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농어촌도 선교지
본문
동아일보 3월 27일 기사에서 10년간 한국인들의 이동분포를 조사하여 발표했는데
그것에 의하면, 농촌인구는 10년간 37%나 줄었고 어촌인구는 약 50%나 줄었습니다.
그래서 대전에서 한시간만 벗어나도 만나는 농촌은 아이들 구경하기가 어렵고
아이들이 수백명씩 모이던 농촌 학교는 학생이 없어 잡초만 무성하고 폐교가 되어가는데
도시는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학교가 모자라
닭장처럼 운동장 없는 학교를 자꾸 건축하고 있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어촌지역의 인구가 감소하므로
자연적으로 농어촌 교회의 실정도 매우 열악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오늘을 농어촌주일로 지켜 농어촌교회를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농어촌교회는 도시교회를 성장시킨 신앙인들의 못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나라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태평양의 성도 여러분!
지금 농어촌 교회는 농어촌 사회의 급속한 몰락 때문에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농촌교회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 유지비조차 해결하지 못해 큰 어려움도 겪고 있으며
찬양대원이나 교사나 구역지도자들 같은 고급 인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기독교 잡지에서 실시한 한국 농어촌 교회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어촌 교회 가운데 90% 가량이 장년부 50명 이하의 영세한 소형교회이며
농어촌 교회의 약 40% 가량은 교역자의 최저 생활비도 해결 못하고 있어 원조를 받고
1년 헌금수입이 500만원도 안되는 교회가 절반이라는 통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어촌 교회는 교육, 선교, 구제, 봉사라는
교회의 본래적 사명수행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의 존립문제 자체로 고심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소개 드린 이 상황은 농어촌교회의 현재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태평양의 성도들도 농어촌 교회에 관심갖고 기도로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농어촌 교회는 오늘날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밀알이었습니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없이 어찌 가을 밀 추수가 가능하겠습니까
반드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하려면 봄에 뿌리는 밀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도시교회의 풍요로움과 부흥은 바로 농어촌교회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산모였던 농어촌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헌신하는 교사나 찬양대원들이 부족하고
재정이 부족하여 지붕을 수리하지 못해 비가 새는 교회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선교를 함께 동참하는 성도 여러분!
농어촌교회를 살리는 것도 선교의 좋은 또 다른 방법입니다.
은혜를 받은 동물들 조차도 평생 그 은혜를 갚으며 살다가 죽는데
하물며 십자가 복음을 접하게 해주고 천국가게 해준 농어촌교회를 우리몸이 떠났다고
우리들의 마음까지 떠나 버린다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것입니다.
농어촌 교회없는 도회지 교회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농어촌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첫째, 밀알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밀알 하나의 의미를 강조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서 그 생명의 첫 역사를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지기 위해 먼저 지금까지 소중히 붙어있던 이삭을 떠납니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직선적인 행동을 통해 흙을 향해 자신의 생명체를 투신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때가 찬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또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통속적인 의미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죽음
즉 죽으면 다시 살 수 있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크리소스톰은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칭찬받는 까닭은 부지런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개미나 나비처럼 꿀벌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곤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곤충들은 이기적인 결과밖에 없지만
꿀벌은 아주 유익한 꿀을 제공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겁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농어촌 교회를 위해 밀알의 정신으로 그들과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이 길이 모두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도시와 농어촌간에 확고한 접붙임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과일나무에 접붙이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귤나무 가지를 탱자나무 가지를 베고 거기에다 접붙이면 귤이 열리게 됩니다.
좋은 감람나무를 돌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돌 감람나무가 좋은 감람나무가 됩니다.
좋은 감나무 가지를 고염나무 가지에 접붙이면 아주 좋은 감나무가 됩니다.
수박의 줄기를 박 넝쿨에 접붙이면 맛있고 탐스럽고 단단한 수박이 됩니다.
그렇다고 귤나무를 아무 나무에나 접붙인다고 해서 모두 귤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귤나무가지를 탱자나무와 같은 귤과가 아닌
사과나무나 복숭아나무에 접을 붙이면 그 귤 가지는 절대로 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시교회는 자기 자신이 아름답게 열매맺을 수 있는 곳에 접붙임을 해야 합니다.
