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새생명 전도축제
본문
1880년대 일본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살인과 강도짓을 하여 많은 현상금이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의 일곱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다가 잡혔습니다. 마침내 이 살인강도가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의 아들을 함께 죽이는 가장 잔혹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기름을 가마솥에 넣고 강조 부자를 그 안에 앉혀 놓은 다음에 밑에서 불을 때서 죽이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사형 날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마솥에 들어갔습니다. 밑에서 불을 땠습니다.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뜨거워!”하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으며 달랬습니다.
“아들아! 조금만 참아라”
그런데 기름이 더 떠거워지자 아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아빠,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즉각 그의 어린 아들을 머리 위로 치켜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기름에 데어 죽을 때까지 아들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바깥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고, 결국 그 아들만큼은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도 진합니다. 물론 피가 사랑을 만들기도 합니다. 극형에 처형당해야 하는 악한 사람이라도 아버지로서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죄없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자신을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9:15절 말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엄마아 어찌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아무리 자식이 잘못해도 자기가 난 아들을 요서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혹 육신의 엄마와 아빠는 그것을 잊을지라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결단코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과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어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제자로 삼은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입니다. 느닷없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에 걸쳐서 물었습니다.
왜 물었을까요 사실 베드로는 전과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한다고 해놓고 부인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확인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거듭 거듭 확인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원어 적으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아가파스 메(avgapa/|j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프레온 투톤 필로 세(filw/ se)”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가파스 메((avgapa/|j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프레온 투톤 필로 세(filw/ se)”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필레이스 메(Filei/j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필로 세(filw/ se)”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처음에는 아가페 사랑으로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형제 사랑인 필로로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사랑은 언어로서의 표현이 아닙니다. “필레이스 메”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어렵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행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부로서의 사랑입니다. 돈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도, 시간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나이가 어려도, 아니 늙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늘만큼 하십니까 바다, 아니 우주만큼 하십니까
수많은 성경 속의 인물 중에 바울처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도 드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그의 사랑 고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란이 닥쳐와도 어떤 핍박이 있어도, 어떤 역경이 있어도 때로는 헐벗고 굶주리는 일이 있어도 그 사랑을 막을 자 없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함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으니까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리로다”
사랑하기전의 모습과 사랑한 후의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함이 없을 때는 예수님을 자기의 스승임을 고백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권력 앞에서는 자신은 전혀 그 사람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그의 고백이 바뀌었습니다.
사도행전 4:17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붙잡혀갔다가 아무런 혐의가 없어서 풀려날 때 관원들이 예수 이름을 아무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면서 놓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니 허물이 보이고, 사랑이 없으니 단점이 보이고, 사랑이 없으니 보기가 싫어지고 만나는 것조차도 싫어집니다. 사랑이 없으니 교회 일을 해도 불평이 생기고 사랑이 없으니 매사에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수 백 만원을 사용해도 아깝지 않은데 사랑이 없으면 100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이 아깝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돈은 아깝지 않은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헌금이 아깝게 느껴지고 헌신하는 일들이 힘들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 없거나 하더라도 사랑이 크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시절 일사각오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 한국 개신교의 순교사에 길이 빛나는 한 장을 마련한 인물은 단연코 주기철 목사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목사님은 1939년 이른 봄에 행한 마지막 설교인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채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이외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차하게 살려고 할 수 있으랴”
주 목사님은 설교하시다가 손을 높이 들고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서 부른 찬송이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그리고는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이로소이다.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죄악 세상에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권에 서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
당시에 같이 감옥에 있던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라는 책을 쓴 안이숙 선생님의 글에 의하면 주 목사님도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흔들리는 자신의 신앙을 함께 위로하듯 안이숙 선생님께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한발자국씩만 걸읍시다. 뛸려고도 말고 날려고도 말고 그저 닥쳐오는 일을 한발자국씩만 다지면서 가면 갈 수 있겠지요. 죽는 것이 목표이면 그 죽음이 언제 오든지 언제나 죽음의 선만 목표하면 그 나머지 일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니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
주 목사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다른 설교 속에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라는 것이 그렇게도 아플 수가 있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주님이 힘을 주시겠지요”
“단번에 받는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라도 넘어지게 됩니다. 허물며 나 같은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이외다”
