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어떻게 초청할까요?
본문
이제 50일전에 새생명축제 선포식을 가진 후 43일이 지났습니다. 오늘을 빼면 이제 6일이 남았습니다. 그동안 새생명축제를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해왔습니다. 세미나, 간증, 성령집회 등을 감당하였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라도 전도를 해야만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입니다. 이는 전도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는 밤을 새워서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 관해서 만큼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그 놀랍고도 감격적인 복음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을까요 자랑하고 강권하여 데려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인정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새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은혜로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최대 임무입니다. 이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상대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국인 기독교 지도자인 “리”가 미국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나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유교가 있는데 기독교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었입니까”라고 묻는 학생에게 그는 기억할 만한 답변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공자는 선생이었으나 그리스도는 구세주였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선생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둘째로는, 공자는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사셨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부활하신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셋째로, 공자는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만나기 전에 구세주로 만나야 합니다. "
리가 잘 요약한 이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광범위한 목적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전 세계의 죄인을 찾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복음을 언제 할 것인가
오늘이 중대합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정확하지 못하고 판단은 곤란하다”고 히포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태양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 건초를 만들어라’고 세르반데스 돈키호테가 말했습니다.
‘기회는 모든 자들에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다’라고 리톤이 말했습니다.
‘고기보고 기뻐하지만 말고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는 한국 속담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은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 헛수고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회가 사람을 버리는 것보다 사람이 기회를 잃어버릴 때가 더 많다’는 프랑스 겪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한다” 고 요한복음9:1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히브리3:13절에 보면 오늘을 소중하게 여길 것을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
R. A. 토리 목사가 영국의 브라이톤이라는 곳에서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돕던 일군 한 사람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음식을 주문받고 봉사해 주는 웨이터를 대할 때에 어쩐지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게 무얼... " 하는 생각과 장소 환경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그냥 마음에 미루어 둔 채로 식사를 다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생각하니 그래도 한마디 전도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고 느껴져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나와서 “혹시 무슨 일로 이처럼 기다립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써-브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침통한 표정을 한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를 한 후에 이층으로 올라가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때늦은 전도는 전도일 수가 없습니다. 때늦은 전도란 말은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은 복음전파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 위해서 오셨고 그 일위해 죽으셨고 그 일위해 살아나셨고 승천하셨고 다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제자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일할 수 있는 낮일 때, 때가 늦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후회 없는 믿음의 삶이 되려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초청을 할까요 그 방법을 여러 가지로 다 알려진 방법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지침이 나갔습니다. 참고하셔서 감당하고 있을 줄 믿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초청을 할 수 있을까’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은 초청의 메세지를 보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가서 식사를 하면서 청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앞으로는 사람을 초청해서 대접을 할 때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 자신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본문의 잔치 집 비유의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면서 많은 사람을 초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초청은 유대인들의 풍속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결혼 전에 약혼을 먼저 합니다. 약 1년 전에 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자기 친구들에게 초청장을 미리 보냅니다. 일년 뒤에 혼인을 한다는 내용의 초청장입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습니다. 그 후 일 년의 약혼 기간이 경과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고 이어서 혼인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이때에 초청하였던 사람들에게 다시 초청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 초청은 잔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참석하기 바란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두 번에 걸쳐서 초청을 받고도 참석하지 않으면 결례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새생명축제를 앞두고 초청할 대상자를 선정하고 마음에 담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미 벌써 부터 마음에 품고 가끔씩 복음을 전한 사실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다음주일이면 잔칫날 바로 그날입니다. 이때에 초청해 놓은 사람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의 사유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사유를 대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입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를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하러 가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세 가지 이유는 거절한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1년 전에 초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절은 주인의 성의를 무시한 처사이며 최초의 약속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이 비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에의 초청, 곧 예수의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의 경우를 말합니다.
만인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초청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은 진정 구원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육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아우에게 넘긴 에서와도 같습니다. 오늘날 전도를 해보면 못 오는 사람들의 핑계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돈버는 문제입니다. 사업이 잘되면, 지금은 너무 바빠서, 아니면 좀 더 나이가 많아지면, 늙어서 가겠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도 주일에는 결혼식이 많습니다. 결혼식에 가야하기 때문에 못 온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이런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초청을 하고자 원하여 메세지를 던져놓고 기다렸는데 그 사람이 못온다고 할 때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핑게를 하는 사람들의 동향을 주인에게 보고했을 때 그 주인은 두 번째 초청 대상자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21절에 보면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급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누군가 마태복음15:1절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로서 혈통은 유대인들이지만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 궁핍상태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쉽게 나오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도 이런 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내로 나가서 골목으로 다니면서 연약한 자들에게 초청을 해야 합니다.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 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 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 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초청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몇 번에 걸쳐서 초청을 했는데도 이번 토요일이나 아니면 몇일전에 거절하는 말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고 그를 향하여 욕하지 마시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에게 전하십시오. 오히려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두 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절하지 않고 잔치에 참석을 했습니다.
