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등명사 쌀뜨물
본문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남쪽으로 40리쯤 내려가면 정동진(正東津)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궤방산 기슭에 등명사(登明寺)라는 절이 있었지, 지금은 없어진 이 절에 얽힌 전설 한토막.
때는 이조시대, 어느날 갑자기 왕이 심한 안질(眼疾)에 걸렸구나. 이약 저약 다 서보고 용하다는 의원을 모두 불렀지만 왕의 안질이 낫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지. 하는 수 없어서 일관(日官)을 불러다 점(占)을 쳐보라 이르니, “왕국에서 정동쪽에 큰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절에서 갑자기 너무 낳은 쌀뜨물을 바다로 흘려 내려보내니 동해 용왕이 눈병을 앓게 되었는지라 이를 알리기 위해서 왕이 같은 병을 앓는 것”이라는 점쾌가 나오는구나.
곧장 왕궁에서 정동(正東)에 있는 절을 찾아보니 바로 등명사라는 절이 있는데 어찌나 큰지 중이 수백명도 넘게 살고 있더라는거야. 그들이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어 밥을 짓는 바람에 뜨물이 그대로 흘러 들어 바다를 더럽히고 있었지. 왕이 곧 명을 내려 등명사를 폐사(廢寺) 시켰더니 안질이 저절로 나았다는구나. 그래서 아주 큰 절 하나가 이름만 남고 없어졌대. (지금도 그곳에 등명사라는 절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절은 어느 이름도 없는 중이 나중에 세운 것으로서 옛날의 등명사와는 전혀 다른 절이다. )
용왕이 안질을 앓는다. 예삿일이 아니다. 용왕은 곧 물이다. 그러므로 용왕이 앓는다 함은 물이 병들었다는 말이다. 물은 생명이다. 따라서 물이 병들었다 함은 생명에 탈이 났다는 말이다. 무엇이 물을 병들게 했나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오는 쌀뜨물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생활 폐수쯤 되겠지. 쌀뜨물이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아니 나올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강물을 타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 또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연 이치라. 그러니 막연하게 쌀뜨물이 바다오염의 주범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칼로 사람을 지르고 나서 칼이 사람을 찔렸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등명사라는 절이 너무 컸다는 데 있다. 절이 크니 중들이 많이 모여들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자연이 스스로 정화(淨化)해 낼 수 없을 만큼의 오염물질을 한꺼번에 쏟아버리게 된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도시화 보태기 공업화가 오늘의 용왕(물)을 병들게 한 주범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공해”이 “오염”이니 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농사꾼들이 버리는 생활폐수쯤이야 자연이 얼마든지 삼켰다가 다시 맑은 물로 되돌려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시가 형성되면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폐수가 쏟아져 나오자 자연의 정화능력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업사회로 바뀌면서 자연의 정화능력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쓰레기들, 요컨대 썩지 않는 쓰레기들이 마구 나오게 되자 바야흐로 자연은 비대해진 인간집단의 폐수로 말미암아 병들고 말았다.
그런데 자연이 병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병들게 된다. 결국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공업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문명(文明)이라는 높은 탑을 쌓았지만 바로 그 탑 때문에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일러주기 위하여 왕(王)이 병들었다. 어리석은 왕은 자신이 병들기 전에는 물이 썩어가고 있는지 바다가 오염됐는지 관심조차 없다. 아무리 심각하게 말해도 제 몸에 탈이 생기기 전까지는 꿈쩍도 않는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스스로 오만하여 우쭐거리는 인간의 한심스런 모습입니다.
온갖 편이와 안락을 보장해주는 도시(都市). 그리고 그 풍요로움! 이 땅에 맨 처음 도시를 세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성서는 그의 이름을 밝혀놓았다. 아우인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는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쓴 사람, 비극의 주인공 카인이 바로 그다.
카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인이 아내와 한 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제가 세운 고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불렀다(창세 4,16-17)
자크 엘륄은 카인이 “고을”을 세운 것을, 더 이상 신(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게 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결과로 본다. (The Meaning of City, 제1장).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거처를 마련하고 살기보다는 무리를 이루어 한군데 뭉쳐 살면 그만큼 자연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도 쉬울 것이다. 카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쫓겨났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그래서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거기에 “고을”을 세웠다. 요컨대 신 없이 스스로 살아가겠다는 카인의 의지가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신 없이 스스로 존재코자 하는 인간의지에, 문제의 알속이 있다. 결국 도시는 범죄한 인간의 손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작용하는 괴물이다.
