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본문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가 없는 1주일 동안 교회와 부족한 저를 위해서 중보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한국방문은 다른 때와 달랐습니다. 이번 한국방문은 다른 때와 달리, '알파수련회참석'이라는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들리는 서점에도 들리지 않고,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만자자고 연락이 왔어도 만나지 않고, 인사해야 할 집안 어른에게 조차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수련회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면 만날 사람들도 만나고, 여러 가지 볼 일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그것도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는 산속 깊은 수양관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알파수련회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파수양회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계속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뉴질랜드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차피 매월 첫날은 제가 금식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가져다주는 물수건, 헤드폰, 주스, 땅콩, 저녁식사, 아침식사, 등 다 필요 없었습니다.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으니까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기내로 들고 간 책 두 권을 읽고, 또한 조용히 알파수련회를 뒤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파수련회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일석이조(1石2鳥)’는 단어와 ‘일거양득(1擧兩得)’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이 두 단어를 아십니까 ‘일석이조’와 ‘일거양득’은 비슷한 뜻을 나타내지만, 유래는 다릅니다. ‘일석이조(1石2鳥)’는 동양의 고사성어가 아니고 영어속담입니다. 이 말은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번역하면 '돌 하나를 던져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거양득(1擧兩得)’은 동양의 고사성어로서, 해석하면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춘추후어(春秋後語)》라는 책에서 ‘변장자(辨莊子) 이야기’를 통해서 이 일거양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힘이 장사인 변장자가 여관에 투숙하였습니다. 밤이 깊었을 때, 밖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변장자가 이 말을 듣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머물고 있던 여관에서 일을 하던 한 아이가 말리면서,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서 서로 소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잡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습니다. 결국 그 아이의 말대로 해서 변장자는 힘 안 들이고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일거양득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알파수련회를 참석하고 나서 느낀 것은 알파코스는 ‘일거양득(1擧兩得)’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교회 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는 프로그램
첫째로 알파코스는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입니다. 이 알파코스는 기존의 전도하는 방법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불신자들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는 그 동안 불신자들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파에서는 불신자들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알파코스를 통해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이미 보았고, 또한 지금도 보고 있는 모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세상과 거래했습니다. 총동원 주일 때 불신자들을 초청하며 각종 선물, 티켓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다 압니다. 현대인들은 설득 당하기 싫어하고 감동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 됩니다. ” 총동원주일이나 전도폭발이나 고구마전도법, 새생명축제나 대각성운동, 등의 기존의 전도 프로그램이 불신자들을 억지로 끌고 와서 무너뜨리려야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알파코스에서는 불신자들을 섬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알파코스에 초청되어 온 사람들을 ‘Guest’, 즉 ‘손님’이라고 부르며 최선을 다해서 섬겨줍니다. 10주 동안 이 ‘Guest’들을 정성어린 식사로, 때로는 재미있는 유머로, 때로는 건전가요나 동요 등으로 섬깁니다. 그러면 모든 Guest들이 감동을 받는데, 감동을 받은 Guest는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게 됩니다.
또 비싸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선물을 주고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Talk도 하고 소그룹 모임에서 만난 조원들과 함께 서로 울고 웃기도 하고, 또 6주째에는 특별수양회를 가서 대부분의 Guest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10주를 마치면 Guest들은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우치게 됩니다.
성도들을 행복하게 하는 프로그램
둘째로 알파코스는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할 뿐 아니라, 기존의 성도들을 행복하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들은 나는 행복하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와 보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시키니까, 홈커밍데이나 총동원전도주일이 되었기 때문에, 안수집사 권사 장로 구역장으로써 체면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불신자들에게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파코스에서는 “나는 알파코스에서 행복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 번 와보라”고 말합니다. 알파코스에서는 기존의 전도 프로그램과 달리, 전도 당하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전도하는 사람에게도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전도프로그램을 수료하면 그것으로 끝인데, 10주 동안의 알파코스를 수료한 사람들은 불신남편이나 불신친구들이나 불신이웃들에게 알파코스를 소개하고 그들을 알파코스에 Guest로 참석하게 합니다.
