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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

본문

오늘은 총회가 정한 선교 주일이다. 우리는 이 선교 주일을 통하여 선교에 대한 사명 인식과 선교의 동참에 대해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선교는 주님이 마지막 주신 명령이다(마28:19-20)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는 선교적 사명을 띠고 이 땅을 살아간다. 주님의 지상 최후의 명령인 이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솔직히 우리는 우리의 삶에 쫓기다 보니 이 사명을 등한시하기도, 때로는 잊고 살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선교는 크게 국내와 국외로 구분을 하게 되며 국내를 전도, 국외를 선교라 한다. 일반적으로 선교라 하면 국외의 복음 전파 사역을 의미한다.
우리 교단에서도 오대양 육대주에 46명의 총회 선교사와 노회와 지교회의 선교사들이 20여 국가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현재 20여 국가에서 67 곳의 선교지 교회가 개척되었고, 7,000여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을 돌리고 있다.
작년에는 4명의 선교사가 파송 되었고, 4개처의 현지 교회의 예배당이 신축 또는 증축되었다. 올해는 6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예정이며, 3개처의 예배당이 건축 중에 있다. 이런 일의 완수를 위해 교단 산하 지교회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후원을 하자는 게 선교 주일을 지키는 의미이다.
우리 교회는 선교라는 거창한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미약한 교세이지만 선교적 사명을 갖고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감당할 수 있다. "가든지 보내든지" 할 수 없기에 함께 힘을 모으는 "후원"에는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나름대로 "선교 후원"에 동참을 하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주님과 한 여인의 만남을 통하여 여인이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의 기쁨을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기쁨은 혼자서 속에 넣고 감출 수 없는 것…. 한 여인의 간증을 통해 많은 마을 사람들이 구원 얻는 것을 본다. 곧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이다.
1. 자신이 먼저 주님을 만나야
선교 운동은 한마디로 복음 전파 사역이다. 복음 전파는 자신이 먼저 구원의 체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 복음을 이론적, 지시적으로가 아닌 체험적으로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오늘 본문의 우물가 여인도 먼저 자신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유대인 남자를 만나 서로 상종치 않는 고정 관념적 삶에서 유대인→ 선지자→ 그리스도로 그녀의 영안이 열려지고, 심령이 열려져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①. 한 유대인 남자
본문 9절에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했다.
주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사마리아를 통과하심은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는다.
이스라엘은 북쪽 갈릴리, 남쪽 유대, 그리고 중간의 사마리아, 세 지방으로 구분한다. 그래서 유대 사람이 북쪽 갈릴리 지방에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3일 정도 걸리지만, 사마리아를 피해 요단강을 건너 돌아감으로 6일 정도 걸리게 된다.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면서 앗수르의 혼합주의 정책으로 신앙의 순수성도, 혈통의 순수성도 잃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이라 이방인처럼 개, 돼지 취급을 했다.
"물을 좀 달라" 하시는 주님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찌 유대인이, 그것도 남자가 아는 척을 하고 물을 달라 할까…. 더럽고 속된 인간을 상종하다 더러워지면 어쩔려구....
우물가의 여인은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을 한 유대인 남자 이상으로 보지를 못 했다. 주님의 사랑은 고정관념을 깨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사마리아를 구원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우물가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본문 10절에 "네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했다.
네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과 나를 알았더면 네게 생수를 주었으리라는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 곧 구원(엡2:8)과 생수 곧 성령(요7:38-39)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②. 야곱보다 더 크냐
본문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다.
생수를 준다는 말씀에 영안이 열려지지 않은 우물가 여인의 눈에는 샘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릇도 없이 어떻게 물을 퍼 준다는 것이냐 잘난 척 하기는.... 당신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준 야곱보다 크냐는 것이다.
심령이 열려지지 않은 우물가 여인의 생각에는 주님이 샘물도 하나 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누구보다 더 크냐는 것은 그만큼 존경스러우냐 하는 것이다. 남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주님은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 개념으로 대해야 할 분이다.
주님의 말씀은 상대적 비교가 가능한 샘물 얘기가 아니다. 야곱의 샘물은 먹어도 또 목마르지만 주님 주시는 생수는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다.
우물가 여인의 답답한 모습....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목마름과 육신의 수고와 수치 됨을 해결하려 한다.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려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한다. 자신의 영혼이 목말라 죽어 가는 사실은 모른다.
③. 선지자
본문 19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 했다.
