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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1차 선교여행의 사역과 결과

본문

그렇습니다. 믿음은 씨앗입니다. 믿음은 어떤 역경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 맺히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우리 속에 믿음이 있음을 즐거워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고 해도 믿음이 있음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므로 탄식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믿음을 더욱 불일듯하게 하게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모든 것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도시에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로 파송받았을 때 그들은 성령의 지시인 줄 알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이방 지역으로 복음 그것은 아무나 쉽게 또는 간단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러므로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내용을 전파하기 위하여 나섰습니다. 예상대로 많은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고난을 이길 힘도 권력도 돈도 없었습니다. 저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야 했습니다. 쫓아내면 쫓겨가야 했습니다. 이들이 당한 고난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저들이 갖지 아니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마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맡은 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부족하지만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믿었습니다.
1. 본문 19- 20절에서 바울의 사역은 계속되는 고난의 연속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간교하고 끈질긴 면을 보여주는 것은 19절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라는 구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버려두고 먼 곳에서 부터 와서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간교합니다. 사탄은 방해의 앞잡이입니다. 결국 바울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을 때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증거하던 스데반의 그 모습이 생각났을 겁니다. 그는 돌에 맞아 고통의 쓰라림이 다가올 때 무엇이 위대한 것인줄 알았습니다. 스데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고 이 복음의 확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고난 그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아무렇게나 파생된 단어는 아니었음이 이해됩니다.
모든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간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예는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난당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 양식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벤츠 650을 구입하지 못하여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포장마차를 시작할 돈이 없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줄이기 위하여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몸무게를 늘리기 위하여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은 할 일이 없어서 고민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고민합니다. 지금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 중에도 육신의 질고로 고통당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건강한대도 불구하고 염려로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공통적으로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일 수 밖에 없는 인생 삶에 있어서 보람있는 고생이 있고 허무한 고생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여 혹은 무엇을 위하여 일하는가에 따라서 달아집니다. 우리의 고난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일 할 때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 수고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말하기를 모든 훈련이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도리어 쓰라린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연단받은 사람들에게 의의 화평한 열매를 맺게하여 준다고 했습니다(히12: 11). 고난으로 연단받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면 그 고생은 고생이 아닙니다. 야고보 장로도 말하기를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연단이 인내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내력을 온전히 발휘할 때 조금도 결함이 없는 성숙하고 원만한 성도가 된다고 했습니다(약1: 2- 4).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알고 계시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 말씀을 붙잡고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충성하는 자에게는 정녕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계2: 10).
우리가 힘들게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있을 때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일수록 더욱 조심하여 합니다. 더욱 신실된 자세로 일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어떤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공의 길로 나아갈 때 더욱 심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패와 좌절 고통과 탄식의 때가 더욱 참담할수록 우리가 나아갈 앞 길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오히려 개인 뿐만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땅의 것 뿐 아니라 하늘의 것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2. 본문 20- 23절에서 고난이 계속되는 사역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운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더욱 새롭게 조직하였습니다.
온 교회가 금식한 후에 장로들을 세웠습니다. 지도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자치하도록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일은 유대권 밖에 있는 교회의 첫 번째 조직이었습니다.
요한 위슬레가 광산촌을 돌아다니며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 마다 설교했습니다. 그 후 어떤 유명한 목회자가 그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였습니다. 탄광에 사는 그들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집들은 아담하고 깨끗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쑥하고 친절과 웃음이 넘쳤습니다. 어떻게 하여 이곳이 이렇게 변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여러 해 전에 요한 웨슬레가 이곳에 와서 설교를 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아울러 교회의 조직은 필요합니다. 그 조직을 통하여 성도의 결속을 듣든히 하고 말씀에 굳게 서게 합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를 돌아보며 장로를 세워야 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바나바가 자신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한 일이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유력한 사람이 교회 성도 간의 관계를 부드럽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새로운 일군이 공동체 안에서 속히 연합할 수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공동체는 더욱 견고히 서 가는 겁니다. 유력한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교회로서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도자들을 통하여 교회는 여간한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만약 교회에 든든한 지도자가 서 있지 않을 때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그 단체는 와해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핍박의 수난 속에서도 교회의 성장과 장래를 기억하여 지도자를 산택하여 세운 겁니다.