또 알파코스를 마친 사람들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게스트로 초청되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알파코스를 위해서 헌금을 하기도 하고, 자비를 들여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나 유럽,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 가서 알파코스를 열어 사랑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한 다음 기수에서 도우미로 지원하여 다른 Guest를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본인이 Guest가 되어 훈련을 받을 때 보다 도우미로 다른 Guest를 섬기다가 더 큰 은혜를 받으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는 특징이 다른 프로그램과 다릅니다. 저는 알파수련회 기간 동안 이러한 사실을 제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 오신 강사 목사님들이나, 소그룹모임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모 교회 성도님들이나, 찬양을 인도하는 모 교회 찬양팀이나, 수련회에 교육생으로 참석한 목사님들과 사모님들과 전도사님들을 섬기시는 평신도들의 얼굴이 한 결 같이 밝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 결 같이 당당하게 ”나는 알파코스를 만난 후에 행복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알파코스 때문에 목회가 행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알파코스를 시작한 후에 행복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이 알파코스는 불신자를 효과적으로 전도하는데 유용할 뿐 아니라, 기존의 성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알파수련회를 통해서 정말 감동을 받은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유용한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알파코스에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있다든지, 여호와 하나님 말씀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이단성이 있다든지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말씀과 성령’ 두 가지 기둥을 붙들고 나가기를 원하는 우리 교회의 사역방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알파코스라 할지라도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파코스는 비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 교회의 비전이나 사역방향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우리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비전과 사역방향이 매우 유사합니다.
저는 알파코스의 주제성구 말씀을 통해서 알파코스의 귀한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알파코스의 주제성구로서,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성도가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행복한 목사와 행복한 성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마라
첫째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행복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복음증거에 실패를 맛 본적이 있습니다. 그가 2차 선교여행 중 헬라의 수도 아덴,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덴은 옛날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지역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덴에 도착한 후, 타 지역에서와 달리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인 논쟁을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뿐 아니라 헬라철학에도 능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덴 사람들과의 논쟁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전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타 지역에서와 달리, 아덴에서는 핍박과 박해가 없었는데도 전도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학문과 경험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사도 바울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후 새롭게 다짐을 했습니다. 다같이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고상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도 필요 없고, 지혜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증거에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말의 아름다움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달변이나 세상의 지혜가 영혼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은 유머입니다만, 서울에 있는 아들이 시골에 홀로 사시는 아버님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님을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이곳저곳 좋은 곳을 구경시켜 드렸습니다. 그
런데도 우울증은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아버님을 모시고 한 고급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면서 갑자기 “얘야, 이제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며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님이 정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표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음 날 아침에 뵈니 아버님의 병세가 더 악화되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몸이 약해지셨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아들은 한 밤중에 일어나 몰래 아버님의 방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뭔가를 손에 들고 계속해서 ”왜 안 와 왜 안 와”라고 말씀하시며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도대체 아버님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사용하는 벨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님은 음식점에서 식탁 위의 벨을 누를 때마다 서빙 하는 예쁜 아가씨가 와서 뭐든지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 아무도 몰래 주머니에 그것을 넣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것을 누르며 “왜 안 와 왜 안 와”라고 하며 매일 밤을 꼬박 새웠던 것입니다.
누가 웃으라고 만든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도나도 기쁨을 얻고 행복을 얻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점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사용하는 벨을 누르며 “왜 안 와 왜 안 와”라고 하며 매일 밤을 꼬박 새웠던 그 할아버지처럼,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번 알파수련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얼마 전에 노래방에서 살인사건이 났는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어느 한 친구가 30분 동안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자, “왜 너만 부르니 나도 노래 좀 부르자!” 라고 하며 친구를 죽였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손님을 초청해놓고 노래 불러주는 것이 대접이었습니다. 노래 불러주면 손님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반대입니다. 노래를 듣고 있으라고 하면 싫어하는데,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접이고, 말하는 기회를 주면 좋아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기준은 변합니다. 그리고 세상 것들은 불완전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 보면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하는, 그리고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붙잡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처럼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라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100% 만족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어디 갔다 이제 왔니 그대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요, 믿음입니까”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은 처음 교회에 온 어떤 새신자가 큰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고를 게 있었어야지!”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세상에는 고를게 너무 많이 있지만,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고를게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 고를게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의지할 것도 많고, 바라보아야 할 것도 많고 신경써야할 것도 많이 있지만, 모든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여기 "작정하다"는 말은 원어로 ‘크리네인’이라는 말로써, 대법원에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정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만 의지하겠다고 최종적으로 결단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없는 사역을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알파코스를 보면, 우리 교회 ‘새가족모임’처럼 처음 두 주 동안 다른 것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Talk’시간 뿐 아니라, 소그룹 시간에도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그런데도 예상 외로 많은 Guest들이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없는 사역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수님만 의지하겠다고 최종적으로 결단했습니다. 결국 그의 결단대로 고린도에서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더니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교회가 세워지고,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처럼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을 붙들었던 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면 붙들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더 큰일들을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라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겁쟁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혹시 아덴에서처럼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드러날까 염려가 되어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지 겸손함뿐이 아닙니다. 그는 아덴에서와 달리,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다같이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4절에서는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란 말이 나오고, 5절에서는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복음증거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지혜나 설득력 있는 언변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님의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바울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바울과 같은 이러한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화려한 말과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사람의 심령을 변화 시킬 수 없지만,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사람의 심령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일산 한소망 교회의 류영모 목사님은 지난 6년 동안 알파코리아 이사장으로 섬기시다가, 지난 주 목요일 명예이사장이 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도 듣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알파코스를 통해서 받은 축복도 많은 분입니다.
