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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들

본문

다른 종교와 기독교와의 차이점 중 하나는 기독교는 끊임없이 선교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선교가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선교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한 것처럼
선교야말로 교회가 온 몸을 바쳤고 이 세상 끝까지 수행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교회의 중요한 일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 안디옥 교회로 옮겨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이란 지명은 두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곳은 팔레스타인 땅에 있으며 한 곳은 소아시아 즉 터기 남부 해안 지방에 있습니다.
본문의 안디옥은 소아시아에 있던 곳을 지칭합니다.
안디옥은 사울이 살던 다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시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하게 되었고 바나바는 그곳에 가 안디옥 교회 가까이 있는
다소에 사울을 안디옥 교회로 데려 가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초대 교회에는 유명한 4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안디옥 교회,로마 교회,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교회를
들라고 하면 에베소 교회가 있었습니다.
안디옥은 여러 모양으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행 13장 1-3절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보다 훌륭한 일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들.
예를 들어 바나바는 12사도는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게르 시몬. 니게르는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실 때에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시몬이란 그런 의미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느닷없이 십자가를 지었기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후에 이 기독교회에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구레네사람 루기오,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사울. 이 다섯 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에 초대 교회에 인정받는 공인된 지도자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많은 훌륭한 점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배경과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안디옥 교회의 말할 수 없는 큰 재산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들이 금식하며 섬겼다고 나와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의 부흥회와 같은 공식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모든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먼 후에 안디옥 교회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안디옥 교회를 생각하고 이야기할 때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교회며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교회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먼 후에 우리 인천 C. C. C. 도 많은 사람들이 인천 C. C. C. 에는 훌륭한 일꾼,순장들,선교사들이
있었다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과 이 훌륭한 일꾼들을 통해서 같이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사도행전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사도행전의 저자이십니다.
보이지 않게 사도들의 배후에서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교회 속에 역사를 이루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홀로 들어내신 위대한 일꾼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을 세상으로 지금도
보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행 13: 2에서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안수하여 보낸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 20 : 21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보냄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냈기에 세상에 오셨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보내신 자의 일을 이루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그를 보내신 자의 뜻과 일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주님은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6:8에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이사야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롬 10 :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처럼 보냄을 받은 자가 전파하지 않으면 듣지도 못했을
것이고 듣지 못했으면 누구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고 나와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이들이 알아듣게 따로 세워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떠나 나가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움으로
안디옥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했을 때 그가 순종하여 그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갖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이 복음의 발을 내딛었을 때 어디로 가며 어떤 일들이 벌어지며 무슨 일을
만날지는 궁극적으로 어디까지 가게 될지는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파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은 더 이상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보냄을 받았을 때 필요한 것이 용기와 믿음을 가진 응답입니다.
1951년 미국의 윌리엄 알 브라잍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성공한 식품 회사를
가진 경영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성공한 사람들만 사는 곳으로
집을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보넷 브라잍이라는 아내를 만났고 그는 아내를 충족시켜 줄
충분한 경제력을 가졌습니다.
그가 석사 학위를 끝내 가는 마지막 학기 어느 날에 헬라어 공부를 하다가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그 일을 그가 잘 아는 윌버 스미스라는 교수에게 이야기하였고
곧 C. C. C. (Campus Crusade for Christ)라는 단체를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그 일이 있은 후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포기했습니다. 대신 그가
주님의 일을 할 때면 무엇이든지 줄 것을 주님께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자동차 저금 통장이 없습니다.
이 사업가가 이루어 낸 것은 그가 포기한 것 보다 수 만 배나 큰 것입니다. 이 보냄을
받은 자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듣게 되었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150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아 오게 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냈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나를 캠퍼스에 보냈다고 생각이 듭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나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참으로 갈망하고
계신다고 확신이 듭니까
믿음과 용기를 가지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반응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진 놀라운 계획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께서는 마귀의 일을 파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10,11절에서 선교는 성령이 이끌어 가시지만 막무가내로 인도하시지는 않습니다.
