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롬 9:1-3)
본문
65년 전, 지난 1945년 8월 15일에 하나님은 우리민족에게 “해방”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일제 강점시기에 우리 민족과 교회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아픔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날의 감격과 기쁨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과 민족의 정신
우리가 세계역사를 살펴보면, 한 민족이 어떤 신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민족의 정신세계와 그 운명이 결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유교라는 종교의 바탕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중국의 민족정신은 공자와 맹자의 도인 유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도인들은 힌두교라는 토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 속에는 힌두교가 흐르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스리랑카와 태국과 미얀마, 캄보디아는 불교권의 나라입니다. 이천년 동안 이어온 불교라는 나무에 맺힌 열매들입니다. 아랍과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슬람권입니다. 그들의 문화는 이슬람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차이는 여호와 신앙과 알라 신앙의 차이입니다. 영국의 품위와 일본의 품위의 차이는 그 지성이나 경제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상과 비기독교적인 사상의 차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높은 인격적인 자아는 높은 인격적인 신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서민들의 피 속에 기독교 신앙이 흐르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 북구라파의 나라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고, 현대과학이 나왔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많은 학자들은 미국정신의 뿌리는 청교도 신앙과 서부 개척정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신앙위에 미국이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화폐인 달러에 보면, “In God we trust"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미국의 경제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시14:1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만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던 북한 주민들도 불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인생, 하나님모르는 인생이 가장 불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소망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지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희망이 있습니다. 한 개인도 그렇지만 한 민족도 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일 때, 그 민족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민족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뿌리내리면서 우리나라는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
몇 년 전 하와이 연합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을 때, 잠깐 시간을 내어 하와이를 돌아볼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개척했다는 한인교회에 들리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언제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역사 문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문서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회심하게 된 것이 1899년 한성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이었습니다. 그는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미국의 많은 선교사들과 서양문화를 접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서구의 학문과 선교사들을 만난 것은 현실적인 활동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배제 학당시절에 선교사님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평생 처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
그랬더니 갑자기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평안이 깃들면서 자신이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답니다.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하는 순간, 그의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렇게 옥중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한국 민족을 정신적, 도덕적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기독교 신앙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다른 동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상재, 김정식, 홍재기 등 독립협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양반 지식인들과 더불어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2년 12월 28일, 감옥 안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나라를 세우려고 참 많이 애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군대 안에 군목제도를 설립한 것입니다.
하나님 신앙위에 세워진 나라와 하나님 없는 사상위에 세워진 나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다르듯이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씨가 세계를 순방하고 돌아와서는 그 다음 주일에 정동제일교회에 나가 등록했다고 합니다. 세계를 다니고 보니까, 하나님 믿는 나라와 그렇지 않는 나라가 너무 달랐다는 것입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우리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들어 온지 125년이 지났습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만 우리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 동안 기독교 신앙은 크게 세 단계로 발전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포교의 단계입니다.
1888년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으로 세례 받은 사람의 숫자가 고작 25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기름부음의 사건이후 1922년까지 기독교인의 숫자는 23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때 일어난 운동이 ‘백만인 구령운동’ 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아픔인 6.25를 겪으면서 백만 명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포교의 단계에 있어서 수많은 전도부인, 권서가 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신앙부흥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지난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엄청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주로 사경회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된 반면, 이때에는 주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회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저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했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에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일천만 명이 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제자훈련을 통해, 혹은 여러 가지 신앙훈련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으로 한 가정이 변하고, 도시들과 나라들이 변하는 단계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기독교 문화를 통해 사회와 한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세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미 들어섰고, 성도들 한 명 한 명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드러낼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발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이런 방향으로 흘러왔습니다. 물론 지금도 복음도 지속적으로 증거 되어야 하고, 그래서 포교활동을 해야 하고, 또 부흥회를 통한 신앙부흥운동도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정말 한 개인이, 한 가정이, 그리고 도시와 나라들이 변화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생각에는 아직까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우리 사회에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나라의 여러 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져야 할텐데... 지금쯤이면, 좋은 그리스도인 정치인이 나와서 한국의 정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고, 교육이나 문화,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 우리 주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워지고,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의 역사가 아직까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교회의 발목을 붙잡고, 교회의 영적 영향력을 넘어뜨리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병들고 잘못된 신앙, 기복신앙과 성공주의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심을 가진 성도들, 변화되지 않고 불신자의 욕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성도들, 세속적인 가치에 너무 찌들린 교회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부도덕한 일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는 세속적인 가치로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목회를 성공이라는 잣대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말해야 하고,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인도의 아버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간디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간디를 ‘마하트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위대한 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간디는 태양 같은 존재요, 위대한 혼입니다. 요즘 간디의 무덤은 세계 많은 정치인들과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다녀가는 명소가 되었는데, ‘라즈 갓’이라고 불리는 이 기념 묘소의 화강암 벽에는 ‘간디의 망국론’이라고 알려진 ‘일곱 가지 사회악’이라는 그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간디가 지적한 ‘일곱 가지 사회악’은