6년 전에 2,000명 출석교인이었던 한소망 교회가 지금은 6,000명이 되었고, 건축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예배당이 지금은 너무 좁아서 새로운 건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쓴 책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가슴앓이”라는 책에 보면, 교도소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 법무부장관이었던 김승규 장로님의 특별한 관심으로 교도소 안에서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인 알파코스를 한소망 교회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알파코스를 시작했을 때, 교도소 안의 죄수, 아니 알파코스의 게스트들이 쉽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힘이 들었습니다. 교도소 간수들도 그들이 변화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한소망 교회 알파팀은 정성스럽게 간식을 준비하여 그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알파코스는 웃고 울어야 마음 문이 열리는데, 교도소 안에 있는 그들은 웃음과 눈물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그맨의 공연을 보고도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우미들이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말수양회를 통해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펼쳐진 주말수양회에 참석한 30여명의 게스트들 가운데 12명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약식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5명은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박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까지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죄를 짓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총 27명이 예수 믿기로 새롭게 결단하고 교도소 안에서 약식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3명만 세례를 받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들은 장로교에서 시행하는 유아세례를 이미 받았다고 해서, 장로교 예식인 입교문답을 통해 믿음을 고백하게 함으로서, 결국에는 30명의 게스트들이 100%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말수양회 마지막 시간인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라는 Talk 시간에 그들의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박장대소가 터지고 Talk 중에 손뼉을 치며 환호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성령사역 시간에는 치유와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던 사람들이 동시에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역사, 방언기도,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말수양회를 마치는 시간에는 간증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걸어 다니는 흉기’ 라고 자신의 별명을 밝힌 한 형제는 가슴을 뜯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고 합니다. 여러 번의 간통, 강간 등으로 이혼 당하고 교도소에 들어온 어떤 형제는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고백하더랍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아 차라리 죄 짓고 교도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좋았다는 청년이 예수님 만난 감격을 간증을 하고, 자신의 몸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악령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좋아하는 형제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변해도 교도소 안이 떠들썩한데 성령님이 임재 하시자, 동시다발적인 회개의 역사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어떤 죄인이라도 변화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교도소 안에서도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에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호주의 어느 해변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서핑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파도가 매우 거칠어 한 해에도 몇 명씩 목숨을 잃곤 했습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한 어부 출신의 노인이 낡은 모터보트를 가지고, 물에 빠진 젊은이들을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 두 명 구조하다 보니 노인은 유명해졌고, 후원자들도 생겨 그곳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할아버지는 더욱 유명해져 신문과 TV에도 나오게 되었고, 국회의원과 시장 등 유명한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해진 그 노인은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느라, 바다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더 이상 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노인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정작 신경 써야 할 예수님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위에 있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십자가를 잃어버린 채 세상 것들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 십자가를 삶의 중심이 두고, 오직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을 삶의 중심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지혜나 경험이나 언변을 의지하지 말고 사도바울처럼 오직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가 없는 1주일 동안 교회와 부족한 저를 위해서 중보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한국방문은 다른 때와 달랐습니다. 