성질이 비슷한 곳에 접을 붙여야 같이 더 잘 산다는 겁니다.
바로 그곳이 농어촌 교회입니다.
도시교회가 농어촌 교회라는 나무에 접을 붙이면 농어촌 교회도 살고
농어촌교회로 보내진 도시교회의 가지도 잘 살아 결국 도시교회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농어촌의 한 생명도 우리가 같이 지켜야 할 주님의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농어촌을 살리는 길은 한국교회 전체가 사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농어촌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농어촌 교회를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일부지체가 잘못되면 우리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몸에 지체인 농어촌 교회와 긴밀한 협력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먹 힘이 약한 사람이 태권도를 배우고 기왓장을 격파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시작하면서 기왓장 한 장을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주가 지나서는 다섯 장을, 몇 년 후에는 스무 장까지 격파하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기왓장 한 장도 깨뜨릴 수 없는 약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능력! 즉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는것!
즉 자신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을 주님이 찾으시고 상주시듯이, 우리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도시교회 교인들도 농어촌 교회 교인들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환경에 안주한다거나 좌절하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비록 가시떨기 밭과 같고, 돌짝 밭 같고, 길가 밭 같을지라도
복음의 옥토를 일구어내기 위한 수고와 투자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평생 큰일을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는 고원에서 목축을 하여 뽕나무를 재배하며 최선을 다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불러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암 7:14).
다윗은 양떼를 치는 목동으로 최선을 다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1).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인권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 교인들이 함께 방문해서 견학했던 가나안농군학교!
그 학교를 일으킨 김용기장로님은 일평생 헌신을 다했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우리도 농어촌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농촌은 모내기를 한창 진행중입니다.
제가 어릴때에는 모내기철이 가장 활력이 넘치는 때였습니다.
모를 낼때에는 갖은 산나물 반찬들을 요리하고 하얀 쌀밥을 지어 머리에 이고 와서
누런 박바가지에다가 쓱쓱 비벼 먹으며 못줄을 띄우면서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모를 쪄서 늦은 밤까지 모를 심는 일이 허리가 부러질듯한 고역이었지만
논둑에 앉아서 못줄을 띄워주는 어르신들의 구수한 노랫가락으로
풍년을 꿈꾸며 고달픔을 이겨가면서 손으로 그 넓은 논마다 모내기를 했습니다.
그러한 낭만과 활력은 이제 농촌에서 별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기계 한대가 사람 오십명이 하던 일을 후딱 해 치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가고 있는 농촌의 비경제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어 우리가 뛰어놀던 그 들녂은 농번기인 지금 한산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따끔 보이는 농민들의 고달픈 얼굴에는 절망적인 주름살만 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WTO 체제하에서 외국 농산물 개방 압력은 더욱 드세어지고 있습니다.
값싼 칠레 포도의 대량수입 때문에 포도농사도 완전히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참깨, 콩, 옥수수 등을 비롯한 중국의 값싼 농산물이 물밀 듯이 침공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지은 우리 농부들이 생산한 우리 농산물은 가격이 폭락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네 농촌에는 마땅히 지을만한 농사가 없습니다.
갖은 고생을 해서 지은 자식 같은 농작물들을 갈아 엎는 농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늘어가는 빚 때문에 근심과 고된 노동으로 생겨난 병 때문에 대부분이 병자들입니다.
비 오는 날이면 보건소나 읍내 병원에는 신음하는 농민들로 가득 찹니다.
이렇게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농촌은 온통 절망으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담임목회를 하던 10년 전보다 지금은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살펴 주어야 할 우리들의 이웃은 바로 농어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기독교인답게 농어촌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농어촌 사람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농부가 수고한 댓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농부들이 정말로 수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농부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 문제인 음식물을 제공하는 1차 생산자입니다.
