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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형제우애를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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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또 그 약속을 받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깊 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 시는 것이지 우리가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사귈 수 있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나누 어 받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본성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런데 이는 힘쓰고 애쓰면 가질 수가 있 는 것입니다. 즉 자기 노력으로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래서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 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 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성결 한 생활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믿음 다음에는 덕이 필요합니다. 믿 음은 덕스럽게 나타나야 되고 덕은 완악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감 화력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지식이 더해져야 합니다. 지식이 결여된 덕은 자칫하면 악인들의 이용물이 될 수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런데 지식에는 또한 절제가 있어야만 지식으로 교만해 지지않은, 진 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절제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 내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견고한 힘입니다. 그리고 인 내에는 경건이 필요합니다. 경건으로써 성도들은 성결한 생활의 본 모습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건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형제의 우애와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경건은 외식이요 위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에까지 이르는 이 8가지 미덕은 자신의 영적 성 장을 위한 전진의 단계들입니다. 이 단계들을 밟아 올라가는 일은 우리가 힘 써 해야 될 일이며 이러한 단계에 오르게 될 때에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닮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각자 가 자기 자신을 살펴 볼 때에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있는 크리스챤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신앙의 8단계에서 사랑에까 지 이른다는 것은 아직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 의 단계입니다. 모든 것을 완성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 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는데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 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영적성장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이시간에는 사도베드로가 말한 8단계의 항목중 사랑보다 한단계 아래라 고 할 수 있는 '형제우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에까지 이른 성도이라면 아마도 90%는 이룬 크리스챤이 아닐 가 생각됩니다. 물론 개인의 신앙을 시험점수를 매기듯 할 수는 없겠지만 우 리는 어린아이의 유치한 단계에서 빠리 벗어나 적어도 '형제를 사랑하는' 크리스천 정도는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형제란' 누구를 가르키는 것입니까? 형제란 깉은 부모에게서 태 어난 골육지친을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 습니다. 그것은 구태어 신앙인이 아니라도, 일반사회의 윤리규범으로도 당연 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끼리 마저도 불화. 불목, 시기. 질투 한다면 그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아저씨와 조카사이였습니다. 그들의 종들이 가축의 목초 지 때문에 싸울 때에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 아니냐?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 13:8)고 하면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모든 것을 다 양보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롯보 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에 휠씬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에 성경에 서 말하고 있는 '형제'라는 말의 개념은 이보다 더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습 니다. 친형제 뿐 아니라 이복형제도, 그리고 혈연관계에 있는 친척들 모두 를, 어떤 때는 한 부족들 전체를, 그리고 부족이 아니라도 계약상 동맹관계 에 있는 동맹자들을 모두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맹자들이 아니라도 자기와 관계없는 타인을 형제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중세기에 성 자들 가운데는 사람 뿐 만 아니라 새나 동물들, 자연의 모든 생물들을 형제 처럼 여긴 이도 있었습니다. 출 23:4에는 '너희는 길 잃은 원수의 소나 나귀를 만나면 그것을 임자에 게 반드시 데려다 주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원수라고 하면 이스라 엘 사람과는 적대관계에 있는 이교도들이나 우상숭배자들을 말하는데, 비록 우상숭배 그 자체는 배격해야 될 일이지만 그들도 한 인간이라고 할 때에 그들도 사랑해야 한다는 요청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화 평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화평(샬롬)을 좋아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 는 가난한 외국인들을 우리 동족처럼 도와주어야 하고, 병든 외국인을 동족 처럼 방문해야 하며, 죽은 외국인을 이스라엘 사람처럼 명예롭게 장사 지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과의 화평의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가르 쳤습니다.