소금기둥의 전설을 낳은 소돔과 고모라는 “너무나 엄청난 죄’를 잣고 있는 “도시”였다(창세 18,20). 의로운 사람 열이 없어서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사악한 도시였다. 우연히 거기에만 의인(義人)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외로운 사람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도시는 그 본질상 의인을 터잡고 살도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소돔의 시민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얼마나 타락하고 난폭하고 무모했는지 창세기 19장에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침내 야훼께서는 소돔이라는 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다(19,14). 그런데 도시의 멸망을 도시만의 멸망이 아니었다.
야훼께서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으시어 거기에 있는 도시들과 사람과 땅에 돋아난 푸성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셨다. (창세 19,24-25). 거기에 있는 사람과 푸성귀까지 모조리 타 버린 것이다. 도시에 대한 심판은 그것을 세운 인간에 대한 심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나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인간 때문에,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고 애먼 푸성귀까지(그 틈에 살던 들쥐라고 무사했으랴!) 타 죽어가는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를 인간의 교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것이 하나의 정설(定說)로 되어 있지만, 그렇게 심리적인 해석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도시와(都市化)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훼방 또는 심판이기도 하다.
“온 세상이 한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창세 11,1) 그렇다. 도시는 사투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창세 11,2-2).
이른바 여기서 문명이 비롯된다. 문명이란 천연(天然)을 인공(人共)이 대신하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는 법니다. 돌 대신에 벽돌을, 흙 대신에 역청을! 이것이 문명의 시초요 본질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땅에서 솟는 샘물 대신에 다목적댐에서 조절되는 물로 농사를 짓는, 바로 그것이 문명의 자랑스런 성과다. 두 다리를 대신하는 자동차,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사이버네틱스 또는 컴퓨터, 움켜진 주먹을 대신하는 미사일과 탱크, 그게 바로 인간의 문병인 것이다. 문명은 곧바로 도시를 낳는다. 물론 그 역(逆)일 수도 있다. 나일의 기름진 땅이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이집트 문명을 낳았다. 도시와 문명은 인공에 의해 태어나는 일란성 쌍생아다.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창세 11,4).
탑이 하늘에 닿도록 높다는 데도 숨은 뜻이 있겠지만, 그 탑이 도시의 일부였다는 점을 못 보고 지나가서는 안된다. 그들이 세운 것은 “탑이 있는 도시”였다. 그렇다. 그들은 소기를 세우고 거기 뭉쳐 살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운명을 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늘이 야훼는 그들을 흩어 버리신다.
“야훼쎄거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으로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대겠다. ”(창세 11, 5-7).
여호와 하나님이 훼방을 놓으신다. 질투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을 이땅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투리를 허용하지 않는 도시의 언어가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차단한다. 이웃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어주는 귀가 없다. 피리를 불러도 춤추는 사람이 없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절(단절)의 땅, 도시. 사방에서 개막이나 개업생사를 오라는 초청장이 날아들고 있지만 그럴수록 도시의 문은 더욱 완강하게 닫혀만 간다.
바벨탑 이야기는 이 나라 한 정치가의 말에 대한 반전(반전)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스스로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까지 죽인다. 등명사는 애초에 법을 밝히는 절로 궤방산 기슭에 섰겠지만, 너무 컷다. 그것이 탈이었다! 그렇게 덩치가 커서 온통 인간들로 득시글거리다가는 법(법) 밝히기는 고사하고 뜨물이나 바다에 쏟아버리게 마련인 것이다. 절간이 그렇게 커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교회당 도한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종교의 도시화가 화근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안에 일정한 한계를 지나고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코끼리보다 고래보다 저 남산보다 더 커진다면 어찌되겠는가 성장을 적당한 한계에서 멈추는 것이야 말로 삶의 기본 원리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어서 사라져간다.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일부”(1部) 또는 “요소(要素)”인 것이다.