이번 한국방문은 다른 때와 달리, '알파수련회참석'이라는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들리는 서점에도 들리지 않고,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만자자고 연락이 왔어도 만나지 않고, 인사해야 할 집안 어른에게 조차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수련회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면 만날 사람들도 만나고, 여러 가지 볼 일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그것도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는 산속 깊은 수양관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알파수련회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파수양회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계속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뉴질랜드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차피 매월 첫날은 제가 금식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가져다주는 물수건, 헤드폰, 주스, 땅콩, 저녁식사, 아침식사, 등 다 필요 없었습니다. 아무런 음식을 먹지 않으니까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기내로 들고 간 책 두 권을 읽고, 또한 조용히 알파수련회를 뒤돌아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파수련회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일석이조(1石2鳥)’는 단어와 ‘일거양득(1擧兩得)’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이 두 단어를 아십니까 ‘일석이조’와 ‘일거양득’은 비슷한 뜻을 나타내지만, 유래는 다릅니다. ‘일석이조(1石2鳥)’는 동양의 고사성어가 아니고 영어속담입니다. 이 말은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번역하면 '돌 하나를 던져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거양득(1擧兩得)’은 동양의 고사성어로서, 해석하면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춘추후어(春秋後語)》라는 책에서 ‘변장자(辨莊子) 이야기’를 통해서 이 일거양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힘이 장사인 변장자가 여관에 투숙하였습니다. 밤이 깊었을 때, 밖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변장자가 이 말을 듣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머물고 있던 여관에서 일을 하던 한 아이가 말리면서,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서 서로 소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한 마리는 죽고, 한 마리는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잡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았습니다. 결국 그 아이의 말대로 해서 변장자는 힘 안 들이고 한꺼번에 호랑이 두 마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일거양득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알파수련회를 참석하고 나서 느낀 것은 알파코스는 ‘일거양득(1擧兩得)’의 효과를 볼 수 있는 교회 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는 프로그램
첫째로 알파코스는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입니다. 이 알파코스는 기존의 전도하는 방법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불신자들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는 그 동안 불신자들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파에서는 불신자들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알파코스를 통해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이미 보았고, 또한 지금도 보고 있는 모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동안 세상과 거래했습니다. 총동원 주일 때 불신자들을 초청하며 각종 선물, 티켓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다 압니다. 현대인들은 설득 당하기 싫어하고 감동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 됩니다. ” 총동원주일이나 전도폭발이나 고구마전도법, 새생명축제나 대각성운동, 등의 기존의 전도 프로그램이 불신자들을 억지로 끌고 와서 무너뜨리려야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알파코스에서는 불신자들을 섬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알파코스에 초청되어 온 사람들을 ‘Guest’, 즉 ‘손님’이라고 부르며 최선을 다해서 섬겨줍니다. 10주 동안 이 ‘Guest’들을 정성어린 식사로, 때로는 재미있는 유머로, 때로는 건전가요나 동요 등으로 섬깁니다. 그러면 모든 Guest들이 감동을 받는데, 감동을 받은 Guest는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게 됩니다.
또 비싸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선물을 주고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Talk도 하고 소그룹 모임에서 만난 조원들과 함께 서로 울고 웃기도 하고, 또 6주째에는 특별수양회를 가서 대부분의 Guest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10주를 마치면 Guest들은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우치게 됩니다.
성도들을 행복하게 하는 프로그램
둘째로 알파코스는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할 뿐 아니라, 기존의 성도들을 행복하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들은 나는 행복하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와 보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시키니까, 홈커밍데이나 총동원전도주일이 되었기 때문에, 안수집사 권사 장로 구역장으로써 체면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불신자들에게 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파코스에서는 “나는 알파코스에서 행복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한 번 와보라”고 말합니다. 알파코스에서는 기존의 전도 프로그램과 달리, 전도 당하는 사람에게 뿐 아니라 전도하는 사람에게도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전도프로그램을 수료하면 그것으로 끝인데, 10주 동안의 알파코스를 수료한 사람들은 불신남편이나 불신친구들이나 불신이웃들에게 알파코스를 소개하고 그들을 알파코스에 Guest로 참석하게 합니다.
