라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1)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아멘
오늘 우리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해서 마케도니아(유럽)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즉 선교지리학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9-10절). 다시 말하면, 복음이 시리아와 아시아로부터 오늘의 유럽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심적인 신학적 개념은, 선교의 주체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선교의 지역 선정과 그 선교사역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모든 일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주도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선교의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첫째로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계획했으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예수의 영을 통하여 두 차례나 그 길을 막으신 일입니다(6-7절은 소극적 측면). 둘째는 환상 가운데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을 불렀고, 바울과 일행은 이 환상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해석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일입니다(9-10절은 적극적 측면).
본문의 둘째 부분은 첫 부분의 연장으로서, 여기서는 마케도니아의 첫 도시 빌립보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11-15절).
사도 바울의 일행은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하였습니다.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거기서 일박한 후에, 다시 떠나 네압볼리에 도달하였습니다. 이곳은 빌립보의 항구 도시로 바울이 선교 거점으로 정한 빌립보와는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얼마후에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11-12절)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안식일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성밖으로 나가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거기는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거기 모인 여인들 가운데에는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주색 의류를 판매하는 상인 루디아도 있었습니다. 원래 소아시아 터키 반도 서부에 있는 두아디라는 자색 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자색 옷감은 실크로드를 거쳐 온 비단 다음으로 호사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색 옷감은 고가품의 고급의류였고, 필경 루디아는 꽤나 부유층 여인이라 생각됩니다.
바울 일행은 그들의 선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루디아의 마음 문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온집이 다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리하여 루디아의 집은 바울과 일행에게 빌립보 선교의 전초기지로 제공되었습니다(13-15, 30절).
이후로 바울의 빌립보 선교는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하였고(행16:16-40), 바로 그곳에 유럽 기독교의 모교회이자 바울이 세운 교회중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졌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의 관계에서 하나의 '키워드'(key word, 열쇠말)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배려 그리고 도움과 돌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어려움에 처하여 있을 때, 외롭고 궁핍할 때 그를 위로하고 물질적으로 가장 크게 도움을 준 교회였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퍽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서 참조).
이토록 바울과 빌립보교회 관계와 그리고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유럽지역의 첫 교회를 성공적으로 세운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본문의 둘째 부분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인간의 참여'입니다. 선교의 주체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선교의 모든 주도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면서 그 선교의 방향을 정하시고 진행시켜 가시지만, 그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인간의 참여가 결코 배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즉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인간의 참여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것을 신학에서는 '신물적 상호관계'(die theonome Reziprozitat) 혹은 '신물적 상호작용'이라 합니다. 이 관계 개념은 '신령한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관계,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는 일'과의 관계,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생기면서도 모든 것이 '인간으로부터' 실현되는 것의 관계, 즉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기적'과 인간이 힘써서 노력함으로써 개발된 '기술'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신물적 상호관계(혹은 작용)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을 말한다면, 두가지의 관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선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그 일은 바울과 그의 일행, 그리고 바울의 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루디아와 빌립보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와 인간의 참여'를 말하고 있는 아주 적절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와 우리 인간들의 참여'에 대하여 함께 살펴 보려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즉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미시오데이'(Missio Dei)라는 선교개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란 단지 선교의 주체자(주인)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 거창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를 유보하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 역사와 선교를 주관해 가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미 우리가 앞서 살펴 본바대로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행16:7)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마케도냐 지방의 빌립보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마케도냐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행16:10).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하여, 그녀의 마음문을 열게 하시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하신 분 역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온 집안 식구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시고, 그곳에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 바울로 하여금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세우게 하신 이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체자가 되셔서 유럽에서의 첫 교회 빌립보 교회를 세우시고, 빌립보교회로 하여금 유럽선교와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토록 여호와 하나님은 선교의 주체자가 되셔서 모든 선교를 주관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로 선교사로 부르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이 되십니다. 특히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 즉 우리가 가려고 했던 그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으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 길을 가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사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같은 일들을 많이 경험하기도 하였습니다. 