페놀 때문에 온 나라가 야단인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새삼스런 소동이었다. 수돗물에서 악취가 나니까 그제서야 법석을 피웠다. 시대의 예언자들이 수질오염의 심각성을 외쳐대기 시작한 게 언제였던가! 그때는 도무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수돗물에서 냄새가 나니까 비로소 떠들썩했다. 바다가 더럽혀지고 그래서 용왕이 눈병까지 났지만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으니 결국 왕의 눈에 동티가 났다. 그제서야 의원을 부르고 점쟁이를 부르고 야단 법석하면서 그 “까탈”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알고 보니 절간 하나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너무 커서 중들이 지나치게 많이 모여 있고 그래서 쌀뜨물이 마쳐 자연정화를 할 새도 없이 한꺼번에 바다로 흘러들어가, 용왕한테 눈병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이 곧장 폐사를 명하니 등명사는 없어지고, 중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바다는 다시 맑아지고, 용왕의 눈병과 함께 임금의 눈병까지 치우되었다니라! 자연 (용왕-물)이 깨끗해지니 비로소 왕9인간)이 깨끗해지는구나.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말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다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 11, 8-9)
바벨탑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만 흩어짐으로써 사람은 다시 새롭게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도시는 문명을 낳고 그 문명을 밑에서 받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기술이다. 기술은 기계에서 나오고 기계를 쓰면 기심(機心)이 발동한다. 그 기심은 자연을 배척한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도(道)와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대가 없이 따서 먹을 수는 없는 법이라. 아담은 생명을 대가로 내놓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래서 “죽음”이 그 몸에 들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을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로 보는 설명이 딴은 그럴 듯하다. )
기계문명은 우리에게 얼마나 달콤한 선물을 제공하고 있는가 편이와 안락함! 이제는 안방에 앉아서도 시방을 볼 수 있다고 시끄럽게 선전한다. 그건 그렇다. 비행기가 있으니 국제회의가 날마다 열리고 전자통신으로 런던 주식시장을 내 집 앞 뜰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편이와 안락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대가로 지불했던가 썩어가는 산천, 독물이 흐르는 강, 헐벗은 숲, 늘어만 가는 기형아, 무엇보다도 기계처럼 메말라 버린 인정(人情). 이제 어쩔 것이가 이 시대의 “등명사”를 어디서 찾아내어 폐사 시킬 것인가글은 하나뿐이고 멀지 않은 데 있다. 비대해지기만 하는 도시화와 그것을 밑받침 해주는 물질지상주의, 기술문명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이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며”(요나 3,5)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자연과 자유를 떠나서는 달리 있을 데가 없는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쓰지다 다까시의 공업사회의 붕괴 중에서 좀 길지만 옮겨본다.
현재의 ‘번영”은 그 출발에 있어서 죄의 대가를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풍요로운 60년대로부터 난숙(爛熟)과 공해의 70년대로 이어지면서 이미 불길한 그림자는 검게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어쩔 구 없이 “썩은 냄새”를 내면서 무너지는 80년대로 이어져갑니다. 결국 현대의 “번영”은 그 출발에 있어서 이미 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원료자원(原料資源) 고갈 등의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국은 입구에만 있지 않습니다. 뒤가 막히는 것도 생명을 앗아갑니다. 병균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도소”에 의해서도 병약해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어느쪽이든 공업화 사회는 반드시 물에 잡기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배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눈에 뜨게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폐기물(쓰레기) 문제는 자연생태계의 순환에 의거하지 않는 공업문명의 필연적 산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공업적 “풍요”를 단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계의 여러 생물들과 공생(共生)하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생활을 건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지혜가 소중합니다. 지혜야말로 인간의 특성이지요, 쓰고 버리는 생활로 인해 잃은 것은 지혜요 인간입니다. 쓰레기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112-113)
요컨대 공업화 사회는 현재 죽음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단언해도 좋습니다. 저는 공업화 사회는 반드시 몰락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현대 문명의 특징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문제는 저의 전문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언급하기는 곤란합니다만, 현대 사회는 기본적으로 돈으로 움직인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돈이 되는 것은 중요시하지만 안 되는 것은 경시한다는 데 현대 사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김영주 옮김, 분도출판사, 117-118쪽).
한데 모여서 도시를 이루어 살다보니 자연히 뜨물이 많이 생겼고 그것이 결국 용왕의 눈을 병들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살던 터(절간)를 무너뜨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함으로써 임금의 안질은 물론 바다 용왕의 병까지 고쳤다는 이 짧은 전설은 현대 문병의 고질에 대하여 그 원인과 함께 치료방법까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쓰지다 선생은 회복의 실마리를 인류가 공적(공적) 사회에서 농적(농적)사회로 머리를 돌리는데서 찾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종적 사회란, 옛날의 농경생활로 돌아간 사회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순환 가능한 공생의 삶을 이루는 사회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순환 가능한 공생의 삶을 이루는 사회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 자리를 포기하고 겸손되어 땅에 내려와 자연의 일부로서 주변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사회다.
생명을 돈보다 앞세우는 사회(지금도 말로는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실제로는 그 반대다), 뿌리를 가지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 농자천하지대본”은 말 뿐이요 실정은 “농자천하지대똥”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곧 우리는 편이와 안락을 약속하면서 (그러나 실상 도시는 얼마나 우리에게 불편하고 불안한 곳인가0 그 대가로 인간의 인간스러움을 약탈해가는 저 눈먼 도시화, 공업화로부터 탈출을 감행해야 하다. 지나치게 켜서 수도(수도)보다는 쌀 씻어 밥해먹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이 되버린 오늘이 ‘등명사’를 차례로 무너뜨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안질을 고쳐,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게 하는 길이겠기에.