또 알파코스를 마친 사람들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게스트로 초청되어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알파코스를 위해서 헌금을 하기도 하고, 자비를 들여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나 유럽,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 가서 알파코스를 열어 사랑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한 다음 기수에서 도우미로 지원하여 다른 Guest를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본인이 Guest가 되어 훈련을 받을 때 보다 도우미로 다른 Guest를 섬기다가 더 큰 은혜를 받으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는 특징이 다른 프로그램과 다릅니다. 저는 알파수련회 기간 동안 이러한 사실을 제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서 오신 강사 목사님들이나, 소그룹모임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모 교회 성도님들이나, 찬양을 인도하는 모 교회 찬양팀이나, 수련회에 교육생으로 참석한 목사님들과 사모님들과 전도사님들을 섬기시는 평신도들의 얼굴이 한 결 같이 밝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한 결 같이 당당하게 ”나는 알파코스를 만난 후에 행복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알파코스 때문에 목회가 행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알파코스를 시작한 후에 행복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이 알파코스는 불신자를 효과적으로 전도하는데 유용할 뿐 아니라, 기존의 성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알파수련회를 통해서 정말 감동을 받은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유용한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알파코스에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있다든지, 여호와 하나님 말씀과 다른 것을 가르치는 이단성이 있다든지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말씀과 성령’ 두 가지 기둥을 붙들고 나가기를 원하는 우리 교회의 사역방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알파코스라 할지라도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파코스는 비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우리 교회의 비전이나 사역방향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우리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비전과 사역방향이 매우 유사합니다.
저는 알파코스의 주제성구 말씀을 통해서 알파코스의 귀한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알파코스의 주제성구로서,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성도가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행복한 목사와 행복한 성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마라
첫째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행복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행복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복음증거에 실패를 맛 본적이 있습니다. 그가 2차 선교여행 중 헬라의 수도 아덴, 오늘날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덴은 옛날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지역입니다. 사도바울은 아덴에 도착한 후, 타 지역에서와 달리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인 논쟁을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뿐 아니라 헬라철학에도 능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덴 사람들과의 논쟁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전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타 지역에서와 달리, 아덴에서는 핍박과 박해가 없었는데도 전도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학문과 경험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사도 바울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후 새롭게 다짐을 했습니다. 다같이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고상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도 필요 없고, 지혜도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증거에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비둘기처럼 순수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말의 아름다움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달변이나 세상의 지혜가 영혼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은 유머입니다만, 서울에 있는 아들이 시골에 홀로 사시는 아버님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님을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이곳저곳 좋은 곳을 구경시켜 드렸습니다. 그
런데도 우울증은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아버님을 모시고 한 고급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면서 갑자기 “얘야, 이제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며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님이 정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표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음 날 아침에 뵈니 아버님의 병세가 더 악화되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몸이 약해지셨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아들은 한 밤중에 일어나 몰래 아버님의 방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뭔가를 손에 들고 계속해서 ”왜 안 와 왜 안 와”라고 말씀하시며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도대체 아버님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사용하는 벨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님은 음식점에서 식탁 위의 벨을 누를 때마다 서빙 하는 예쁜 아가씨가 와서 뭐든지 시중을 드는 것을 보고, 아무도 몰래 주머니에 그것을 넣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것을 누르며 “왜 안 와 왜 안 와”라고 하며 매일 밤을 꼬박 새웠던 것입니다.
누가 웃으라고 만든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도나도 기쁨을 얻고 행복을 얻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점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사용하는 벨을 누르며 “왜 안 와 왜 안 와”라고 하며 매일 밤을 꼬박 새웠던 그 할아버지처럼,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세상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붙잡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번 알파수련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얼마 전에 노래방에서 살인사건이 났는데 그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어느 한 친구가 30분 동안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자, “왜 너만 부르니 나도 노래 좀 부르자!” 라고 하며 친구를 죽였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손님을 초청해놓고 노래 불러주는 것이 대접이었습니다. 노래 불러주면 손님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반대입니다. 노래를 듣고 있으라고 하면 싫어하는데,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좋아합니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접이고, 말하는 기회를 주면 좋아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기준은 변합니다. 그리고 세상 것들은 불완전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 보면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하는, 그리고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붙잡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처럼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라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100% 만족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어디 갔다 이제 왔니 그대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요, 믿음입니까” 그런데 그 설교를 들은 처음 교회에 온 어떤 새신자가 큰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고를 게 있었어야지!”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세상에는 고를게 너무 많이 있지만,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고를게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외에 고를게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의지할 것도 많고, 바라보아야 할 것도 많고 신경써야할 것도 많이 있지만, 모든 신앙의 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여기 "작정하다"는 말은 원어로 ‘크리네인’이라는 말로써, 대법원에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정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만 의지하겠다고 최종적으로 결단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없는 사역을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알파코스를 보면, 우리 교회 ‘새가족모임’처럼 처음 두 주 동안 다른 것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Talk’시간 뿐 아니라, 소그룹 시간에도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그런데도 예상 외로 많은 Guest들이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없는 사역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수님만 의지하겠다고 최종적으로 결단했습니다. 결국 그의 결단대로 고린도에서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더니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교회가 세워지고,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처럼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을 붙들었던 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면 붙들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더 큰일들을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라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겁쟁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혹시 아덴에서처럼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드러날까 염려가 되어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지 겸손함뿐이 아닙니다. 그는 아덴에서와 달리,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다같이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4절에서는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란 말이 나오고, 5절에서는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복음증거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지혜나 설득력 있는 언변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님의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바울의 이 모습을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바울과 같은 이러한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화려한 말과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사람의 심령을 변화 시킬 수 없지만,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사람의 심령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일산 한소망 교회의 류영모 목사님은 지난 6년 동안 알파코리아 이사장으로 섬기시다가, 지난 주 목요일 명예이사장이 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도 듣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알파코스를 통해서 받은 축복도 많은 분입니다.