형제사랑은 화평의 길입니다. 오늘날도 진정한 평화는 형제우애로써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우애는 '네가 싫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말라'는, 그러한 원리에서 실천되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사람은 언제라도 뒤쫓 음을 당할지언정 남을 뒤쫓아서는 않된다. 압박을 당하되 남을 압박하지 말 라. 모욕을 당해도 앙갚음을 하지말라. 또 저주를 당하는 자가 될지언정 저 주하지말라. 네 친구의 명예를 네 것처럼 소중히 여겨라. 네 친구의 재산을 네 것처럼 소중히 여겨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형제야 당연히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사랑이란 항목이 여기에 들어있다는 것은 그 일이 쉬운 것 같아도 어렵고,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이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4) 라고 하였습니다. 형제우애는 이토록 중요한 의무이며,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90% 정도의 크리스챤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의 '형제우애'와 '사랑'은 그 뜻이 매우 다릅니다. '형 제우애', 혹은 '형제사랑'은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범주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그가 내 형제임으로 사랑하고 나와 친구요 동맹자임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라는 이유로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원수나 적을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원수와 적까지도 모두 용서하고 포용하여 사랑하 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못합니다. 그래서 '사 랑'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이지만, '형제우애'는 '사람도 할 수 있 는 사랑'이란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남북교류나 통일도 남과 북이 피차 형제요 한 동족이라고 인식한 다면 형제우애의 정신으로 통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형제우애도 하지 못하 고 사랑은 더 더욱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형제우애'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화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할 때에 보지 못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사랑 은 '관점'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가족은 사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족 중심적이며, 그것 때문에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여 기서 말하는 '형제우애'란, 형제만을 사랑하라는 것도, 자기 가족만을 위하 는 가족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위한 사랑과 희생적 정신을 가지라는 말이며, 형제란 곧 타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는 너희들이 형제끼리만, 그리고 친한 사람끼리만, 또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교제하고 사랑한다면..... , 이방인들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여기 8가지 덕목중에서 형제우애와 사랑 이외에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 건 등 대개 자기자신에게 관한 관한 덕목들입니다. 그러나 형제우애나 사랑 은 전혀 타인을 위한 항목으로, 그것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르키 고 있습니다. 인간이 나 아닌 타인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 수준에까지 이른 사람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에 참 예한 자'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생명으 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에 대하여 연연하거나 집착하거나,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보다 더 가치있고 아름다운 일들을 향해서 힘차게 전진해 나아가는 사람입 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형제우애를 어떻게 실천하면 좋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나와 경쟁상태에 있는 사람을 형제로 생각하고 그를 사랑하 여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너무나도 치열한 싸움과 경쟁속에 있습니다. 승리를 위한 경쟁, 성공하기 위한 경쟁, 행복하기 위한 경쟁,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 은 '신의 성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나와 경쟁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양보 할 수 있는 '빈 마음'이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사실은 이 것이 승리의 길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던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 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도 심히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 그후 그 들은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두분의 신앙과 사명감과 우정이 깨어진 것은 아닙니다. 요나단은 왕자의 자리까지 내어 던지고 친구 다윗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라이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우애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한 것입니다. 형제우애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이요 용기이며 또한 은사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쟁자들을 오히려 축복하고 격려하 며 잘할 수 있도록 돕는 '형제우애'를 지닌 사람들이 됩시다. 그렇게 하여도 우리가 손해를 보거나, 뒤지거나, 패하거나, 위협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빈그릇에 가득히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형제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 들이야말로 우리의 우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이해하 고 동정하고 협조하며, 그들과 더불어 서로 좋은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할 때에 우월감으로써가 아니라 형제우애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 5 000불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는 절대 빈곤층이 국민의 22%라고 하며 소득이 올라 갈수록 이 절대빈곤층 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절대빈곤층은 근로능력을 상실 하여 실제로 먹고 사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현재 우리나 라에 331만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국가적 차원의 복지정책이 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형제우애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님은 '너희는 기회있는대로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 게 할찌니라'(갈 6:10)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형제우애를 베풀라는 권면입 니다. 형제우애를 실천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으며 온 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닮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특별히 생각해야 될 또 하나의 '형제우애'는 자연과 만물에 대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60년대 이후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의 파괴와 공해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극에 달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므 로 '자연보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을 형제같이 여기고 사랑하지 않 으면 않될 단계에 이르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하여 지금 심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에게 사과하고 용서 를 비는 회개의 심정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이런 것 을 외면하고 계속 그 욕심만 채우려고하니 자연이 오염 되고 이미 그 위험 수위를 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개인도 국가도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우리는 자연을 형제처럼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더불어 조화로운 관 계를 맺어야할 자연을, 그 한없는 탐욕때문에 너무 학대했고 너무 혹사했으 며 너무 나쁘게 이용한 것입니다. 자연이 죽으면 결국 우리들도 죽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말은 못하지만, '하나 님의 성품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 주기를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 는 것'(롬 8:29)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에 대하여서도 '형제우애'로 대하여 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과 목 적을 우리들이 지닐 수 있어야만 모든 생명들이 살 수 있을 것이고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점차 닮아가는 자들이 되라고 하면 서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는 자가되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그 일을 90%는 이 룬 것입니다. 마지막 한단계 '사랑'을 이루게 되면 그는 완전한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끊임없이 성숙하는 과정과 단계를 거치며 이루어 나아가 야 될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우선 형제우애부터 진실히 실천할 수 있는 여러 분이 되시기를 기원해 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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