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국가에 대한 신자의 자세
본문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벌써 부모와 이웃이 있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사회는 나의 가치와 생존의 의의를 말해줍니다. 인간은 나 홀로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인류라는 전체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가짐으로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개체가 전체 세계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교량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국민 된 사람은 누구나 민족과 국가에 대한 높은 권리와 무거운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도 하나의 그 나라 국민으로서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직접 관여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도 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국가관이 없다면 그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만 취급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문제를 취급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대중을 먹이시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채찍을 들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날 바리새인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납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바치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국가적인 권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기본자세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공의와 평화를 사랑합니다. 이세상의 공의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확립된 정부를 존중하고 성실하게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했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국가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 권세를 부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며 심판받음이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전 세계에 미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 제도를 존중하며 질서유지의 건전한 정신을 고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맹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를 인정함은 국민과 민족과 그 형성 단체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긋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도 신자의 의무입니다. 옛날엔 크롬웰이 영국의 혁명을 주도했고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며 아브라함 링컨은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억압과 불의에 대한 크리스찬의 의의 항거는 당연합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기독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만일 교인이 국가관이 없다면 그는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6 25때의 일입니다. 인민군이 조수와 강이 밀려와 남한 각지를 유린하는 중에 경남 진주 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진주시민은 UH군의 폭격을 피하여 남강 옆의 대 숲으로 대피하고 있었는데, 투하하는 폭탄으로 시중이 불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고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1발의 폭탄이 촉석루와 논개 사당에 명중되어 순식간에 화염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맞은 편 대 숲에 대피 중이던 시민들은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왜 이들은 울었겠습니까? 개인의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진주의 자랑이요, 역사의 문화의 전당이 불탄다는 것은 민족의 얼이 불타는 것이었기에 이들은 울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에게도 동일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통절히 경험한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나라를 사랑합니다. 조국이 없는 곳에 국민으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사에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나라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3 1독립운동의 지도자들에게 볼 수 있고 해방 전에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얼마나 이 민족을 사랑하였던가를 우리는 상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국가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정치에 대한 비판력이 되고 그 사회의 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회의 인심을 선도하는 점에서는 국가 정치의 협력자일 수 있으나 정치적 부정을 지적하고 정치적 악덕을 비난하는 점에서는 종교는 언제나 정치에 대한 심판의 자유를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조국에 대한 신자의 위치는 그 종교의 예언자적인 면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으로서 국가에 대하여 취할 태도를 몇 가지로 생각코자 합니다.
1.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 10:5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둘씩 짝을 지으며 전도여행을 보내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먼저 제나라 사람을 구원함이 급선무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롬 9:1-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간절한가를 여실히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애국을 건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그 기본부터 감동시키는 것이므로 복음을 받는 자에게는 참되고 깊은 애국 애족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신앙인은 진정한 애국인이 됩니다.