6년 전에 2,000명 출석교인이었던 한소망 교회가 지금은 6,000명이 되었고, 건축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예배당이 지금은 너무 좁아서 새로운 건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쓴 책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가슴앓이”라는 책에 보면, 교도소에서 있었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 법무부장관이었던 김승규 장로님의 특별한 관심으로 교도소 안에서 불신자 전도 프로그램인 알파코스를 한소망 교회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알파코스를 시작했을 때, 교도소 안의 죄수, 아니 알파코스의 게스트들이 쉽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힘이 들었습니다. 교도소 간수들도 그들이 변화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래도 한소망 교회 알파팀은 정성스럽게 간식을 준비하여 그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알파코스는 웃고 울어야 마음 문이 열리는데, 교도소 안에 있는 그들은 웃음과 눈물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그맨의 공연을 보고도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도우미들이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말수양회를 통해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펼쳐진 주말수양회에 참석한 30여명의 게스트들 가운데 12명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약식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5명은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박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까지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죄를 짓고 그곳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총 27명이 예수 믿기로 새롭게 결단하고 교도소 안에서 약식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3명만 세례를 받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들은 장로교에서 시행하는 유아세례를 이미 받았다고 해서, 장로교 예식인 입교문답을 통해 믿음을 고백하게 함으로서, 결국에는 30명의 게스트들이 100%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말수양회 마지막 시간인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가”라는 Talk 시간에 그들의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박장대소가 터지고 Talk 중에 손뼉을 치며 환호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성령사역 시간에는 치유와 이적과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던 사람들이 동시에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역사, 방언기도,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말수양회를 마치는 시간에는 간증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걸어 다니는 흉기’ 라고 자신의 별명을 밝힌 한 형제는 가슴을 뜯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고 합니다. 여러 번의 간통, 강간 등으로 이혼 당하고 교도소에 들어온 어떤 형제는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고백하더랍니다.
부모가 계시지 않아 차라리 죄 짓고 교도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좋았다는 청년이 예수님 만난 감격을 간증을 하고, 자신의 몸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악령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좋아하는 형제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변해도 교도소 안이 떠들썩한데 성령님이 임재 하시자, 동시다발적인 회개의 역사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어떤 죄인이라도 변화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교도소 안에서도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에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호주의 어느 해변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곳은 젊은이들이 서핑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파도가 매우 거칠어 한 해에도 몇 명씩 목숨을 잃곤 했습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한 어부 출신의 노인이 낡은 모터보트를 가지고, 물에 빠진 젊은이들을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 두 명 구조하다 보니 노인은 유명해졌고, 후원자들도 생겨 그곳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할아버지는 더욱 유명해져 신문과 TV에도 나오게 되었고, 국회의원과 시장 등 유명한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해진 그 노인은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느라, 바다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더 이상 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 노인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정작 신경 써야 할 예수님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주위에 있는 것들이 많아지다 보니,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십자가를 잃어버린 채 세상 것들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세상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 십자가를 삶의 중심이 두고, 오직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을 삶의 중심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지혜나 경험이나 언변을 의지하지 말고 사도바울처럼 오직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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