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기독교와 어린이
본문
5월은 신록의 달이며 또한 가정의 달입니다. 5월은 매우 의미가 있는 달입니다. 5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5월 다섯째 주일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실로 5월은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달입니다. 이 시간에는 기독교와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본래 미국에서 시작된 어린이 주일은 6월 둘째 주일이며 그 명칭도 어린이 주일이 아니라 꽃 주일이었습니다. 1856년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주 체루 시에 있는 제일 유니버샬 교회 C. H. 레오날드 목사가 어린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목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 여호와 하나님의 교훈과 뜻대로 양육할 것을 결심시키는데 그 유래가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 전국각지에 들려 다른 교회에서 이 일을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리챠드 S. 스토아 목사는 아름다운 리본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한 강단에서 그 해에 일곱 살 되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생년월일과 목사의 이름이 적힌 성경책을 선물로 주면서 일일이 머리에 안수하였습니다. 1868년에는 감리교회에서,그리고 1883년에는 장로교회에서 6월 둘째 주일을 꽃 주일로 정하여, 그 전통이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파 방정환 선생의 제창으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5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히브리 민족의 아동관, 이방종교의 아동관, 로마시대의 아동관, 그리고 기독교 혹은 예수님의 아동관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히브리 민족의 아동관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양육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모의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인은 양육에 체벌을 사용했습니다. “초달을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 13:24). 자식에게 소망이 있으면 징계하라고 했습니다(잠 19:18). 체벌을 가할지라도 그 아이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잠 23:13,14). 성경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양육의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히 12:7-9). 잠언서에 의하면 자녀는 부모에게 큰 기쁨도 됩니다. 지혜로운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잠 23:15).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워하고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라”(잠 23:24). 반대로 자녀는 부모에게 슬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련한 자녀를 낳은 부모는 근심을 합니다(잠 17:21). 미련한 자녀의 아버지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 17:2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히브리 민족의 교육관은 잠언 17:6에 잘 암시되어 있습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 이 말은 좋은 자손과 좋은 조상은 모두 인생의 면류관이요 영화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조상이 좋은 조상이며 어떤 자손이 좋은 자손입니까? 자손을 잘 가르친 조상이 좋은 조상이며, 좋은 조상의 교훈을 잘 받는 자손이 좋은 자손입니다. 가정의 교육적 수준이나 국가의 도덕수준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정에서 자녀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아이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에서 그 가정과 국가의 도덕적 교육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도덕 수준과 교육 수준, 인격과 교양도 알 수 있습니다.
2. 이방종교의 아동관 모세 출생 당시에 애굽에서는 남아는 기르고 여아는 버리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겨 길렀습니다. 그러나 결국 히브리인이 남아이기 때문에 나일강에 버려졌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몰록 우상에게 그들의 자녀를 바치는 우상 숭배적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불태워 우상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몰록은 쇠로 만든 우상인데, 그 우상을 뜨겁게 불에 달군 다음에 자식을 태워 바쳤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재앙을 면하려고 간지스 강에 아이를 던져 악어 밥이 되게 했습니다. 헬라 시대에 스파르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검사관이 와서 아이를 보고 만일 병약하면 그 신생아를 버리게 했습니다. 그 아이가 건강하고 장차 운동선수나 좋은 군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면 키우게 했습니다. 만일 뉴톤 같은 인물이 그런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뉴톤은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만일 그를 내다 버렸다면 인류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뉴톤은 수학,천문학을 연구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3. 로마시대의 아동관 기독교 이전의 이방문화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 내지는 잔인했습니다. 로마시대의 아동은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로마시대의 부권은 그 가족과 자녀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권은 자녀를 노예로 팔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장에서는 자녀를 죄인들처럼 혹사하기도 했고, 그 자녀가 아무리 출세를 하고 고관이 된다고 해도 그 아비에게 종속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아버지는 자식을 마음대로 내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낳아서 그 아비의 발 앞에 갖다 놓을 때, 아비가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으면 양육하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집에서 키웁니다. 그러나 아비가 자식을 외면하여 나가면 그 아이를 모른다는 뜻으로, 결국 그 아이를 내다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아이들은 비참하게도 이러한 유기(遺棄)를 무릅쓰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에 아이들을 내다 버리는 유기장에는 그 아이들을 주어다가 기르는 장사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마치 가축을 팔듯이 그 아이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버려진 아이들 중에서도 건강한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나,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물에 던져졌습니다. 그 당시의 도덕론자요 수사학자로서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무서운 황소는 도살하고 미친 개는 교살하고 병든 짐승은 죽여 버리고 병약한 자식은 물에 던지라. ” 이와 같은 사회적 여건과 도덕적인 환경 속에서 바울이 에베소서 6:4에서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굉장한 도전적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로마의 부권을 흔들리게 하고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자녀양육과 아동관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4. 기독교(예수님)의 아동관 예수님께서는,“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으로는 절대로 어린아이들을 사람의 숫자 속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수를 셀 때도 어린아이는 세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나 다 어른 중심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린이들을 용납하셨습니다.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아이들이 자기 집 앞에서 노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일 수가 없다. ”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이는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분주하셔도 주님에게 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차가지로 그에게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을 거절하지 않고 용납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아동관입니다.