이렇게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로 잔칫집에 왔는데 잔칫집이 얼마나 큰지 아직도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고 주인에게 보고하니 주인이 다시 종들에게 말한 내용이 23절 말씀입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 내용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 자리는 무한히 넓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교회가 ‘빈자리를 채워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여러분, 우리교회의 빈자리만 생각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빈자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자리는 예배를 여러 번 드리니까 빈자리가 발행하는 것이지 한 번 드리면 빈자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빈자리를 생각하면서 구호에 넣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인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너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3:16절 말씀에 보면
“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누구든지”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선착순이 아닙니다. 몇명으로 제한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직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을 때 주인은 종들에게 한 말이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길과 산울타리 가의 사람들은 누굴까요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그네를 연상하게 합니다. 산울타리가라고 한 것을 보면 어떤 정해진 센타 밖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방인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초청대상이던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초청을 받은 연약한 사람들이란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방인 사람,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범위를 좀 더 좁혀서 생각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알지 못하는 그분들을 향하여 우리가 전교인들이 노방전도를 나갑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처음에는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강권하여 데려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나가서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전단지를 가지고 갑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에게 강권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강권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은 억지로라도 모셔야 한다는 의미로 받습니다만 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설득을 시켜서 올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강제수단을 사용해서 데려오는 것보다는 사양을 한다고 해서 금방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설득해서 반드시 데리고 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구원시키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강제가 필요합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이 망하기 직전에 롯의 가족이 구출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통해서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성이 망하지 않도록 약속을 하셨지만 성안에 열 명이 없었습니다. 성을 멸망시키려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롯을 찾아가서 네게 속한 사람들,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했습니다. 사자의 말을 듣고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였으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사위들이 말을 듣지 않거든 너희들끼리라도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롯이 머뭇거립니다. 19장 16절에 보면 머뭇거리는 롯을 향하여 주의 사자들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제 발로 안되니까 억지로 끌어내었습니다.
이것이 강권의 은혜입니다. 그 강권하심의 이유는 여호와의 자비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봉사하고 충성하는데도 강권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National Retail Goods Association)의 조사에 의하면 판매원(salesmen)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며, 25%는 두 번 전화해보고 포기하고, 5%는 세 번 걸어보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88%의 세일즈맨이 한 통 내지 세 통의 전화 후 판매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12%만이 더 끈질기게 하는데 이들 12%가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88%의 세일즈맨이 겨우 20%의 거래를 나누어 하는 셈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권하는 형식을 취하는 전도자 20%가 전체 전도의 8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비추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권하여 데려오려고 하면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강권하여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보험을 하거나 세일즈를 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나오는 선물의 여러가지 종류를 자신의 돈으로 구입해서 그것으로 소비자들에게 선물을 하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창세기33장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성공했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얻고 재물도 모았습니다. 그런데 올라오는 길에 한 가지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형 에서의 자손들이 길목이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형을 만나면 마음을 동생으로부터 속았던 분노를 이제는 풀고 화해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녹이려고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32장13절 이하에 보면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 선물을 형 에서를 만나서 드릴 때 형이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33장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가족들로 하여금 형에게 인사를 시키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선물을 드리려고 하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이 짐승 떼는 무엇이냐고 하니까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형은 형답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다시 형님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라고 하면서 계속 받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18:16말씀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할렐루야!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는 힘이 있습니다. 거센 분노도 선물이 사그라뜨립니다. 선물을 주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고 친구가 되게 합니다. 야곱이 선물을 보낸 후에 진심으로 사과하며 화해하는 뜻으로 일곱 번이나 절을 했습니다. 이런 동생과 화해를 안하면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빈손이면 빈말밖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솔즈베리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도함에 있어서도 선물을 구입해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선물을 구입해 가셔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예수를 바라봅시다. 멸망하여 가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자신의 골육 친척을 구하는 일이라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하던 바울의 마음,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결박의 줄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나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에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 그것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고 고백한 바울의 간절한 복음전파의 마음을 나의 가슴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과 바울의 마음을 가슴에 담아 생명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세 가지 기적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입니다. 이는 전도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는 밤을 새워서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에 관해서 만큼은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걸까요 어떻게 그 놀랍고도 감격적인 복음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있을까요 자랑하고 강권하여 데려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인정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새생명보다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은혜로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최대 임무입니다. 이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상대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국인 기독교 지도자인 “리”가 미국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나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유교가 있는데 기독교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었입니까”라고 묻는 학생에게 그는 기억할 만한 답변을 했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공자는 선생이었으나 그리스도는 구세주였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선생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둘째로는, 공자는 죽었으나 그리스도는 사셨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부활하신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셋째로, 공자는 어느 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만나기 전에 구세주로 만나야 합니다. "
리가 잘 요약한 이 내용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광범위한 목적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전 세계의 죄인을 찾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복음을 언제 할 것인가
오늘이 중대합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달아나기 쉽고 실험은 정확하지 못하고 판단은 곤란하다”고 히포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태양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 건초를 만들어라’고 세르반데스 돈키호테가 말했습니다.
