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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신령한 에벤에셀

본문

우리 한국 토양에 복음이 파종된지 1세기가 넘었습니다. 근 70여 교파에 3만 2천교회, 1천만 크리스천이 된다고 하지만 그 뿌리는 우리 장로교와 감리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인즉 우리 한 국 체질에 맞는 기독교는 자유스러운 장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 년 전에 우리 민족은 우상의 종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억압되고 있었 습니다. 빈곤에 쪼들리고 질병으로 고통당했고 무지로부터 자유와 해 방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갖 죄악으로부터 구원받기 를 원했습니다. 이 모든 요망에 충족시킬 수 있는 종교가 바로 우리 장로교였습니다. 우리 교단이야말로 역사적인 정통성을 물려받은 자랑 스러운 장자 교단인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숙적 블레셋군이 아벡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군은 에벤에 셀 곁에 포진하고 싸웠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역부족으로 4천 명의 절 사자를 내고 패하여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어찌하여 여호 와께서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가 반성하다가 언약궤를 놓고 싸우면 이 겨지나 않을까하는 여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진에 들여올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 다.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땅이 진동했습니다. 이 함성을 들은 블레셋 군이 처음에는 떨다가 사기도 진동했습니다. 이 함성을 들은 블 레셋군이 처음에는 떨다가 사기를 되찾아 이스라엘군의 종이 되든지 승리하든지 두판 잡고 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달 리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패하여 4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을 뿐만 아니라 법궤도 뺏기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말 았습니다.

그후 블레셋군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탈취해 가져다가 아스둣에 있는 다곤 신당에 두었습니다. 하룻밤을 지낸 후에 보니다곤 우상이 여호와 의 궤 앞에 엎드려 코가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다음날도 세운 우상이 또 엎드려져 있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우상이 목이 꺾이고 양 파이 부러지고 몸둥이만 뒹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스돗 지방 에 독종재앙이 일어나서 백성이 망하게 되니까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 엘 백성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잠깐 기럇여아림의 엘리아살이 성별해서 언약궤를 맡아 모시는 중에 일시적 이나마 2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평온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잠깐 허락된 평온한 시기에 아직도 사납고 무서운 블레셋 사람의 지배 하에 이스라엘 백성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도 민족적인 통일도 없었습니다. 사무엘 선지는 이 잠정적인 기회에 민족 적인 회개운동을 일으켜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확신했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의 패한 원인은 죄였습니다. 그 죄는 특별히 제사장 의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 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삼상 1:3)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 를 멸시함이었더라. "(삼상 2:17) 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 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 (삼상 2:22-23) 고 말하고 간청을 해도 듣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세습적으로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제사장의 신앙이 이 정도라면 일반 종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죄는 회개하지 않고 우상숭배자에게 패하니까 언약궤만 옮겨다 곁에 놓으면 승리하리라 기대했지만 큰 오산이었습니다. 썩은 신앙은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고도의 문화생활에 동화하지 말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성공하고 자녀가 잘 된다면 바알신이 되었든 아세라 목신이 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제사 지냈습니다. 한 편으로는 참 신이신 여호와 유일신도 겸하여 섬기는 이중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신앙의 무력해졌습니다. 상식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제사장들이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안 망할래야 안 망할 수 없게 되어서 부득이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의 이름을 밝혀서 전사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책망하시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 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나보 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삼상 2:29)고 반문하셨습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아 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 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 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넘어진 엘리 제사장은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잃었고 나라도 패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황금만능의 우상 앞에 시들고 있습니다. 성공과 출세, 그리고 자녀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은 무력해지고 있습 니다. 병만 치유된다고 하면 지금도 가릴 것이 없이 덤벼드는 지도층 이 얼마나 많습니까거기다 신앙도 인정받지 못하고 병도 못고친 사례 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기에 세상 사람도 못할 부조리와 부정 과 부패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무엘 선지의 능력있는 외침에 온 백성이 무섭게 회개했습니다. 블 레셋군은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뇌성으로 원수들을 무섭게 하셨으며, 사기를 잃게 하셨습니다. 그 틈을 타 공격 해서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을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삼상 2:10)라고 하셨습니 다. 실지를 회복하고 미스바와 신사에 기념비를 세우고 여기까지 여호 와께서 도우셨다고 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1876년은 일본의 무력에 의해서 쇄국주의를 청산하고 문호를 개방한 해입니다. 그런데 신문화를 동경해서 만주에 간 백홍준 외 세 청년이 로스선교사의 3년 전도에 서양문명보다 더 좋은 복음을 믿고 다 세례 받은 해입니다. 세례받은 지 7년 만인 1883년, 백홍준은 성경을 등에 지고 압록강을 넘어 의주에 와서 개척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다 10년 만인 1893년에 순교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사위 김관식 전 도사가 그 교회를 시무하면서 일주일에 주일예배,저녁에 삼일예배를 드린 것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진실한 생활복음 이었기에 장인이 순교한 것을 보고 그 교회 교역자가 되었겠습니까 복음전파에는 자연히 인권존중사상과 부정을 용납치 아니하는 것입니 다. 벌써 1899년에 정당한 재판을 요구했고 불법적인 세금징수를 크리 스천들이 거부했습니다. 저들의 생활이 진실하지 않고서 이런 일이 힘 이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국일보사에서 여론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설문에 는 (1) 교인이 더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2) 교인이 더 애국자라 고 생각하는가 (3) 앞으로 더 개척교회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불 행하게도 다 부정적인 대답이었다고 합니다.

서대문 구치소의 통계에 의하면 수감자 중 25%가 기독교인이었고, 미 대사관의 집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비자신청 범법이 일반인보다 많다 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우리 급속한 부흥과 성장에 무서운 허점이 있는 줄 알고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6. 25사변이 우상숭배와 부정부패 로 인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알고 민족적으로 회개했을때 여호와 하나님은 용 서하시고 UN군으로 구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마틴 뉴물러는 히틀러 독재에 반항하다가 8년 옥고를 치르고 나왔습 니다. 꿈을 꾸었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엄위하신 보좌 앞에 섰고 뒤에 증인으 로 히틀러가 증인을 했습니다. 좋은 증거가 있거든 말하라고 분부했을 때,"아무 증거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찬반도 많았었는데 나에게 하 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직접 전도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 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랜 생각 후에 뉴물러 목사님은 히틀 러와 그 일파에 직접 복음을 전하지 못한 일, 한 인간으로 사는 방법 을 전하지 못한 것을 깊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반대자를 욕하고,저 주하고, 징계하고, 죽이는 것으로써는 참 평화가 교회재건이 되지 않 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선 언은 "(1) 더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죄 (2) 보다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죄 (3) 보다 더 감사와 기쁨에 넘치지 못한 죄 (4)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허구성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읍시 다. 우리의 사정이 바로 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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