농부들의 수고가 담긴 먹거리가 없이는 우리가 살수가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 농부의 수고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쌀농사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이른 봄에 종자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종자를 소독하고, 싹을 띄우고, 모판을 내고,
모가 자라면 모내기를 하고, 잡초를 제거하고, 논물 관리를 하고, 병충해를 방제하고
수확하고 탈곡할 때까지 농부의 고달픈 나날... 수 없는 손길이 가야 합니다.
오죽하면 식물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처럼 애쓰고 수고하지만, 농부는 일년에 한번밖에 수확 할 수 없습니다.
농사는 일년에 한번만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어 실패를 하면 1년 농사 다 망치는 것이 바로 농업입니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그렇게 농사지은 쌀도 정부가 다 사주질 않아 재고가 쌓입니다.
그러니 어찌 농어촌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리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농어촌이 살아야 도시도 삽니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농어촌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쓰레기증가, 수질오염, 환경파괴, 인구과밀, 청소년 범죄의 급증 등 여러 가지 문제들
그것들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는 농어촌을 살려내야 합니다.
농어촌에서 지금처럼 도시로 자꾸 밀려들게 되면, 도시는 정화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데 농어촌의 경제적, 문화적 소외감, 자녀 교육에 대한 불안감 등이 나아지지 못하면
결국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무작정 몰려드는 사람들은 증가할것이고
도시는 몰려든 농어촌 사람들 때문에 실업문제도 발생하고
환경파괴, 교통문제도 생겨나고, 결국에는 사회악도 발생하게 됩니다.
농어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난리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여름 장마비를 손바닥 만한 논이라도 담아 주니까 수해가 나지 않는것처럼
농어촌이 유지되니까 도시가 그나마 살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실천사항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개인적으로는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 우리 농산물을 사 먹어야 합니다.
값이 싸다고 외국 농산물을 사 주면 우리 농어촌은 무너지고, 결국 우리도 망합니다.
둘째, 농어촌 교회와 자매결연을 통해 공동체라는 의미를 확고히 다지고,
연중 교류를 통해 농어촌 교회가 위치한 농어촌 지역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자는 겁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에 의하면, 농촌인구는 10년간 37%나 줄었고 어촌인구는 약 50%나 줄었습니다.
그래서 대전에서 한시간만 벗어나도 만나는 농촌은 아이들 구경하기가 어렵고
아이들이 수백명씩 모이던 농촌 학교는 학생이 없어 잡초만 무성하고 폐교가 되어가는데
도시는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학교가 모자라
닭장처럼 운동장 없는 학교를 자꾸 건축하고 있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어촌지역의 인구가 감소하므로
자연적으로 농어촌 교회의 실정도 매우 열악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회에서는 오늘을 농어촌주일로 지켜 농어촌교회를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농어촌교회는 도시교회를 성장시킨 신앙인들의 못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나라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태평양의 성도 여러분!
지금 농어촌 교회는 농어촌 사회의 급속한 몰락 때문에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농촌교회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 유지비조차 해결하지 못해 큰 어려움도 겪고 있으며
찬양대원이나 교사나 구역지도자들 같은 고급 인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기독교 잡지에서 실시한 한국 농어촌 교회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어촌 교회 가운데 90% 가량이 장년부 50명 이하의 영세한 소형교회이며
농어촌 교회의 약 40% 가량은 교역자의 최저 생활비도 해결 못하고 있어 원조를 받고
1년 헌금수입이 500만원도 안되는 교회가 절반이라는 통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어촌 교회는 교육, 선교, 구제, 봉사라는
교회의 본래적 사명수행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의 존립문제 자체로 고심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소개 드린 이 상황은 농어촌교회의 현재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태평양의 성도들도 농어촌 교회에 관심갖고 기도로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농어촌 교회는 오늘날 크게 성장한 한국교회의 밀알이었습니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없이 어찌 가을 밀 추수가 가능하겠습니까
반드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하려면 봄에 뿌리는 밀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도시교회의 풍요로움과 부흥은 바로 농어촌교회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산모였던 농어촌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헌신하는 교사나 찬양대원들이 부족하고
재정이 부족하여 지붕을 수리하지 못해 비가 새는 교회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선교를 함께 동참하는 성도 여러분!
