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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하나님의 가족들

본문

우리들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과 협력하기 위해 예수님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행하는 여러 행위들을 좋게 여기고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종교 행위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돕는 자들이며 예수님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드린다는 명분으로 많은 봉사와 할동들을 장려하고 성도들 사이에서도 열심과 헌신을 서로 고취시킵니다. 교인들은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과 협력해야 하며 예수님을 도와서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구원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들의 이 같은 선의의 활동들이 때론 크게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줍니다.
1. 예수님의 휴가(를 책임지려함) 어느 날 예수님의 고향 땅인 나사렛에 이상한 소문이 들려 왔습니다. 오랫 동안 목수로서 일하던 예수님이 갈리리 지역을 다니면서 병자들을 낫게 해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지 예수님은 식사 할 겨를도 없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21절)는 소식에 동조하여 강제로 잡아서라도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와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듣자하니 예수님이 집을 나가신 후 고생이 말이 아니랍니다. 메시야로 오신 분이라면 대접을 받으시면서 사역을 하셔야 당연할 텐데 식사를 못하실 정도라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 분 주위에 열두 제자들도 있다던데 도대체 자기 스승에게 식사도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찌 예수님을 맡겨둘 수 있겠습니까? 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루 종일 걸어다니시고 수천 명의 병자들 때문에 밤을 세우기가 일쑤라니 이러다간 쓰러지시면 누가 책임을 진단 말입니까? 예수님도 그렇지. 그렇게 힘들고 피곤하게 계속 강행하신다니 그것이 정상인의 활동이겠습니까? 아마 너무 지치셔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분명하니 우리가 어서 가서 예수님을 그렇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무리들 가운데서 구해내야 합니다. 우리 친척들이 나서서 꼭 예수님을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한 예수님의 친척들은 모친 마리아를 앞장 세우고 예수님을 도우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다수이므로 이쪽에서도 한두 사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떼지어 합심하고 가서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모셔 와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친족”(21절)들이 모두 간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마리아를 비롯하여 온 집안이 나서면 예수님도 감복하여 발길을 옮기실 것으로 판단한 듯합니다. 이들의 동기는 매우 인간적입니다. 그들은 피곤하신 예수님께 깊은 동정을 느꼈고, 고생하시는 주님께 휴식을 제공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약 48Km 의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르러 나사렛에서 갈리리까지 여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선의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망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과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위지고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야 하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의 복지만 염려하였을 뿐이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사역이 지닌 큰 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그처럼 끔찍히 아껴서 나사렛으로 강제 이송을 시켜놓고 그곳에서 억지 휴식을 취하게 하고 예수님의 입과 손과 발을 묶어 놓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것을 누가 가장 기뻐하였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의 친척들이 기뻐했겠지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마귀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돕는다는 갸륵한 생각에서 한 일들이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아무리 인간적인 동기가 가상하고 아무리 주님 편에서 행한다고 확신하는 일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처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숙지해야 합니다.
2. 우리가 돌보는 여호와 하나님(인줄 착각함) 사무엘상 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지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다시 블레셋과 싸웠습니다. 언약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전쟁터를 나가니까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확신하였고 그것이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패전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건을 두고 “주의 능력을 나타내는 궤를 포로와 함께 원수의 손에 내 주셨다”(시78:61 표준새변역) (시78:61)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 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들은 언약궤마져도 적군에게 빼았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로부터 지니고 있는 나쁜 습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결심을 하고 열심을 냅니다. 물론 명목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움직이려 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합니다. 우리들의 머릿 속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꽉 차있는 듯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친척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힘드시기 때문에 도와 드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열심을 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너무도 애처롭고 가엾은 분이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우리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해 주려는 마음이 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우리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내려 달라고 소원하며서 실제로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듯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한 대표적인 실례가 성전 건축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일종의 천막 시설과 같은 성막에 안치된 것을 매우 안쓰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다 영구적이고 화려한 성전 건축의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내비쳤습니다. (대상17:1)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악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다윗이 생각할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너무 초라한 곳에 계셨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백향목 궁궐을 지어 놓고 살아 보니 더욱 여호와 하나님의 성소가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한 가지 장한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이 성전 건축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초라한 모습인 여호와 하나님의 거처를 웅장하고 품위 있는 대성전으로 바꾸어 놓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선의의 의도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대상17:5) 내가 이스라엘을 올라오게 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 (대상17:6) 무릇 이스라엘 무리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고 (대상17:7) 연하여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대상17:8)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은 이름ㅇ"? 