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엘리야의 시련
본문
지나치게 신경이 예민하고 항상 의무감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사는 사람은 쉽게 외로워지고 쉽게 피곤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예민한 양심과 죄책감 때문에 긴장하고 사는 사람도 속히 피곤을 느끼고 초조와 불안을 견디지 못하여 곧잘 좌절하고 고독해하며 외로워합니다. 그러므로 완전주의자들 가운데 우울증 환자가 많습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중에도 우울하게 일생을 살았던 분들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럼 사람이요 호세아 선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또한 엘리야도 우울질의 기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대결 이후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곧 우울해져서 유대의 최남단의 브엘세바로 사환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사환을 머물게 하고 자신은 다시 하룻길을 더 걸어 로뎀 나무 아래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1. 먼저 엘리야의 고독과 우울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속담에 승리를 목전에 둔 군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엘리야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세벨의 협박을 받아 의기소침해져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독백을 했던 것입니다(왕상 19:4,10,14). 어쩌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갈멜산 승리는 어디로 가고 이세벨의 협박으로 이렇게 나약해지고 우울해질 수 있습니까? 이때 엘리야는 순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잊었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나만 홀로 남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나만 홀로”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나만 홀로”의 신학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학입니다. 최소한 우리의 신앙은 나만 홀로의 신앙이 아님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고독이란 병입니다. 며칠 전 어느 분은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민 와서 외롭게 살다가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나만 홀로”입니까? 그래도 주위를 돌아보면 의지할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도울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가령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왜 이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성도는 자살하지 말아야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일리노이주 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우리 한국학생 두 사람이 연쇄 자살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 교인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승리 중에 계신 주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믿읍시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줄 이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 기독교에 있어서 “나만 홀로”의 사상은 무신론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왜 우울해졌습니까? 임마누엘의 신앙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 28:20).
2. 고독과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
고독과 우울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먼저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마 14:30)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볼 때는 능히 물 위로 걸어갈 수 있었으나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 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죄악과 우울과 고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한눈 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간 기적은 모세도 체험하지 못한 기적입니다. 모세는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 위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옛날부터 나무에 오른 사람은 올라갈 때는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올라갈 때는 위만 보고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에서 내려올 때는 아래를 보고 내려오기 때문에 두려움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파 많은 세상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이 좋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불안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왕상 19:18) 엘리야는 지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의 믿음의 동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남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자기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대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외로웠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첫째 좋은 교회를 선택해야 하고, 둘째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하고, 셋째 좋은 친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엘리야가 아직도 자기 주위에 7천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외로워하지,않았을 것입니다. 현대를 군중 속의 고독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짝, 기도의 짝, 전도의 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도 친밀합니다(잠 18:24). 3) 주님의 위로가 있을 때 외롭지 않습니다(왕상 19:5) 왜 사람이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지고 외롭게 됩니까? 그리고 우울해지고 비관하게 됩니까? 위로가 없을 때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있을 때 천사가 와서 어루만지고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었습니다.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는 말이 두 번 있습니다(19:5,7). 우리가 이 곳에 이민을 와서 누구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물론 사람의 위로도 필요합니다. 부모와 남편과 아내의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고,믿음의 친구를 찾고 주님의 위로를 갈망합시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후, 천사가 준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야를 걸어 여호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3. 엘리야는 다시 들리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첫째 음성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 7천 명이 있다는 말씀이요, 둘째 음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임금들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즉 엘리야에게 사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장소입니다(출 3:7). 이제 호렙산은 엘리야의 재교육 장소인 셈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이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산상기도,철야기도,심야기도,부흥회 등 이 모든 것이 신앙무장의 교육과정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세벨의 위협은 사라지고 엘리야의 심정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야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외로워도 나홀로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언제나 임마누엘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엘리야의 고독과 우울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속담에 승리를 목전에 둔 군인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엘리야는 그런 사람이었으나 이세벨의 협박을 받아 의기소침해져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독백을 했던 것입니다(왕상 19:4,10,14). 어쩌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갈멜산 승리는 어디로 가고 이세벨의 협박으로 이렇게 나약해지고 우울해질 수 있습니까? 이때 엘리야는 순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잊었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나만 홀로 남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나만 홀로”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나만 홀로”의 신학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학입니다. 최소한 우리의 신앙은 나만 홀로의 신앙이 아님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고독이란 병입니다. 며칠 전 어느 분은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이민 와서 외롭게 살다가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나만 홀로”입니까? 그래도 주위를 돌아보면 의지할 사람이 있습니다. 나를 도울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가령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십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왜 이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성도는 자살하지 말아야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일리노이주 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우리 한국학생 두 사람이 연쇄 자살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 교인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승리 중에 계신 주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믿읍시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날 구해줄 이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 기독교에 있어서 “나만 홀로”의 사상은 무신론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신관은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왜 우울해졌습니까? 임마누엘의 신앙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 28:20).
2. 고독과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
고독과 우울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먼저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마 14:30)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볼 때는 능히 물 위로 걸어갈 수 있었으나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에 물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죄악과 우울과 고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시라도 한눈 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간 기적은 모세도 체험하지 못한 기적입니다. 모세는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 위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옛날부터 나무에 오른 사람은 올라갈 때는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올라갈 때는 위만 보고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에서 내려올 때는 아래를 보고 내려오기 때문에 두려움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파 많은 세상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이 좋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불안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왕상 19:18) 엘리야는 지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의 믿음의 동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만 홀로 남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자기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대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외로웠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려면, 첫째 좋은 교회를 선택해야 하고, 둘째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하고, 셋째 좋은 친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엘리야가 아직도 자기 주위에 7천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외로워하지,않았을 것입니다. 현대를 군중 속의 고독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짝, 기도의 짝, 전도의 짝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도 친밀합니다(잠 18:24). 3) 주님의 위로가 있을 때 외롭지 않습니다(왕상 19:5) 왜 사람이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지고 외롭게 됩니까? 그리고 우울해지고 비관하게 됩니까? 위로가 없을 때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있을 때 천사가 와서 어루만지고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었습니다.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는 말이 두 번 있습니다(19:5,7). 우리가 이 곳에 이민을 와서 누구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물론 사람의 위로도 필요합니다. 부모와 남편과 아내의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고,믿음의 친구를 찾고 주님의 위로를 갈망합시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후, 천사가 준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주야를 걸어 여호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3. 엘리야는 다시 들리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첫째 음성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 7천 명이 있다는 말씀이요, 둘째 음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임금들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즉 엘리야에게 사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장소입니다(출 3:7). 이제 호렙산은 엘리야의 재교육 장소인 셈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이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산상기도,철야기도,심야기도,부흥회 등 이 모든 것이 신앙무장의 교육과정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세벨의 위협은 사라지고 엘리야의 심정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야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외로워도 나홀로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언제나 임마누엘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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