2)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복 빌어 주셨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입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을 천시하는 관습이 있어서,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방정환 선생이 그 날을 어린이날로 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품에 안고 안수하고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에 대한 주님의 태도요 기독교의 아동관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주님이 품에 안고 축복한 그 아이가 훗날 저 유명한 안디옥교회의 감독이 된 이그나시우스라고 합니다. 요즈음 보면, 미국에서는 방탄차를 타고 다니는 교회 지도급 인사도 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런 지도자를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아졌습니다. 한번 면회하려면 제1비서,제2비서를 통해서 만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전화 한 통화하기도 힘듭니다.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존 애티킨슨 목사는 말하기를,“어린이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어른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아동관은 ‘어린아이는 천국시민의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비록 육체적으로 미숙하고 경험도 부족하고 세상사는 지혜도 모자라지만 , 어린아이는 순진합니다. 진실합니다. 의존적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심으로 부모만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워즈워드는 “하루에 한 번이라도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어린아이를 예찬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품에 안고 축복하고, 어린아이를 천국시민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아동관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신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잠언 22:6의 말씀과 같이 “마땅히 행할 것”을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쳐 훗날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인재가 되도록 자녀를 양육합시다. 옛글에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고, 100년의 계획은 사람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재(人材) 양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교육에 의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을 주님이 쓰실 수 있는 인격으로 잘 가르칩시다.
1. 히브리 민족의 아동관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양육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모의 중대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인은 양육에 체벌을 사용했습니다. “초달을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 13:24). 자식에게 소망이 있으면 징계하라고 했습니다(잠 19:18). 체벌을 가할지라도 그 아이가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잠 23:13,14). 성경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양육의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히 12:7-9). 잠언서에 의하면 자녀는 부모에게 큰 기쁨도 됩니다. 지혜로운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잠 23:15).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워하고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라”(잠 23:24). 반대로 자녀는 부모에게 슬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련한 자녀를 낳은 부모는 근심을 합니다(잠 17:21). 미련한 자녀의 아버지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 17:2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히브리 민족의 교육관은 잠언 17:6에 잘 암시되어 있습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 이 말은 좋은 자손과 좋은 조상은 모두 인생의 면류관이요 영화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조상이 좋은 조상이며 어떤 자손이 좋은 자손입니까? 자손을 잘 가르친 조상이 좋은 조상이며, 좋은 조상의 교훈을 잘 받는 자손이 좋은 자손입니다. 가정의 교육적 수준이나 국가의 도덕수준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정에서 자녀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아이들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에서 그 가정과 국가의 도덕적 교육적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도덕 수준과 교육 수준, 인격과 교양도 알 수 있습니다.