주님의 한 영혼 사랑은 중단이 없었고, 남편 얘기를 하시며 우물가 여인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시듯 말씀하신다. 여인의 치부가 다 들켜 버린 당황함이 있었다.
본문 18절에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했다.
남편이 다섯이라면 정식 결혼식을 치른 결혼이 다섯 번이라는 말이다. 파란만장의 인생살이다. 율법에 재결혼 할 수 있는 경우는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어 "이혼증서"를 받고 이혼 당한 경우(신24:1-2)나 남편이 죽은 경우(롬7:3)이다.
본문의 우물가 여인은 남편이 계속 죽어서 이루어진 경우가 아니라 수치 된 삶의 연속이다. 지금 함께 사는 자는 결혼한 남편이 아니라 동거생활을 하는 남자 아니면 기둥서방이라는 말이다.
이런 치부들 때문에 동네 여인들이 물을 긷는 아침, 저녁에 물을 길으려 나오지 못하고 한 낮 제 6시(정오), 남들이 오지 않는 시간을 택하여 피해 다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신에 대해 다 알고 계신 듯한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우물가 여인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라는결론을 내린다. 그렇지 않고는 생면부지의 이 유대인 남자가 자신의 과거사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말이다.
④. 메시아 곧 그리스도
본문 25절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했다.
찾아오신 주님을 선지자로 보게 된 우물가 여인은 지금까지 풀지 못한 예배에 대한 숙제를 들고 나왔다. 우리는 이 산에서(그리심산) 예배 드리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은 예루살렘이라 하느냐
본문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했다.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다고 했다. 아버지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는 장소에 구애됨이 없다고 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다. 지금은 바로 이런 예배를 드릴 때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으신다고 했다.
우물가의 여인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 일러주시리라"고 했다.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가 그로라!"였다. 우리 주님이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에 오신 것이다.
그 이름 "예수" 곧 세상의 구주이다. 바로 사마리아의 구주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유대인의 고정관념을 깨고 사마리아에 오셨고, 자신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구원하심으로 사마리아 구원 사역이 시작되었다. 우물가 여인이 "메시아" 곧 구세주를 만난 그 기쁨! 그 놀라운 사랑! 그 놀라운 체험! 바로 이것이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의 원천이요, 밑거름이었다.
2. 와 보라!
우물가 여인의 구원은 참으로 놀라운 것, 거기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만족이 있고, 평안이 있고, 참 안식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은 사라지고 주 안에서 용서와 평화가 주어졌다.
①. 물동이를 버려두고
본문 28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라고 했다.
구원받은 자의 변화된 모습을 보라! 물을 길으려 왔던 우물가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구원의 기쁨을 자랑하고파 달려간다. 혼자만 몰래 가슴속에 묻어 놓을 기쁨이 아니다. 외치고 또 외쳐도 못 다할 기쁨이다. 자랑하고 또 자랑해도 못 다할 자랑이다.
그래서 육신생활 곧 물동이를 버려두고 구원의 은총을 맛본 그 은혜, 그 감격....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파, 나누어 주고파 마을 사람들을 찾아간다.
②. 동리로 달려가
본문 28절에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라고 했다.
구원받은 자의 변화된 모습이다. 물을 길으려 왔던 우물가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즉시 동리로 달려간다.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부끄러움과 수치로 숨기만 하던 지난날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이 기쁨 맛보게 하고파, 이 감격 함께 나누고파, 이 귀한 체험 알게 하고파 달려가는 우물가 여인이다. 이런 마음, 이런 열심이 바로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의 힘이요, 원천이다.
③. 내게 말한 사람
본문 29절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고 했다.
우물가 여인이 경험한 크고도 놀라운 사실,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알고 계시는 주님, 이 사람을 "와 보라"고 외친다. 바로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의 내용이다.
"와 보라!" 내게 나의 모든 과거사를 말한 이 사람을 "와 보라"고 외친다. 그렇다. 우리의 전도는 바로 "와 보라"이다. 주님에게로 "와 보라"는 것이다. "와 보라" 곧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설명하고, 내가 주님을 정의하고, 내가 주님을 알리기란 힘들다. 주님은 나만의 주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다. 유대인의 주님인 동시에, 헬라인의 주님이시기도 하다.
베드로의 주님으로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해 내시는 주님이신가 하면, 야고보의 주님으로 헤롯의 칼에 야고보를 순교케 하시는 주님이시기도 하다(행12:2, 11)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알려 줄 수 없다. "와 보라" 다만 주님께로 인도해 갈 뿐이다.