1944년 4월 20일 오정모 사모님이 마지막 면회를 갔습니다. 간수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주목사님에게 눈물을 흘리며 “여보 승리해야 하오”라는 한마디는 더 용기를 주면서도 매서운 말이었습니다. 그때 주목사님은 “내 대신 불쌍한 내 어머니를 잘 모셔 주시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듯이 그의 부인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오랜 감방 생활 속에서 추위와 더위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4월이라 하지만 아직은 차가웠습니다. 주목사님은 아내에게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고 싶소” 그렇게도 꿋꿋한 강철같은 목사님이지만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사모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위하여 기도하리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묻힐 곳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달라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도 자기 곁에 묻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 이튿날 21일 금요일 밤 9시 감방에서 주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내 영혼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런 고난의 승리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힘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박식한 지식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옵니다. 아무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도 사랑함이 없이는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알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는 진정한 충성이나 헌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사명보다도 사랑함이 우선입니다. 그 어떤 봉사보다도 사랑함이 우선입니다. 사랑이 전제되어 질 때에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주셨던 그 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분이 피흘려 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족의 아픔을 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성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국가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시며 안고 안수해 주셨던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어린이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300데나리온, 즉 1,500만원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더러운 발을 닦았던 희생적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더욱 많이 길러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전도도 사랑하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소망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것은 표적도 공적도 사람의 수가 아니라 오직 사랑에 있다”고 주경가인 파머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뇌성마비 송명희 자매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 내 마음 다하여 /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 그 누구보다 더 / 내 마음이 뜨겁도록
타오르는 불길보다 / 더 뜨겁게 / 그리하여 그리하여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 변함없이 영원히.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참좋은 칠곡교회서 주님은에게 물으셨네 / 사랑하는 야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다음에 베드로가 사랑한다는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에게 부탁한 내용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네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한다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부탁한 말씀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항상 제자 삼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사랑하면 ‘충성하라’ 하지 않아도 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헌신하지 말라’고 해도 헌신하게 됩니다. 우선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 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그나티우스 감독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주님을 사랑하는 희생의 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북한에서는 지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북한이 공산화 된지 벌써 6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분은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8살 때 6,25 사변이 터졌고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왔습니다.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친구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공산군들이 마을 공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엄마 아빠도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빨리 대답해라"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빨리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어른들은 괴로워 두 눈을 꼭 감아 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산군 장교는 사람들을 모두 목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해라”
그러나 하룻밤이 지났지만 아무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군 장교는 더 볼 것이 없다며 장갑차를 몰고 와서 그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머리가 깨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1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장차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임을 예고 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돌이켜 보니까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던 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서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가 그를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영광 돌린다고 하면 지금 주님이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제빨리 따라나선 이 친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을 들으셨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너에게 주어진 길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십자가에 달려 죽던 아니면 편안하게 죽던, 아니면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살려놓던 상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전도대상자를 작정하시고 이 귀한 생명을 인도하려고 헌신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는 작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너무 적개 하였더라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내 할 일 내가 감당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일에 새 생명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여호와 하나님께 차려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구해야 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뿐인 나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려 제물로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 받은 사랑을 본받아 갚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작정한 작정서를 지금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리겠습니다. 작정서를 주님 앞에 올릴 때 전도재상자로 작정한 분들을 반드시 초청하여 주님 앞에 인도하겠다는 하는 결단의 마음도 함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의 아들을 함께 죽이는 가장 잔혹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기름을 가마솥에 넣고 강조 부자를 그 안에 앉혀 놓은 다음에 밑에서 불을 때서 죽이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사형 날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가마솥에 들어갔습니다. 밑에서 불을 땠습니다.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뜨거워!”하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으며 달랬습니다.