2. 이방종교의 아동관 모세 출생 당시에 애굽에서는 남아는 기르고 여아는 버리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겨 길렀습니다. 그러나 결국 히브리인이 남아이기 때문에 나일강에 버려졌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몰록 우상에게 그들의 자녀를 바치는 우상 숭배적 악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불태워 우상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몰록은 쇠로 만든 우상인데, 그 우상을 뜨겁게 불에 달군 다음에 자식을 태워 바쳤습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재앙을 면하려고 간지스 강에 아이를 던져 악어 밥이 되게 했습니다. 헬라 시대에 스파르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검사관이 와서 아이를 보고 만일 병약하면 그 신생아를 버리게 했습니다. 그 아이가 건강하고 장차 운동선수나 좋은 군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면 키우게 했습니다. 만일 뉴톤 같은 인물이 그런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뉴톤은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만일 그를 내다 버렸다면 인류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뉴톤은 수학,천문학을 연구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3. 로마시대의 아동관 기독교 이전의 이방문화는 자녀에 대해 무관심 내지는 잔인했습니다. 로마시대의 아동은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로마시대의 부권은 그 가족과 자녀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권은 자녀를 노예로 팔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장에서는 자녀를 죄인들처럼 혹사하기도 했고, 그 자녀가 아무리 출세를 하고 고관이 된다고 해도 그 아비에게 종속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아버지는 자식을 마음대로 내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식을 낳아서 그 아비의 발 앞에 갖다 놓을 때, 아비가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으면 양육하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집에서 키웁니다. 그러나 아비가 자식을 외면하여 나가면 그 아이를 모른다는 뜻으로, 결국 그 아이를 내다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아이들은 비참하게도 이러한 유기(遺棄)를 무릅쓰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에 아이들을 내다 버리는 유기장에는 그 아이들을 주어다가 기르는 장사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마치 가축을 팔듯이 그 아이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버려진 아이들 중에서도 건강한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나,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물에 던져졌습니다. 그 당시의 도덕론자요 수사학자로서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무서운 황소는 도살하고 미친 개는 교살하고 병든 짐승은 죽여 버리고 병약한 자식은 물에 던지라. ” 이와 같은 사회적 여건과 도덕적인 환경 속에서 바울이 에베소서 6:4에서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굉장한 도전적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가르침은 로마의 부권을 흔들리게 하고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자녀양육과 아동관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4. 기독교(예수님)의 아동관 예수님께서는,“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으로는 절대로 어린아이들을 사람의 숫자 속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수를 셀 때도 어린아이는 세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나 다 어른 중심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린이들을 용납하셨습니다.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아이들이 자기 집 앞에서 노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일 수가 없다. ”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이는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분주하셔도 주님에게 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차가지로 그에게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을 거절하지 않고 용납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아동관입니다.
2)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복 빌어 주셨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음력 5월 5일은 단오입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을 천시하는 관습이 있어서,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방정환 선생이 그 날을 어린이날로 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품에 안고 안수하고 복을 빌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에 대한 주님의 태도요 기독교의 아동관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주님이 품에 안고 축복한 그 아이가 훗날 저 유명한 안디옥교회의 감독이 된 이그나시우스라고 합니다. 요즈음 보면, 미국에서는 방탄차를 타고 다니는 교회 지도급 인사도 있습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런 지도자를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아졌습니다. 한번 면회하려면 제1비서,제2비서를 통해서 만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전화 한 통화하기도 힘듭니다. 미국의 감리교 목사인 존 애티킨슨 목사는 말하기를,“어린이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어른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아동관은 ‘어린아이는 천국시민의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비록 육체적으로 미숙하고 경험도 부족하고 세상사는 지혜도 모자라지만 , 어린아이는 순진합니다. 진실합니다. 의존적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심으로 부모만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워즈워드는 “하루에 한 번이라도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어린아이를 예찬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품에 안고 축복하고, 어린아이를 천국시민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아동관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신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잠언 22:6의 말씀과 같이 “마땅히 행할 것”을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쳐 훗날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인재가 되도록 자녀를 양육합시다. 옛글에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고, 100년의 계획은 사람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재(人材) 양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교육에 의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을 주님이 쓰실 수 있는 인격으로 잘 가르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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