‘기회는 모든 자들에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다’라고 리톤이 말했습니다.
‘고기보고 기뻐하지만 말고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는 한국 속담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은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 헛수고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회가 사람을 버리는 것보다 사람이 기회를 잃어버릴 때가 더 많다’는 프랑스 겪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한다” 고 요한복음9:1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히브리3:13절에 보면 오늘을 소중하게 여길 것을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
R. A. 토리 목사가 영국의 브라이톤이라는 곳에서 전도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돕던 일군 한 사람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음식을 주문받고 봉사해 주는 웨이터를 대할 때에 어쩐지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게 무얼... " 하는 생각과 장소 환경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그냥 마음에 미루어 둔 채로 식사를 다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생각하니 그래도 한마디 전도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고 느껴져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나와서 “혹시 무슨 일로 이처럼 기다립니까” 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써-브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침통한 표정을 한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를 한 후에 이층으로 올라가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때늦은 전도는 전도일 수가 없습니다. 때늦은 전도란 말은 사실상 무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은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감당해야 할 사명은 복음전파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 위해서 오셨고 그 일위해 죽으셨고 그 일위해 살아나셨고 승천하셨고 다시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제자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에 일할 수 있는 낮일 때, 때가 늦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후회 없는 믿음의 삶이 되려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초청을 할까요 그 방법을 여러 가지로 다 알려진 방법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지침이 나갔습니다. 참고하셔서 감당하고 있을 줄 믿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초청을 할 수 있을까’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은 초청의 메세지를 보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아 가서 식사를 하면서 청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앞으로는 사람을 초청해서 대접을 할 때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갚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 자신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본문의 잔치 집 비유의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면서 많은 사람을 초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초청은 유대인들의 풍속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결혼 전에 약혼을 먼저 합니다. 약 1년 전에 합니다. 그러면 남자는 자기 친구들에게 초청장을 미리 보냅니다. 일년 뒤에 혼인을 한다는 내용의 초청장입니다.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습니다. 그 후 일 년의 약혼 기간이 경과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고 이어서 혼인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이때에 초청하였던 사람들에게 다시 초청의 소식을 전합니다. 이 초청은 잔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참석하기 바란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두 번에 걸쳐서 초청을 받고도 참석하지 않으면 결례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새생명축제를 앞두고 초청할 대상자를 선정하고 마음에 담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미 벌써 부터 마음에 품고 가끔씩 복음을 전한 사실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다음주일이면 잔칫날 바로 그날입니다. 이때에 초청해 놓은 사람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의 사유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사유를 대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입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를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시험하러 가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세 가지 이유는 거절한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1년 전에 초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절은 주인의 성의를 무시한 처사이며 최초의 약속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이 비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구원에의 초청, 곧 예수의 복음을 거절한 유대인들의 경우를 말합니다.
만인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초청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은 진정 구원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육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아우에게 넘긴 에서와도 같습니다. 오늘날 전도를 해보면 못 오는 사람들의 핑계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이유는 돈버는 문제입니다. 사업이 잘되면, 지금은 너무 바빠서, 아니면 좀 더 나이가 많아지면, 늙어서 가겠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도 주일에는 결혼식이 많습니다. 결혼식에 가야하기 때문에 못 온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를 해보면 이런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초청을 하고자 원하여 메세지를 던져놓고 기다렸는데 그 사람이 못온다고 할 때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핑게를 하는 사람들의 동향을 주인에게 보고했을 때 그 주인은 두 번째 초청 대상자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21절에 보면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급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누군가 마태복음15:1절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로서 혈통은 유대인들이지만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 궁핍상태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쉽게 나오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도 이런 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내로 나가서 골목으로 다니면서 연약한 자들에게 초청을 해야 합니다.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 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 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 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초청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몇 번에 걸쳐서 초청을 했는데도 이번 토요일이나 아니면 몇일전에 거절하는 말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고 그를 향하여 욕하지 마시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에게 전하십시오. 오히려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두 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절하지 않고 잔치에 참석을 했습니다.