농어촌교회를 살리는 것도 선교의 좋은 또 다른 방법입니다.
은혜를 받은 동물들 조차도 평생 그 은혜를 갚으며 살다가 죽는데
하물며 십자가 복음을 접하게 해주고 천국가게 해준 농어촌교회를 우리몸이 떠났다고
우리들의 마음까지 떠나 버린다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것입니다.
농어촌 교회없는 도회지 교회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농어촌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첫째, 밀알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밀알 하나의 의미를 강조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지면서 그 생명의 첫 역사를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지기 위해 먼저 지금까지 소중히 붙어있던 이삭을 떠납니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직선적인 행동을 통해 흙을 향해 자신의 생명체를 투신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때가 찬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또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통속적인 의미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죽음
즉 죽으면 다시 살 수 있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크리소스톰은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칭찬받는 까닭은 부지런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개미나 나비처럼 꿀벌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곤충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곤충들은 이기적인 결과밖에 없지만
꿀벌은 아주 유익한 꿀을 제공하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겁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농어촌 교회를 위해 밀알의 정신으로 그들과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이 길이 모두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도시와 농어촌간에 확고한 접붙임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과일나무에 접붙이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귤나무 가지를 탱자나무 가지를 베고 거기에다 접붙이면 귤이 열리게 됩니다.
좋은 감람나무를 돌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돌 감람나무가 좋은 감람나무가 됩니다.
좋은 감나무 가지를 고염나무 가지에 접붙이면 아주 좋은 감나무가 됩니다.
수박의 줄기를 박 넝쿨에 접붙이면 맛있고 탐스럽고 단단한 수박이 됩니다.
그렇다고 귤나무를 아무 나무에나 접붙인다고 해서 모두 귤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귤나무가지를 탱자나무와 같은 귤과가 아닌
사과나무나 복숭아나무에 접을 붙이면 그 귤 가지는 절대로 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시교회는 자기 자신이 아름답게 열매맺을 수 있는 곳에 접붙임을 해야 합니다.
성질이 비슷한 곳에 접을 붙여야 같이 더 잘 산다는 겁니다.
바로 그곳이 농어촌 교회입니다.
도시교회가 농어촌 교회라는 나무에 접을 붙이면 농어촌 교회도 살고
농어촌교회로 보내진 도시교회의 가지도 잘 살아 결국 도시교회도 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농어촌의 한 생명도 우리가 같이 지켜야 할 주님의 소중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농어촌을 살리는 길은 한국교회 전체가 사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농어촌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농어촌 교회를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일부지체가 잘못되면 우리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몸에 지체인 농어촌 교회와 긴밀한 협력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먹 힘이 약한 사람이 태권도를 배우고 기왓장을 격파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시작하면서 기왓장 한 장을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주가 지나서는 다섯 장을, 몇 년 후에는 스무 장까지 격파하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기왓장 한 장도 깨뜨릴 수 없는 약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능력! 즉 자기 자신을 극대화하는것!
즉 자신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을 주님이 찾으시고 상주시듯이, 우리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도시교회 교인들도 농어촌 교회 교인들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환경에 안주한다거나 좌절하면 마귀가 기뻐합니다.
비록 가시떨기 밭과 같고, 돌짝 밭 같고, 길가 밭 같을지라도
복음의 옥토를 일구어내기 위한 수고와 투자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평생 큰일을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는 고원에서 목축을 하여 뽕나무를 재배하며 최선을 다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불러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암 7:14).
다윗은 양떼를 치는 목동으로 최선을 다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1).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인권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 교인들이 함께 방문해서 견학했던 가나안농군학교!
그 학교를 일으킨 김용기장로님은 일평생 헌신을 다했고
아시아에서 최초로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우리도 농어촌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농촌은 모내기를 한창 진행중입니다.
제가 어릴때에는 모내기철이 가장 활력이 넘치는 때였습니다.