“아들아! 조금만 참아라”
그런데 기름이 더 떠거워지자 아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아빠,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즉각 그의 어린 아들을 머리 위로 치켜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기름에 데어 죽을 때까지 아들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바깥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 큰 감동을 받았고, 결국 그 아들만큼은 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도 진합니다. 물론 피가 사랑을 만들기도 합니다. 극형에 처형당해야 하는 악한 사람이라도 아버지로서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죄없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자신을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립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49:15절 말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엄마아 어찌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아무리 자식이 잘못해도 자기가 난 아들을 요서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혹 육신의 엄마와 아빠는 그것을 잊을지라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결단코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과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어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제자로 삼은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입니다. 느닷없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에 걸쳐서 물었습니다.
왜 물었을까요 사실 베드로는 전과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한다고 해놓고 부인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확인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거듭 거듭 확인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원어 적으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아가파스 메(avgapa/|j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프레온 투톤 필로 세(filw/ se)”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가파스 메((avgapa/|j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프레온 투톤 필로 세(filw/ se)”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필레이스 메(Filei/j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필로 세(filw/ se)”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처음에는 아가페 사랑으로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형제 사랑인 필로로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사랑은 언어로서의 표현이 아닙니다. “필레이스 메”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은 어렵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던져 우리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행동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부로서의 사랑입니다. 돈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도, 시간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나이가 어려도, 아니 늙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늘만큼 하십니까 바다, 아니 우주만큼 하십니까
수많은 성경 속의 인물 중에 바울처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도 드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그의 사랑 고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란이 닥쳐와도 어떤 핍박이 있어도, 어떤 역경이 있어도 때로는 헐벗고 굶주리는 일이 있어도 그 사랑을 막을 자 없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심지어 생명을 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함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랑이 있으니까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리로다”
사랑하기전의 모습과 사랑한 후의 모습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함이 없을 때는 예수님을 자기의 스승임을 고백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권력 앞에서는 자신은 전혀 그 사람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그의 고백이 바뀌었습니다.
사도행전 4:17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붙잡혀갔다가 아무런 혐의가 없어서 풀려날 때 관원들이 예수 이름을 아무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면서 놓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니 허물이 보이고, 사랑이 없으니 단점이 보이고, 사랑이 없으니 보기가 싫어지고 만나는 것조차도 싫어집니다. 사랑이 없으니 교회 일을 해도 불평이 생기고 사랑이 없으니 매사에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수 백 만원을 사용해도 아깝지 않은데 사랑이 없으면 100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헌금하는 것이 아깝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돈은 아깝지 않은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헌금이 아깝게 느껴지고 헌신하는 일들이 힘들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 없거나 하더라도 사랑이 크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시절 일사각오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 한국 개신교의 순교사에 길이 빛나는 한 장을 마련한 인물은 단연코 주기철 목사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목사님은 1939년 이른 봄에 행한 마지막 설교인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채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이외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차하게 살려고 할 수 있으랴”
주 목사님은 설교하시다가 손을 높이 들고 함께 찬송을 부르자고 하면서 부른 찬송이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그리고는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이로소이다.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죄악 세상에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권에 서게 하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
당시에 같이 감옥에 있던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라는 책을 쓴 안이숙 선생님의 글에 의하면 주 목사님도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흔들리는 자신의 신앙을 함께 위로하듯 안이숙 선생님께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한발자국씩만 걸읍시다. 뛸려고도 말고 날려고도 말고 그저 닥쳐오는 일을 한발자국씩만 다지면서 가면 갈 수 있겠지요. 죽는 것이 목표이면 그 죽음이 언제 오든지 언제나 죽음의 선만 목표하면 그 나머지 일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니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
주 목사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다른 설교 속에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라는 것이 그렇게도 아플 수가 있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주님이 힘을 주시겠지요”
“단번에 받는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어렵습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라도 넘어지게 됩니다. 허물며 나 같은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이외다”