이렇게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로 잔칫집에 왔는데 잔칫집이 얼마나 큰지 아직도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고 주인에게 보고하니 주인이 다시 종들에게 말한 내용이 23절 말씀입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 내용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 자리는 무한히 넓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교회가 ‘빈자리를 채워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여러분, 우리교회의 빈자리만 생각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빈자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교회의 자리는 예배를 여러 번 드리니까 빈자리가 발행하는 것이지 한 번 드리면 빈자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빈자리를 채우겠다고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빈자리를 생각하면서 구호에 넣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인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네가 너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3:16절 말씀에 보면
“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누구든지”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선착순이 아닙니다. 몇명으로 제한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사람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직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다고 했을 때 주인은 종들에게 한 말이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길과 산울타리 가의 사람들은 누굴까요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그네를 연상하게 합니다. 산울타리가라고 한 것을 보면 어떤 정해진 센타 밖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방인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초청대상이던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초청을 받은 연약한 사람들이란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방인 사람,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범위를 좀 더 좁혀서 생각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알지 못하는 그분들을 향하여 우리가 전교인들이 노방전도를 나갑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처음에는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강권하여 데려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나가서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전단지를 가지고 갑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에게 강권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강권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은 억지로라도 모셔야 한다는 의미로 받습니다만 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설득을 시켜서 올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물리적으로 강제수단을 사용해서 데려오는 것보다는 사양을 한다고 해서 금방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설득해서 반드시 데리고 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구원시키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강제가 필요합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이 망하기 직전에 롯의 가족이 구출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를 통해서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성이 망하지 않도록 약속을 하셨지만 성안에 열 명이 없었습니다. 성을 멸망시키려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가 롯을 찾아가서 네게 속한 사람들,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했습니다. 사자의 말을 듣고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였으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사위들이 말을 듣지 않거든 너희들끼리라도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롯이 머뭇거립니다. 19장 16절에 보면 머뭇거리는 롯을 향하여 주의 사자들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제 발로 안되니까 억지로 끌어내었습니다.
이것이 강권의 은혜입니다. 그 강권하심의 이유는 여호와의 자비하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봉사하고 충성하는데도 강권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National Retail Goods Association)의 조사에 의하면 판매원(salesmen)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며, 25%는 두 번 전화해보고 포기하고, 5%는 세 번 걸어보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88%의 세일즈맨이 한 통 내지 세 통의 전화 후 판매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12%만이 더 끈질기게 하는데 이들 12%가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88%의 세일즈맨이 겨우 20%의 거래를 나누어 하는 셈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권하는 형식을 취하는 전도자 20%가 전체 전도의 8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비추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강권하여 데려오려고 하면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강권하여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보험을 하거나 세일즈를 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나오는 선물의 여러가지 종류를 자신의 돈으로 구입해서 그것으로 소비자들에게 선물을 하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창세기33장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성공했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얻고 재물도 모았습니다. 그런데 올라오는 길에 한 가지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형 에서의 자손들이 길목이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형을 만나면 마음을 동생으로부터 속았던 분노를 이제는 풀고 화해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녹이려고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32장13절 이하에 보면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 선물을 형 에서를 만나서 드릴 때 형이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33장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가족들로 하여금 형에게 인사를 시키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선물을 드리려고 하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이 짐승 떼는 무엇이냐고 하니까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형은 형답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다시 형님에게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라고 하면서 계속 받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18:16말씀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할렐루야!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는 힘이 있습니다. 거센 분노도 선물이 사그라뜨립니다. 선물을 주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고 친구가 되게 합니다. 야곱이 선물을 보낸 후에 진심으로 사과하며 화해하는 뜻으로 일곱 번이나 절을 했습니다. 이런 동생과 화해를 안하면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빈손이면 빈말밖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솔즈베리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도함에 있어서도 선물을 구입해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선물을 구입해 가셔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예수를 바라봅시다. 멸망하여 가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의 마음을 가집시다.
자신의 골육 친척을 구하는 일이라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하던 바울의 마음, 예루살렘에서 환란과 결박의 줄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나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에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 그것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고 고백한 바울의 간절한 복음전파의 마음을 나의 가슴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과 바울의 마음을 가슴에 담아 생명을 구하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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