모를 낼때에는 갖은 산나물 반찬들을 요리하고 하얀 쌀밥을 지어 머리에 이고 와서
누런 박바가지에다가 쓱쓱 비벼 먹으며 못줄을 띄우면서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모를 쪄서 늦은 밤까지 모를 심는 일이 허리가 부러질듯한 고역이었지만
논둑에 앉아서 못줄을 띄워주는 어르신들의 구수한 노랫가락으로
풍년을 꿈꾸며 고달픔을 이겨가면서 손으로 그 넓은 논마다 모내기를 했습니다.
그러한 낭만과 활력은 이제 농촌에서 별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기계 한대가 사람 오십명이 하던 일을 후딱 해 치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가고 있는 농촌의 비경제성이라는 문제 때문에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어 우리가 뛰어놀던 그 들녂은 농번기인 지금 한산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이따끔 보이는 농민들의 고달픈 얼굴에는 절망적인 주름살만 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WTO 체제하에서 외국 농산물 개방 압력은 더욱 드세어지고 있습니다.
값싼 칠레 포도의 대량수입 때문에 포도농사도 완전히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참깨, 콩, 옥수수 등을 비롯한 중국의 값싼 농산물이 물밀 듯이 침공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지은 우리 농부들이 생산한 우리 농산물은 가격이 폭락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네 농촌에는 마땅히 지을만한 농사가 없습니다.
갖은 고생을 해서 지은 자식 같은 농작물들을 갈아 엎는 농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늘어가는 빚 때문에 근심과 고된 노동으로 생겨난 병 때문에 대부분이 병자들입니다.
비 오는 날이면 보건소나 읍내 병원에는 신음하는 농민들로 가득 찹니다.
이렇게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농촌은 온통 절망으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담임목회를 하던 10년 전보다 지금은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살펴 주어야 할 우리들의 이웃은 바로 농어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기독교인답게 농어촌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농어촌 사람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농부가 수고한 댓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농부들이 정말로 수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농부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 문제인 음식물을 제공하는 1차 생산자입니다.
농부들의 수고가 담긴 먹거리가 없이는 우리가 살수가 없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 농부의 수고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쌀농사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이른 봄에 종자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종자를 소독하고, 싹을 띄우고, 모판을 내고,
모가 자라면 모내기를 하고, 잡초를 제거하고, 논물 관리를 하고, 병충해를 방제하고
수확하고 탈곡할 때까지 농부의 고달픈 나날... 수 없는 손길이 가야 합니다.
오죽하면 식물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처럼 애쓰고 수고하지만, 농부는 일년에 한번밖에 수확 할 수 없습니다.
농사는 일년에 한번만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어 실패를 하면 1년 농사 다 망치는 것이 바로 농업입니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그렇게 농사지은 쌀도 정부가 다 사주질 않아 재고가 쌓입니다.
그러니 어찌 농어촌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리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농어촌이 살아야 도시도 삽니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농어촌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쓰레기증가, 수질오염, 환경파괴, 인구과밀, 청소년 범죄의 급증 등 여러 가지 문제들
그것들의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는 농어촌을 살려내야 합니다.
농어촌에서 지금처럼 도시로 자꾸 밀려들게 되면, 도시는 정화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런데 농어촌의 경제적, 문화적 소외감, 자녀 교육에 대한 불안감 등이 나아지지 못하면
결국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무작정 몰려드는 사람들은 증가할것이고
도시는 몰려든 농어촌 사람들 때문에 실업문제도 발생하고
환경파괴, 교통문제도 생겨나고, 결국에는 사회악도 발생하게 됩니다.
농어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난리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여름 장마비를 손바닥 만한 논이라도 담아 주니까 수해가 나지 않는것처럼
농어촌이 유지되니까 도시가 그나마 살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실천사항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개인적으로는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 우리 농산물을 사 먹어야 합니다.
값이 싸다고 외국 농산물을 사 주면 우리 농어촌은 무너지고, 결국 우리도 망합니다.
둘째, 농어촌 교회와 자매결연을 통해 공동체라는 의미를 확고히 다지고,
연중 교류를 통해 농어촌 교회가 위치한 농어촌 지역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자는 겁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