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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우리의 선교적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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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선교신학자들이 70년대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부흥하는 것을 보고 놀랍다는 눈짓을 주었습니다. 지속적인 80년대의 한국 교회를 보고서는 부러운 눈빛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춤했지만 발전하는 한국 교회를 90년대는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 올 2000년대는 한국 교회의 많은 선교신학자들, 그리고 선교지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은 2000년대의 선교의 필드에서 주전 멤버는 한국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선교신학자이며 해외 선교에 일찍 눈을 뜬 이강천 목사님은 "세계 선교의 역사적 촛불은 한국교회의 촛대 위에 꽂혔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선교의 주역이 한국 교회라고 했던 분들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복음 전도 운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태어나셨고 거기서 활동하셨으며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24장 47절에서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로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 날에 성령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 전도 운동이 예루살렘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이 복음 전도의 운동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오순절 당일에만 3000명의 회심자가 생겼습니다.
그 후 스데반의 핍박과 순교이후 사방으로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세계화시키게 됩니다. 그야말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결과 세계 선교기지인 안디옥 교회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기지의 역할을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면서 더욱 확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안디옥에서 바울과 함께 세계의 도시 로마에 입성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그리고 로마로 동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계속 동진을 계속해서 유럽 전역을 복음화 시키고, 1620년 메이 플라워호를 탄 청교도들에 의해서 미국을, 그리고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후 선각자들의 한국과 중국, 일본을 향해 복음 운동을 폈으나 한국만 눈부신 교회 성장을 이루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전체에 비해 미미한 숫자만 기독교화가 되었습니다. 결국 미국의 뒤를 이어 바톤을 넘겨 받을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동진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한국이 세계 선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선교지인 한국 교회의 상황과 선교지의 상황이 너무나 급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교의 촛대가 한국교회 위에 꽂혔다는 이강천 목사님의 논리는 현실적인 상황 앞에서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계속 성장하며 선교적 과제를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꽃을 피워 보기도 전에 시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기적은 선교를 위한 기적이라고 하던 일이 옛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 교회는 대략 10년 주기로 배가의 성장을 보여 왔습니다. 1945년 해방되던 해 기독교 인구가 30만명이었습니다. 10년 후인 1955년에는 그것이 60만명이 되었고, 1965년에는 약 120만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에는 무려 4배가가 되었습니다.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교회의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교회 중에서 성장 모델로 꼽고 있는 크리스탈 캐더랄에서도 외국 번역기가 멕시칸과 한국어가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교폭발을 기대해도 좋다는 분홍빛 청사진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적 기적인 한국 교회의 기적 위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2003년 상황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느냐 우리가 잘 알 듯이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 성장은 지금 멈추어 버렸습니다. 아니 퇴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교인 숫자가 현 상태만 유지해도 부흥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하는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얼마 전 총회 본부에서는 선교백서를 발간했습니다. 그 책에는 각국의 선교의 지침들과 수고하는 선교사들의 면면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앞으로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를 위해 어떻게 라는 How가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방법대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성결신문에 광고하고 교단의 선교관련 목사님들을 모셔서 파송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개교회로 모셔오면 다 한결같이 자신들이 현지에서 적응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나 나열하고 현지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그 호소가 먹혀들면 후원자들이 많이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오후 예배 선교사님의 선교지 이야기나 듣고 끝나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미래사회를 향하고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2003년은 전환기의 사회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산업사회에서 기술력으로, 이제는 정보 기술사회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직 농업 기술조차 습득하지 못한 선교지를 생각하는 것은 멈추어야 합니다. 앞으로 선교 현장의 미래도 역시 정보기술의 구조와 탈 현대화의 이념이 활성화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미개한 나라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는 정보를 만들어내고, 저장하고 통제하는 진보된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서서히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물론 아직도 미개하고 저급한 생활수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고 아직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복음을 들고 나가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중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인도네시아 사람이든지, 일정수준 발전, 성숙한 기반에서 정보혁명을 매개로 발전하는 사회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는 정보가 곧 기술이고, 정보가 곧 경제인 사회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선교사들도 그렇고, 선교를 후원하는 우리들도 미개한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막연히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일부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나라를 제외하고는 우리 교단이 선교하고 있는 나라들도 이미 정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아프리카 토인같은 사람들이나 선교한다는 발상을 가지고는 선교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해서 제일 먼저 정보화 사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들이 만나는 정보화 사회의 일원인 외국 사람들에게 "정보화 사회의 나쁜 점이 이런 것이다"라고 소개해 주고 결국 인간이 만든 사회의 허점이 무엇이며, 그 허점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모두가 정보화 사회의 단점을 알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기관이나 현지에 나가는 선교사들이 이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 후원자들도 역시 이런 부분에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사는 나라로 알고 있는 중국 상해도 2001년도 도시 생계비 기준으로 뉴욕이 100이라면 96입니다. 