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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의인의 후손이 받을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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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사가 여행 중에 갑자기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이 신사는 고장난 차를 밀고 1마일 이상을 갔습니다. 어느 민가 앞을 지나는 데 그 집 주인이 땀을 뻘뻘 흘리는 그 신사에게 시원한 주스 한 잔을 대접했습니다. 그 신사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떠났습니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나서 그 집 주인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쳐서 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아들의 몸은 완쾌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는데 치료비 천 5백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청구서 맨 밑에 붉은 글씨로 “당신의 치료비는 주스 한 잔으로 이미 정리되었습니다. 염려 말고 오늘 중으로 퇴원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신사가 저 유명한 미네소타 주 체스타 병원을 설립한 메이어 박사였습니다. 20년 전에 대접한 주스 한 잔에 천 5백불을 받았으니 잘 받은 것 아닙니까?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적은 헌금으로 평생을 지불해도 못다 청산할 엄청난 축복의 빚을 갚고 사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은 의인의 후손이 창대해지고 더욱 형통하게 된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시 92:12). 오늘은 청교도의 후손들이 받을 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시켜 의인의 후손들의 받을 축복이란 제목으로 피차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의인의 후손들은 믿음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소유하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게 됩니다. 믿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신학자 폴 틸리히는 오늘의 미국의 사회상을 네 가지로 표현하면서 매우 비관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오늘의 미국은 개인주의 나라요, 배금주의 나라요, 인본주의 나라요, 향락주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청교도의 자녀들은 98%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며 기독교 종주국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미국의 헌법을 초안할 때 헌법 기초위원들은 헌법 총칙 제1장 1조 위에 시편 127편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할 때 대통령은 손을 성경 위에 얻고 선서를 합니다. 달러화에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는 말이 인쇄되었습니다. 국회와 법원과 학교에서도 성경은 존중되었고 기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2. 의인의 후손들은 번영의 축복을 받습니다. 의인의 후손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한다고 했습니다(시 92:12). 종려나무와 백향목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들은 왕성한 성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꿋꿋이 열매를 맺는 풍성한 생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지상에서 받은 만가지 축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본문은 계속해서 의인의 후손이 받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의인을 치려고 칼을 빼고 활을 당기나 결국 망합니다(14절). 악인은 많은 소유를 가지고도 감사하지 못하나, 의인의 적은 소유는 악인의 많은 소유보다 더 풍성하다고 했습니다(16절).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아주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17절). 악인은 남의 물건을 꾸고도 갚지 않으나 의인은 항상 은혜를 베푼다고 했습니다(21절). 그리고 악인이 넘어질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지만 의인이 넘어질 때는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들어 주시므로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24절). 의인의 후손들은 버림당하거나 걸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25절). 그래서 의인의 후손은 시냇가의 나무처럼 하는 일마다 형통 하다고 한 것입니다(시 1:6). 어느 날 어업에 종사하고 있던 어선이 큰 풍랑을 만나 파선하였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화물선에 의해 대다수의 어부들은 구조되었으나 마지막 한 사람의 구조의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마을에 와서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사람을 모집하는데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청년이 자기가 가서 그 사람을 구조하겠다고 나섰으나 그 청년의 어머니가 울면서 반대했습니다. “너희 아버지도 풍랑 때문에 죽었고 너희 형도 바다에서 죽었는데, 어쩌자고 너마저 이 풍랑 속에 뛰어든다는 말이냐?” 그래도 그 청년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죽어 가는 어부에게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어부가 바로 죽은 줄만 알았던 자기 형님이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인의 편에서 일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의 일을 복주시고, 그 후손도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문화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이 축복을 청교도들의 후손에 돌리는 것은 무리일 지 모르나, 청교도들의 후손은 단시일 내에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고, 세계에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의인의 후손은 번영의 축복을 받습니다.
3. 의인의 후손은 종일 은혜를 베푸는 시혜(施惠)의 축복을 받습니다. 본문에 보면, 악인은 꾸고 갚지 않으나 의인의 후손은 종일 남에게 주시만 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했습니다(21절). 사도 바울도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라고 했습니다(행 20:35). 우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7:12). 받는 복과 주는 복이 있습니다.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받는 은혜와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받는 교회와 주는 교회가 있습니다. 받는 문화와 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복음찬송의 가사대로, 주님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입니다.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받을 복만 세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베푸는 종교입니다. 주고 주고 다함없이 줄뿐입니다. 의인은 종일 베풀고 꾸어 줍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받고 은혜를 입을 때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 때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은 말하기를,“남에게 주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천국의 경험을 하지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번영의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언제나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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