첫째, 원칙 없는 정치,
두 번째는 노동 없는 부(富),
셋째는 양심이 마비된 쾌락,
네 번째 도덕적 가치 없는 지식,
다섯째 도덕성 없는 상업,
여섯째 인간성 없는 자연과학,
일곱째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간디는 원칙없는 정치를 사회악의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그리고 희생없는 종교도 사회악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간디의 이런 통찰력이 무섭습니다. 저는 목사니까 ‘자기희생 없는 종교’라는 말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종교가 자기희생 없이 자기 배만 채우기 시작하고, 자기만을 알고 이기적이고 기복적이 되면 결코 한 민족과 한 사회를 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디가 외친 일곱 가지 사회악이야말로 오늘 우리 사회의 현상을 그대로 지적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악의 으뜸이라는 ‘원칙 없는 정치’는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요, 희생없는 종교는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국의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성경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고, 교회가 이 나라와 민족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치지 않는 고통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에게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구원의 믿음이 저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졌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동족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큰 근심,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본문 1-2절, 그리고 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에 보면, 그는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큰 근심과 고통은 바로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비록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자기 민족, 유대인들이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겐 근심거리였고, 고통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것을 간절하게 소원했습니다. 여기 에 나오는 ‘저주’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데마’입니다. 이 말은 멸망, 심판, 즉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멸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이 바로 ‘아나데마’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멸망이 자기에게 오는 한이 있을지라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구원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강력하게 민족의 구원을 소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바울이 마음이 단순히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민족애는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번영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민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신앙적인 차원의 민족애,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만 편안하고 무사하겠다는 것, 나만 구원받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대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더라도 ‘나만 잘되는 돼’ 라는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죽어 가는 사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가를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가족이나 자기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데 결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족들 가운데 아직도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정말로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이 너무 분명한데 어떻게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오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데,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만이 아니라 모세 역시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큰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자손을 진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생명을 걸고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백성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우리 주님 역시 장차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탄식하며 우셨습니다.
누가복음19:41-42에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인 유대인의 구원을 위하여 탄식하며 우셨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모세의 기도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의 탄식에서 민족을 사랑하는 끓어오르는 애국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민족애, 나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신앙적인 애국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간혹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상대편을 비방합니다. 보수니, 진보니...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정치적인 입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적인 애국심이어야 합니다.
애국하는 믿음
오늘 광복기념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애국심으로 승화되기를 바랍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사랑을 나라 사랑과 동일시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다 애국자들이었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 누나, 이준 열사, 전덕기 목사님, 김구선생님 이분들은 모두가 다 우리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믿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와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 국민으로서 모든 의무를성실하게 행하는 것, 납세의 의무나 국방의 의무를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 신앙위에 세워지도록, 우리 민족이 하나님 믿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2:1-2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 모든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나라가 망하면 신앙생활도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면 교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보았습니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도 겪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 민족은 위기였습니다. 교회는 문을 닫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나라의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기도위에 세워진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경의 전기에 보면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일어났던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국회에 모여 매우 중요한 안건을 심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상인 처칠이 앞 의자에 머리를 파묻고 졸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국회의장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일국의 수상이 한 나라의 중요한 의제를 의논하는 마당에 어떻게 졸고 계십니까?” 그때 처칠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졸다니요? 나는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의장이 다시 “아니 하필이면 이런 때 여기서 기도를 하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처칠이 벌떡 일어나더니 천둥같은 호령을 했다고 하지요 “아니 이때에 기도하지 않는다면 언제 기도하라는 말입니까? 나라의 중요한 일들이 논의되고 있는 바로 이 자리가 기도하는 자리가 될 수 없다면 어디에서 기도하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때가 바로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시기입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혹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장로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상황은 더 어렵습니다. 권력 세습을 위해 북한 주민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지하교회 성도들을 체포하고 3명을 사형시켰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한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블레셋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을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 믿는 민족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 애국가처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