사울과 바나바가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할 때 안디옥에서 가까운 곳에 구보로 라는 섬이
있었습니다. 이 섬은 바나바의 고향이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가 의견을 나눌 때에 바나바는 구보로로 가자고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선교로 파송된다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할 때 근거 없이 아무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실 때는 보내시고자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곳. 언어와 풍습이 비슷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구보로 섬에 갔을 때에 그들이 각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소식을 서기오 바울이 들었을 때 이 복음의 소식을 듣고 싶어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 때 그곳에는 마술사 엘루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기오 바울곁에서 그 섬의 정치와 통치에 관해 충고하고 점을 쳤던 사람입니다. 이 엘루마는 서기오 바울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보고는 즉각적으로 공격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믿지 못하도록 여러모로 방해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나아갈 때에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며 거짓과 궤계로서
복음에 대항해 옵니다.
그러나 이때 사울은 이 문제가 마귀에게 속한 문제임을 알고 엘루마를 어두움의 자식,흑암의
자식이라 칭하고 언제까지 의의 길을 굽게 하려 하느냐라고 하며 너의 근본이 흑암이니
어두움이 너를 사로잡을 것이라 하자마자 곧 그는 소경이 되고 맙니다.
이 경험은 사울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다메섹으로 갈 때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동일한 일들로 진리를 방해하고 사람을 혼미케하여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자들을 파하십니다.
요 일 3 : 8에는 “….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마귀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요 8 : 44에는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고 창세기 3장에는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굽게 만들었습니다. “먹지 말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회의와 의심을 갖게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방심을 보이자 즉각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어 버립니다.
이 과실을 먹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처럼 된다라고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뒤엎고 여호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이야기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고 살인한 자였습니다. 가인의 속에 들어가 아벨을
죽이게 충동한 자가 바로 마귀입니다. 인간을 예덴동산서 쫓겨나게 하고 생명과 구원에서
멀어지게 했고 가정을 파괴했으며 형제를 이간질하고 살인하도록 인간의 속에서 일해 오고
있습니다. 엡 6 : 11 - 13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처럼
지금도 이 세상 속에서 진리가 아닌 것에 미혹 당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보냄을 받았습니까
명약관화하게 마귀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우리는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실제로 마귀는 복음 전파를 굉장히 미워합니다.
사도행전이 끝나는 순간까지 박해와 저항과 소요와 위협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것을 능히 극복해 냅니다.
골 1 : 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냈다고 요 5 : 23 - 24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흑암속에 있는 자들을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권세 하에 있던 자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온 인류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기어 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명백히 바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즉각적으로 마귀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엡 6 : 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갈 때 악한 세력이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막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담대하게
행한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그리스도안에 머무는
한은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에게 참된 기쁨을 주십니다.
13장 52절에 보면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가 가는 곳마다 믿는 자들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바울은 사도행전 속에서 여러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 위기를 넘겼을 때 52절에서 바울과 함께 했던 제자들의 마음에는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면서 많은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하는 자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요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제자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
잡수실 것을 청했을 때 주님은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복음 전한 후의 만족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 많은 선교사들이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을까요
행 13장에서 바울은 복음 전파를 결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누구도,이전에는 경험치 못한 진정한 영적인 만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롬
1 : 17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냥 이론이 아닙니다. 이념도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고
영생과 죄사함의 실체를 경험케 하며 성령을 선물로 받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로 주님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이 허구의 이론에 불구 하다면 이 복음을 전파하며 어떤 능력도 경험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참된 능력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그 복음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인생의 참된 삶의 기쁨과 보람과 만족을 주십니다.
계속해서 중단 없이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을 기억해 봅니다.
그들 속에 끊임없이 넘쳤던 삶의 열정, 선교의 열정,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자 하는 열정을
여기에서 읽게 됩니다.
여러분 속에는 이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넘치고 있는 기쁨이 있는가라고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반대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복음 전파를 계속했던 사도들은 행 13 : 52 에서 “....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지라. ”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에서 주님의 일을 해 나가면서 복음의 사역을 해 나가면서 구원의 이 소식을 들려주면서
쉼없는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사도들처럼 중단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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