고난 속에서도 장래를 기억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보장된 미래가 있습니다. 미국에 1920년대 말 경제적인 한파가 몰아칠 때 많은 사람들은 움추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의 때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커다란 프로젝트를 꿈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이렇게 어려울 때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세계최대의 건물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시도했습니다. 미국의 뉴욕 맨허턴에 세워진 102층 381M 에 달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그것입니다. 이 빌딩은 1931년에 완성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한 사람의 각오와 실천은 세계적인 명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직장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각오와 즉거운 마음으로 교회를 조직하던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이런 원리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대가 넓어야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둑의 세계 1인자의 자리를 고수하는 이창호 9단은 가로 4
2. 5, 세로 45. 5Cm 밖에 안되는 좁은 공간에서 돈도 명예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마이다 아키 라는 쇼와여대 재학생은 전공이 교사 지망생으로 공부했습니다. 이 소녀의 꿈은 애완동물을 어떻게 하면 늘 함께 데리고 다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꿈이 디지털 애완동물 다마곳치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아키 양은 고액 납세자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사회 정치적으로 혼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의 때 일수록 우리의 각오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추스러야 합니다.
3. 본문 24- 25절에서는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는 전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매맞은 장소 배척받은 받은 장소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전도자의 숭고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하여 우리도 어디든지 가야 할 여호와 하나님의 전령의 사명을 다시한번 자각하게 됩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철저한 복음의 사람들로 무장하게 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이들은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였을까요 그것은 구원의 은총이었습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구원의 감격이 이들을 이렇게 달라지게 합니다. 이들을 달라지게 한 것은 하늘나라의 보상이었습니다. 이들을 이렇게 달라지게 한 것은 이 복음 만이 나누어진 인류, 전쟁으로 죽이고 파괴하는 인류를 구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이들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는 고백이었습니다(고전9: 16). 바울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아직 땅 위의 사명이 있는 바울을 살리셨습니다. 생명이 돌아온 바울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다시 그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튼날 더베로 갔습니다. 그 거리는 96Km입니다. 그 먼거리를 피자국이 선명한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바울의 일행을 생각하여 보세요. 어떻게 그런 몸으로 그 먼거리를 걸어갈 수 있을까 그가 그렇게 초인적인 용기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고백때문이었습니다(갈6: 17).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그곳 더베에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얻었다고 했습니다(행14: 21). 그리고 바울은 더베에서 귀중한 믿음의 동지 가이오를 얻었습니다(행20: 4). 이러한 믿음의 열매가 있기 때문에 루스드라에서 죽을 뻔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다시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이고니온으로 다시 찾아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다시 찾아갑니다.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길은 해상을 이용하면 훨신 간편하고 수월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것 보다는 주님을 어떻게 증거하며, 복음으로 얻은 성도들을 어떻게 지도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만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형제들을 향하여 22절에서 권면하기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하였습니다. 후에 바울은 딤후 3: 11-12에서 말하기를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힌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닥치는 무섭고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환경에 굴하여 주저 앉아있어서는 안됩니다.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엘리야가 죽기를 작정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일어나 먹어라고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금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있게 증거하여야 합니다. 이보다 자랑스러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보람된 일은 없습니다. 이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입니다.
4. 본문 26-27절에서는 파송한 교회 앞에 사역을 보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파송받은 교회에 사역을 보고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불원간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게되고 우리의 사역을 보고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맡겨진 일에 신실하게 임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보고하는 중에 27절 말미에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행11: 18에서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고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7절에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여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의 본질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으로 동일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와같은 아름다운 보고를 드릴 곳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그 즐거움을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운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수고에 대하여 누가 인정해 줍니까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아지고 재물이 많아진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어떤 유익도 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고를 여호와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성도의 눈물까지도 주의 병에 담아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당하는 수고를 피하지 마세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내게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남보다 먼저 감당할려는 자세로 임하여야 합니다. 물질의 봉사든지, 몸으로 봉사하든지 항상 앞장서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5. 본문 28절에서는 즐거운 휴식의 넉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위대한 전도자에게 쉴 때가 왔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충전의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진정한 안식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서 이루어집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안식의 때를 바라보며 힘을 다하여 충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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