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전도] 전도

본문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새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양으로 이루어지는데, 잃어버린 양은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나오는 자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자들을 찾도록 하셨다.
전도(傳道)란 글자 그대로 도(道)를 전(傳)하는 것이다. 도(道)란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십자가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에는 갈등과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복음은 나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것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마약(痲藥) 복용은 중독과 심한 고통을 가져온다. 또한 환각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현대사회를 사는 인간은 한없이 소외감을 느끼기 쉽다. 자본주의 체재는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웃사이더를 만든다. 인간에게 상처받은 이런 아웃사이더들에게 마약은 상당히 매력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마약은 현실에서 만족시키지 못한 것들을 강하게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약은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하여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에서, 혹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접촉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매우 심각하다. 마약 중독은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중추신경을 자극해 일시적으로 피로감을 없애주고 자신감과 행복감을 주기는 하지만 마침내는 심신을 황폐화시키고 과다한 투여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중독자들은 마약을 손에 대지 않으면 몸이 무겁고 짜증이 늘어나며, 의심과 경계심, 적개심과 공격성이 증가한다고 한다. 중독이 심해지면 수치심과 도덕성마저 사라지고 피해망상과 환청, 환시 등 정신병적 증상이 잦아지면서 자살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한 마약은 불결한 주사바늘을 같이 사용함으로 인해 피부염과 폐농양, 뇌혈관염, 간염, 에이즈 등 각종 합병증을 일으킨다고 한다. 특히 여성 중독자는 정신박약아나 기형아 출산 가능성이 높아 더욱 심각하다.
이처럼 마약은 개인과 한 가정을 망칠뿐 아니라 각종 범죄의 원인이 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마약을 투여한 뒤 환각상태에서 벌이는 살인강도, 강간, 인질극 등 강력범죄들이 속출하고 있다. 마약 구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절도 강도 마약거래 살인행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르거나 여성의 경우 매춘을 일삼는 등 2차 범죄도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나 이웃 일본에서는 마약(痲藥) 유통이 쉽지 않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마약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으로 안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과 그것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쫓고 쫓기는 일이 발생한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마약을 맛본 후 중독성으로 인하여 계속 투여하기를 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막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쪽은 당장 자기만을 위하여 눈앞의 현실을 쫓는 사람들이며, 다른 한 쪽은 사회를 보고 장래를 보는 사람들이다. 이 둘 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충돌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관계가 부자(夫子) 사이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마약을 피우고 마시는 것을 보고 한 번 빨아보거나 마셔볼 수는 없는 문제와 일반이다.
이런 갈등과 충돌은 복음을 전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집어넣는 우를 범하곤 한다. 전도란 것만 해도 그렇다. 본문을 보면 전도는 세상의 사고방식과의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16). 뿐만 아니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36)고도 말씀하셨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게 됨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도한다고 할 때 그런 갈등과 충돌이 있는가 갈등과 충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을 피하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식으로 발전하고 마는 경우가 있다. 충돌보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병 나음, 가정의 편안함, 복 받음, 병 고침 등이 복음의 진의(眞意)를 뒤덮고 우선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모두 눈이 둘 달린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눈이 셋 달린 것이 정상이라고 하시면서, 눈이 셋 달린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다고 하자. 그러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눈이 셋 달린 것으로 인정해 준다고 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리는 가서 인간은 모두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눈이 둘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이 셋 달린 것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느 곳에 가서든 둘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럴 때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 인간은 모두 정상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하다고 전파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여기에는 필연코 갈등과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눈이 둘 달린 것을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눈이 둘 있는 사람이 정상이 아니기에 누군가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눈은 두 개 달린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교회에 나오면 병 낫고, 성공하고, 편안해진다는 식으로만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이 둘 있으면 안 되고, 셋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만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사이에는 갈등과 충돌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 즉 전도는 세상과의 갈등과 충돌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주님은 제자들을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양이 이리 가운데 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리가 양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요령 있게 피해가면서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계속하여 핍박과 고난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게 되고,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한다는 말씀도 한다(21). 이런 사실을 볼 때 뱀같이 지혜롭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피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지혜는 ‘신중함’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디에 가든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변치 말고, 믿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주님은 검(劍)을 주러 오셨다. 이 검은 실제적인 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과 연계하여 이해해야 한다. 35, 36절은 미가서의 인용이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3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6)
미가서 7장 1-6절까지를 보면 본문의 검(劍)은 재앙 또는 심판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복음과 함께 재앙도 아울러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복음 선포와 심판의 선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즉 복음 선포가 바로 심판의 선포인 셈이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과 심판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도 고난과 영광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만일 고난이 없이 영광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복음은 신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세상과 분리시킨다. 이렇게 볼 때 복음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 복음은 세상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대한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늘나라를 체험한 자와 체험하지 못한 자 사이에 있게 되는 분리인 것이다.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에게 단호함이 있었던 것은 복음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복음 그 자체이셨고, 바울은 복음을 아는 분이었기에 적당한 타협이 없었다. 세상을 넘어서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사신 분들이었다. 그렇다고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사는 것을 이기적인 모습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살기에 이 땅에서 물질을 서로 나누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마치 마약 복용을 하는 자기 자녀를 고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듯이 말이다.
오늘 우리는 그나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도록 하자. 나아가 아직 하늘나라를 보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음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도록 하자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