1944년 4월 20일 오정모 사모님이 마지막 면회를 갔습니다. 간수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주목사님에게 눈물을 흘리며 “여보 승리해야 하오”라는 한마디는 더 용기를 주면서도 매서운 말이었습니다. 그때 주목사님은 “내 대신 불쌍한 내 어머니를 잘 모셔 주시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듯이 그의 부인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오랜 감방 생활 속에서 추위와 더위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4월이라 하지만 아직은 차가웠습니다. 주목사님은 아내에게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고 싶소” 그렇게도 꿋꿋한 강철같은 목사님이지만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사모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가면 조선교회위하여 기도하리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묻힐 곳 웅천에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달라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도 자기 곁에 묻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 이튿날 21일 금요일 밤 9시 감방에서 주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내 영혼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런 고난의 승리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의 힘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박식한 지식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나옵니다. 아무리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도 사랑함이 없이는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알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는 진정한 충성이나 헌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사명보다도 사랑함이 우선입니다. 그 어떤 봉사보다도 사랑함이 우선입니다. 사랑이 전제되어 질 때에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주셨던 그 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분이 피흘려 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족의 아픔을 보시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성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국가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시며 안고 안수해 주셨던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어린이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300데나리온, 즉 1,500만원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더러운 발을 닦았던 희생적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더욱 많이 길러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전도도 사랑하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소망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것은 표적도 공적도 사람의 수가 아니라 오직 사랑에 있다”고 주경가인 파머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뇌성마비 송명희 자매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 내 마음 다하여 / 모든 것 다하여
그 무엇보다 더 / 그 누구보다 더 / 내 마음이 뜨겁도록
타오르는 불길보다 / 더 뜨겁게 / 그리하여 그리하여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 녹기까지 사랑하고 싶어라 / 변함없이 영원히.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참좋은 칠곡교회서 주님은에게 물으셨네 / 사랑하는 야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다음에 베드로가 사랑한다는 대답을 들으시고 베드로에게 부탁한 내용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네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한다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부탁한 말씀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는 항상 제자 삼는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사랑하면 ‘충성하라’ 하지 않아도 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헌신하지 말라’고 해도 헌신하게 됩니다. 우선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 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그나티우스 감독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주님을 사랑하는 희생의 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최근까지도 북한에서는 지하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되어 공개처형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이 북한의 지하교회 교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북한이 공산화 된지 벌써 6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남아있을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분은 뜨거운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이 8살 때 6,25 사변이 터졌고 마을에 공산군이 들어왔습니다. 강가에서 놀고 있다가 마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친구들과 함께 달려가 보니 공산군들이 마을 공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묶어 놓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엄마 아빠도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면 살려주고,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빨리 대답해라" 엄마 아빠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에게 빨리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하라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쳤지만, 어른들은 괴로워 두 눈을 꼭 감아 버렸습니다. 화가 난 공산군 장교는 사람들을 모두 목만 남겨놓고 땅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해라”
그러나 하룻밤이 지났지만 아무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산군 장교는 더 볼 것이 없다며 장갑차를 몰고 와서 그 위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머리가 깨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모습을 생생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주셨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1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장차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임을 예고 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돌이켜 보니까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던 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서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드로가 그를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영광 돌린다고 하면 지금 주님이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제빨리 따라나선 이 친구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을 들으셨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너에게 주어진 길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십자가에 달려 죽던 아니면 편안하게 죽던, 아니면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살려놓던 상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전도대상자를 작정하시고 이 귀한 생명을 인도하려고 헌신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는 작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너무 적개 하였더라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내 할 일 내가 감당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일에 새 생명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여호와 하나님께 차려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명을 구해야 할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뿐인 나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려 제물로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 받은 사랑을 본받아 갚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작정한 작정서를 지금 이 시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올리겠습니다. 작정서를 주님 앞에 올릴 때 전도재상자로 작정한 분들을 반드시 초청하여 주님 앞에 인도하겠다는 하는 결단의 마음도 함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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