잠언의 지혜자가 통찰한 것처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 있다는 것,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을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나는 1960년대 말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대구선교회에서 인선을 하고 (물론 대구선교회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임) 나로 하여금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갈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때는 개인적인 사정들이 그 결정과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학원 공부를 막 시작하였고, 가정의 맏아들로서의 책임도 있었고, 그리고 나의 꿈과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으로 유학 가는 일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는 계속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때는 서울 새문안교회 대학부를 지도하였고, 야간으로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으로 일했으며, 낮으로는 대학원생으로, 또한 연희동 B지구 영세민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주민조직 훈련생으로, 대학원 교수의 조교로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는 대학원생으로 연세대 연합신학원에서 공부하는 2년간의 기간은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하였고,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연세대 연합신학원에 입학한 것도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원래 장신대 대학원에서 박창환 교수님의 제자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우리 학교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으니다른 학교에 가서 공부하라"고 거절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심히 섭해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신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을 막으시고 연신원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나는 연신원에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신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대학원에 오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때에 비로소 박 교수님께서 나를 무척 섭섭하게 한, 그 거절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으며, 여호와 하나님게서 나를 인도 하시는 그 손길을, 그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대학원에서의 신학 수업은, 그동안의 나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심한 충격과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 도전은 나로 하여금 교회의 의미와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묻게 했으며, 또한 지금의 교리 문제로 고뇌하게 하고, 신학은 왜하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묻게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도전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은 나로 하여금 '어찌할꼬'라는 위기의식을 갖게 하였고, 인식의 전환을 가져 오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인식의 전환은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일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보는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나는 이같은 새로운 인식으로 한국의 어려운 역사적인 상황에서 1970년대 초반을 젊은 목사로서 '정열을 다하여'(leidenschaglich)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나는 미국 유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 길도 막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른길, 새로운 길을 보이시고, 그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 길이 독일로 가는 선교사의 길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선교사길을 막으시고, 또한 미국의 유학길을 막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일 선교사로 부르시고 택하셔서 그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독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라인데, 놀랍게도 나로 하여금 독일 선교사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1976년 5월에 한국교회(예장 통합과 KNCC)의 파송과 독일교회(뷔르템베르그주 교회와 EKD)의 초청과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독일 남부지방 전역에 흩어져 사는 한인 교포 목회(선교)를 위한 선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만 7년을 봉직하였으며, 3년은 하이델베르그 대학 신학부 실천신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만 10년만에 1986년 3월에 귀국하여 목회자로 신학대학 총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지금은 목회자들을 위한 연구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나는 지난날의 여정을 회고하고 회상해보면,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손길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심을 새로운 길을 예비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시는 놀라운 손을 보면서 감격하고 놀라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 할 정도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막으심은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를 인도하시고 간섭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선교 역사에 우리들의 참여 문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교를 주도하시지 마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같은 인식이 우리들에게 분명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를 협력하도록 참으로 훌륭한 동역자 루디아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이들, 여호와 하나님의 동역자로, 즉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열매를 열게 합니다. 이것을 농원주인과 농원지기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과수원의 주인이고, 과수원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수원을 과수원지기인 우리들에게 맡겨 일하게 하시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과수원지기가 열심히 일해야만, 즉 과수원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풀을 뽑아 주고,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농약을 치며 관리를 잘해야 아름답고 알찬 열매(과실)을 얻게 되는 이치는 선교사역에도 해당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과수원에 선교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시고 선교 현장에 파송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선교를 이룩하십니다.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한 선교의 열매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도구로서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선교의 공장에서 마이스터(Meister)입니다. 우리는 마이스터인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잡힌 '공구'(Werkzeug)입니다. 마이스터는 공구 없이는 아무일도 못합니다. 마이스터는 좋은 공구를 잡고서 비로소 훌륭한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공구(혹은 도구)로 사용하셔서 선교사역을 이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훌륭한 선교사로, 도구로 사용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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