2.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범죄 했을 때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슬프오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옵소서. 그렇지 않사 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 다니엘은 이방 땅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중에 하루에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조국광복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자기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민족의 운명을 걸고 3일 동안을 금식기도하고 애굽 왕에게 "죽으면 죽으리라. " 각오를 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기도의 효능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조국통일과 자유 민주주의와 선진국 대열의 잘 사는 나라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삼상 12:23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고 결심하고 기도의 제목을 정하여서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고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제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조국 근대화를 위해 서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근대화는 다만 복음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정신의 혁명이 없이 이루어지는 근대화는 마치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이 위험한 것이며 경제 건설은 반드시 민족의 정신 구조의 기반 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이는, 나 개인치나 국가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한 나라치고 이 땅에 선 나라가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4. 교회는 국가의 유용한 인물을 많이 길러내야 합니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물자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물적 자원, 경제력,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근본적인 것은 인물입니다. 즉 누가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긴 양심을 인간의 세계에 심어주는 거듭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이런 인물을 배출하기 위해 교회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정부에 대해서 무조건 부정적인 태도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정부가 일을 잘하였을 때는 찬사와 격려를 아낌없이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화에 힘쓰며 유용하고 양심적인 일꾼을 많이 길러내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축복 받는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국민 된 사람은 누구나 민족과 국가에 대한 높은 권리와 무거운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도 하나의 그 나라 국민으로서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직접 관여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도 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국가관이 없다면 그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정신적 문제만 취급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문제를 취급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대중을 먹이시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채찍을 들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날 바리새인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납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바치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국가적인 권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기본자세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공의와 평화를 사랑합니다. 이세상의 공의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확립된 정부를 존중하고 성실하게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했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국가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 권세를 부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며 심판받음이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전 세계에 미친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 제도를 존중하며 질서유지의 건전한 정신을 고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맹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를 인정함은 국민과 민족과 그 형성 단체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긋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도 신자의 의무입니다. 옛날엔 크롬웰이 영국의 혁명을 주도했고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며 아브라함 링컨은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억압과 불의에 대한 크리스찬의 의의 항거는 당연합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기독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만일 교인이 국가관이 없다면 그는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6 25때의 일입니다. 인민군이 조수와 강이 밀려와 남한 각지를 유린하는 중에 경남 진주 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진주시민은 UH군의 폭격을 피하여 남강 옆의 대 숲으로 대피하고 있었는데, 투하하는 폭탄으로 시중이 불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고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1발의 폭탄이 촉석루와 논개 사당에 명중되어 순식간에 화염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맞은 편 대 숲에 대피 중이던 시민들은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왜 이들은 울었겠습니까? 개인의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진주의 자랑이요, 역사의 문화의 전당이 불탄다는 것은 민족의 얼이 불타는 것이었기에 이들은 울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에게도 동일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통절히 경험한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나라를 사랑합니다. 조국이 없는 곳에 국민으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사에도 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나라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3 1독립운동의 지도자들에게 볼 수 있고 해방 전에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얼마나 이 민족을 사랑하였던가를 우리는 상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 국가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는 정치에 대한 비판력이 되고 그 사회의 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회의 인심을 선도하는 점에서는 국가 정치의 협력자일 수 있으나 정치적 부정을 지적하고 정치적 악덕을 비난하는 점에서는 종교는 언제나 정치에 대한 심판의 자유를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조국에 대한 신자의 위치는 그 종교의 예언자적인 면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으로서 국가에 대하여 취할 태도를 몇 가지로 생각코자 합니다.
1.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 10:5에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둘씩 짝을 지으며 전도여행을 보내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먼저 제나라 사람을 구원함이 급선무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롬 9:1-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간절한가를 여실히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애국을 건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그 기본부터 감동시키는 것이므로 복음을 받는 자에게는 참되고 깊은 애국 애족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신앙인은 진정한 애국인이 됩니다.
2. 나라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범죄 했을 때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슬프오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옵소서. 그렇지 않사 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 다니엘은 이방 땅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중에 하루에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조국광복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자기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민족의 운명을 걸고 3일 동안을 금식기도하고 애굽 왕에게 "죽으면 죽으리라. " 각오를 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기도의 효능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조국통일과 자유 민주주의와 선진국 대열의 잘 사는 나라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삼상 12:23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고 결심하고 기도의 제목을 정하여서 기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고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제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조국의 복음화를 위해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조국 근대화를 위해 서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근대화는 다만 복음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정신의 혁명이 없이 이루어지는 근대화는 마치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이 위험한 것이며 경제 건설은 반드시 민족의 정신 구조의 기반 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이는, 나 개인치나 국가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한 나라치고 이 땅에 선 나라가 없습니다. 역사의 주관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4. 교회는 국가의 유용한 인물을 많이 길러내야 합니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물자와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물적 자원, 경제력,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근본적인 것은 인물입니다. 즉 누가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긴 양심을 인간의 세계에 심어주는 거듭난 사람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이런 인물을 배출하기 위해 교회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정부에 대해서 무조건 부정적인 태도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정부가 일을 잘하였을 때는 찬사와 격려를 아낌없이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화에 힘쓰며 유용하고 양심적인 일꾼을 많이 길러내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축복 받는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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