즉 미국 뉴욕에서 한 달을 살기 위해 100원을 써야 산다면 중국 상해에서도 96원을 써야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질에 있어서도 10이 제일 좋은 수치라면 한국은 5. 64이고, 중국은4. 53입니다. 결국 우리 나라와 중국의 삶의 질도 10%정도밖에 차이가 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선교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선교가 되고 선교사만 파송하면 선교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문화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생각입니다. 미국이 지금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어도 파송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우월감으로 선교를 하다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우월감으로 선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선교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말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요컨대 정보기술이 지배하는 세대의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선교를 통해 채워주는 노력이 있어야만 앞으로 선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기술 사회가 갖는 맹점을 복음이 채워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정보의 빈부차이, 정보 기술의 독점, 그리고 비인간화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하고, 사회정의는 단순히 인권회복이 아니라 이제 정보에 매달리는 인간의 운명에 해답을 줄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하고 선교사들은 이것을 선교지에서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는 300여개 주후원 교회와 700여 개인 후원자들이 해외 선교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통산 43개국에 231 선교사 가정을 파송했고, 선교사 총 수는 414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2,916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우리 교단의 역량으로 보면 놀라운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어쩌면 우리와 직접 상관이 없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명령이요, 분부이십니다. 에밀 부룬너(E. Blunner)는 "불이 타는 곳에 불이 존재하듯, 선교하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10:14-17에서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들으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하였으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하였습니다.
유명한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도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믿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당신 그런 짓만 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당신 자녀들이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라고 했답니다.
그때 백낙준 박사의 아버지는 "이 양반아! 당신이나 잘 믿으시오! 별 걸 다 간섭하네…. 에이 재수없으려니" 그리고는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이 들기만 하면 그 말이 자꾸만 들리더랍니다.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그래서 곰곰이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자기를 돌아보니 순 거짓말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결국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복된 가정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신학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가 교회의 하부구조가 아니라 교회의 중심이며, 교회의 기능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그 자체라 할 만큼 중차대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모델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끝이 났지만 그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제공했습니다. 바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먼저 이 시대의 교회들은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 선교의 사명은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습니다. 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교적 사명과 더불어서 한가지 마지막으로 더 생각해 볼 것은 교회는 끝없이 베푸는 곳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선한 곳, 선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대와 이유 때문에 교회에 손을 벌리고 도움을 호소하곤 합니다. 또 가시적인 구제가 넉넉지 못하면 교회가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구제를 열심히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구제에 앞장서는 것은 사람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요청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19절 말씀에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는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성경은 그의 기도와 구제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지출이 아닙니다. 선교는 우리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내 교회, 내 성도만 감싸는 교회는 이제 이 시대에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회를 향해 열려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도 열려야 하며, 교회의 문도 열려야 합니다. 열린다는 말은 바로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그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는 말입니다. 선교도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주님이 성육신하신 그 헌신을 이어받아 선교를 향한 뜨거운 사명감에 불타는 성도들, 그리고 베품과 나눔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책임을 잘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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