④. 그리스도가 아니냐
본문 29절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했다.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의 핵심이다. 선교 운동은 복음 전파 운동이요, 복음 전파 운동의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물가 여인의 놀라운 변화이다. 부끄러움과 수치로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삶에서 사람들을 찾아 마을로 달려가는 삶이다. 지은 죄가 부끄럽고 괴로워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녀가 "와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를 외치는 삶
으로 변했다.
주님을 알리시는 일은 주님 자신이 하신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우물가 여인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처럼 성급하지도, 우리처럼 태평스럽지도 않은 주님의 모습을 바라본다.
우물가 여인의 영안을 열고, 심령의 문을 열어 하나 둘 깨닫게 하시고, 마침내 "내가 그로라" 곧 자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하신다. 오늘날에도 그 주님은 당신의 성령의 역사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16:8) 일깨워 주신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와 보라" 우리의 선교의 내용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내가" 증명하려 들지 말자. 신앙은 이론과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있다. "와 보라", 와 보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만나면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의 우물가 여인이 그러 했드시....
3.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의 결과로 주님은 이틀을 사마리아에 더 유하시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한 여인이 거둔 엄청난 선교의 열매이다.
①. 우물가 여인의 간증
보문 39절에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고 했다.
우물가 여인처럼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말하였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바를 증거하는 일을 간증이라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이 처음에는 우물가 여인의 신비한 체험의 간증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는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서, 또는 성도들의 헌신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서 전파되어진다. 불신자들이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접하는 일보다 우리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삶은 한마디로 "간증 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연약으로 인한 실패한 삶의 모습으로 복음 전파의 길을 막고 있지나 않는지.... 우리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②. 더 유하시길...
본문 40절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라고 했다.
우물가 여인의 간증을 통해 믿음의 길로 들어선 사마리아인들.... 복음에 재미를 느끼고 흥미를 더해 간다. 주님을 청해 더 유하시길 원한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음의 증거요, 주 사모하는 마음의 자라남이다.
우리 성도들도 다 경험한 일들이다. 말씀이 그리워지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서 부흥집회를 찾기도 하고, 기도원을 찾기도 한다. 성경 공부, 제자 훈련, 세미나 참석 등을 하기도 한다.
③. 말씀을 인하여
본문 41절에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라고 했다.
주님이 이틀을 더 유하시며 들려주신 말씀.... 그 말씀 위에 믿음의 뿌리가 내려진다. 신비한 체험이나 뜨거운 감정에다 믿음의 근거를 두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다.
④. 친히 듣고
본문 42절에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고 했다.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이 거두는 참으로 놀라운 결과이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친히 들었다"고 했다. 남의 체험에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 친히 스스로가 듣고 체험한 사실 위에 신앙의 터를 굳혀 가고 있다고 고백한다.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은 자신의 복제품을 만드는 신앙 운동이 아니다. "와 보라"의 외침으로 주께 인도하고, 주 안에서 그 믿음이 자라 가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는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다" 곧 네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친히 듣고" 우리의 신앙을 가꾸어 간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선교 운동도 이런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선교를 한다면서 자신의 복제품을 만들려 하고, 아니면 자신의 수중의 꼭두각시를 만들려 하는 주인의식은 버려야 한다. "와 보라" 주님께 인도하는 것으로 우리의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어떤 신자, 어떤 일꾼으로 만드느냐는 주님이 하실 일이다.
야고보를 헤롯의 칼에 순교케 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요,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출해 내는 것도 주님의 일이다. 오늘 우리의 선교 운동이 야고보의 입장에서 순교를 강요하는 선교 운동은 아닌가 베드로의 입장에서 탈옥을 강요하는 선교 운동은 아닌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⑤.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
본문 42절에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고 했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 때문이 아니라 그가 참으로 나의 구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에게 소개받은 주님이 아니라 친히 경험하고 깨달은 "나의 구주"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선교 운동의 열매이다. 온전한 신앙인으로 자라난 모습이다.
요한복음 3:29-30절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다.
세례 요한의 마음.... 바로 이런 마음이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 하는 마음이다. 바로 오늘의 선교 운동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마음 자세이다.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 참으로 귀한 열매 가지고 주께 영광을 돌린다. 친히 듣고, 경험하고, 깨달은 주님을 고백하는 온전한 열매이다. 이럴 때 우물가 여인의 선교 운동은 저 세례 요한처럼 뒤로 물러 설 줄 알아야 한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찬송 부르며 또 다른 아골 골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이것이 주를 위한 선교 운동의 참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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