네게 만들어 주리라 정리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출애굽 이후로 계속 장막에 계셨지만 자신을 가둘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누구에게도 성전 건축을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왕상8:27) (왕상8:27) 여호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또한 다윗을 선택하고 인도하시며 그의 명성을 날리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염려가 없이도 얼마든지 처신할 수 있는 분입니다. 긍휼과 자비와 동정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의 이름을 높여 주신느 것이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계실 곳을 택하고 그분을 우리가 지은 처소로 인도하며 그분의 이름을 높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시23:6).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양들을 푸른 잔디 위에 앉히는 것입니다(막6:34)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같은 양떼들의 사고에 젖기가 일쑤입니다. 다윗도 그랫고 예수님의 친척들도 그랬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보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셨으니 우리에게로 오십시오. 우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내 짐을 날마다 지시기에 그분을 찬송할 일이며 모든 일에 여호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조금도 흔드리시지 않으시며 사력을 다하셨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귀하고 귀한 구주가 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기에 우리들에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 전혀 다르다고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이 너무도 불쌍해서 자꾸만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 예수님은 너무도 초라할 때가 많습니다. 장막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은 딱하기만 합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가엾기만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래서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일어납니다. 사실이지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행을 강력히 가로막았으며(막8:31,32) 모든 제자들이 할 수만 있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끌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3. 우리를 돌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인줄 확신해야) 교회 사업이나 선교 사업이나 혹은 어떤 간증들을 들어 보면 소개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련하고 유약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어서 와서 속히 도와 주기를 바라시는 듯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며 이 같은 모습의 하나로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메시지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자주 불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전도 내용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본 장면을 묘사하여 그림으로 표시한 홀만 헌트(Holman Hunt)의 “세상의 빛”이란 성화를 보면 예수님이 문고리가 바깥에 달려 있지 않은 문을 두드리시며 안에서 문을 열어 주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신 만왕의 왕으로서 주권자로서, 냉담해진 자녀들의 교제를 요구하시며 그 긴급성을 힘있게 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이 어두운 바깥에서 추위에 떨며 문을 열어 주기를 애원하는 너무도 불쌍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들의 자비와 긍휼과 친절한 배려를 필요로 하시는 분처럼 간주합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처럼 허약합니까? 예수님이 친척들의 호송 계획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던지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33,34절).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극진히 생각하고 먼 길을 온 자들이엇습니다. 그들은 분명 많은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쉬게 하고 좋은 음식으로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찾아온 혈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봉사와 헌신과 선의를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심지어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얼마나 섭섭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신령한 소명과 사역이 가족들의 그릇된 의도와 도움에 의해 조금이라도 방해를 받지 못하도록 단호히 막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나 주의 일이라는 명목을 내건 우리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무안할 정도로 예수님에 의해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혈족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하늘 가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을 본문에서 “밖에” 있는 자들(아웃사이더)로 지적한 것은 매우 함축적입니다(마12:46;막3:32ㅣ 눅8:20) 예수님의 참 가족들은 예수님 주위에 가까이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건설된다는 것을 이해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주님을 참으로 귀히 여기고 주님이 하시는 일에 십분 동의하며 함께 어떠한 고난이라도 달게 받는 자들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친족들처럼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고 저 멀리 떨어져 살면서 예수님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듯이 여기거나 궁지에 몰린 예수님을 가장 잘 보살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돕기는 하되 자기들 뜻대로 도우려는 어리섞은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아웃사이더로서 바깥에 서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과의 참된 교제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능력과 아이디어와 계획으로 도와 드려야 한다는 생각 만이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스리려고 하는 자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사역을 간섭하려는 자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늘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자선가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자들이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열심이 많은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동정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통제를 받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에는 너무도 똑똑하고 너무도 잘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분을 섬깁니까? 주님이 너무도 힘에 부쳐서 자기 교회를 돌보시지 못하고 너무도 가난해서 선교 사업을 전개시키지 못하며 너무도 할 일이 많으셔서 내가 반드시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그런식으로 보면 하늘 가족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염려하시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일들을 내가 염려하고 두려워하면 하늘 가족이 이닙니다. 마리아와 그의 권속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보고서 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쓰러지실까봐 걱정스러웠고 완전히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힘없이 보인다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찌 구원의 확신과 평안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어려움에서 구출하는 자들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불신과 불순종에서 구원해 내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이러헥 저렇게 해야 교회가 잘되고 선교가 잘 된다고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과 전략을 따르도록 지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불쌍히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야 합니다(막8:2, 마14:14ㅣ 15:32) 우리들이 주님의 피곤하심을 걱정하여 쉬게 해드릴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쉼을 주셔야 합니다. (막6:31). 우리는 주님 곁에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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