때는 이조시대, 어느날 갑자기 왕이 심한 안질(眼疾)에 걸렸구나. 이약 저약 다 서보고 용하다는 의원을 모두 불렀지만 왕의 안질이 낫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지. 하는 수 없어서 일관(日官)을 불러다 점(占)을 쳐보라 이르니, “왕국에서 정동쪽에 큰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절에서 갑자기 너무 낳은 쌀뜨물을 바다로 흘려 내려보내니 동해 용왕이 눈병을 앓게 되었는지라 이를 알리기 위해서 왕이 같은 병을 앓는 것”이라는 점쾌가 나오는구나.
곧장 왕궁에서 정동(正東)에 있는 절을 찾아보니 바로 등명사라는 절이 있는데 어찌나 큰지 중이 수백명도 넘게 살고 있더라는거야. 그들이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어 밥을 짓는 바람에 뜨물이 그대로 흘러 들어 바다를 더럽히고 있었지. 왕이 곧 명을 내려 등명사를 폐사(廢寺) 시켰더니 안질이 저절로 나았다는구나. 그래서 아주 큰 절 하나가 이름만 남고 없어졌대. (지금도 그곳에 등명사라는 절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절은 어느 이름도 없는 중이 나중에 세운 것으로서 옛날의 등명사와는 전혀 다른 절이다. )
용왕이 안질을 앓는다. 예삿일이 아니다. 용왕은 곧 물이다. 그러므로 용왕이 앓는다 함은 물이 병들었다는 말이다. 물은 생명이다. 따라서 물이 병들었다 함은 생명에 탈이 났다는 말이다. 무엇이 물을 병들게 했나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오는 쌀뜨물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생활 폐수쯤 되겠지. 쌀뜨물이야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아니 나올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이 강물을 타고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 또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연 이치라. 그러니 막연하게 쌀뜨물이 바다오염의 주범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칼로 사람을 지르고 나서 칼이 사람을 찔렸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등명사라는 절이 너무 컸다는 데 있다. 절이 크니 중들이 많이 모여들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자연이 스스로 정화(淨化)해 낼 수 없을 만큼의 오염물질을 한꺼번에 쏟아버리게 된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도시화 보태기 공업화가 오늘의 용왕(물)을 병들게 한 주범이다. 농경사회에서는 “공해”이 “오염”이니 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농사꾼들이 버리는 생활폐수쯤이야 자연이 얼마든지 삼켰다가 다시 맑은 물로 되돌려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시가 형성되면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폐수가 쏟아져 나오자 자연의 정화능력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업사회로 바뀌면서 자연의 정화능력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쓰레기들, 요컨대 썩지 않는 쓰레기들이 마구 나오게 되자 바야흐로 자연은 비대해진 인간집단의 폐수로 말미암아 병들고 말았다.
그런데 자연이 병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병들게 된다. 결국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공업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문명(文明)이라는 높은 탑을 쌓았지만 바로 그 탑 때문에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일러주기 위하여 왕(王)이 병들었다. 어리석은 왕은 자신이 병들기 전에는 물이 썩어가고 있는지 바다가 오염됐는지 관심조차 없다. 아무리 심각하게 말해도 제 몸에 탈이 생기기 전까지는 꿈쩍도 않는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스스로 오만하여 우쭐거리는 인간의 한심스런 모습입니다.
온갖 편이와 안락을 보장해주는 도시(都市). 그리고 그 풍요로움! 이 땅에 맨 처음 도시를 세운 사람은 누구였을까 성서는 그의 이름을 밝혀놓았다. 아우인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는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쓴 사람, 비극의 주인공 카인이 바로 그다.
카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와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인이 아내와 한 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제가 세운 고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불렀다(창세 4,16-17)
자크 엘륄은 카인이 “고을”을 세운 것을, 더 이상 신(신)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게 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결과로 본다. (The Meaning of City, 제1장). 허허벌판에 드문드문 거처를 마련하고 살기보다는 무리를 이루어 한군데 뭉쳐 살면 그만큼 자연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도 쉬울 것이다. 카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쫓겨났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그래서 에덴 동쪽 놋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거기에 “고을”을 세웠다. 요컨대 신 없이 스스로 살아가겠다는 카인의 의지가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신 없이 스스로 존재코자 하는 인간의지에, 문제의 알속이 있다. 결국 도시는 범죄한 인간의 손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작용하는 괴물이다.
소금기둥의 전설을 낳은 소돔과 고모라는 “너무나 엄청난 죄’를 잣고 있는 “도시”였다(창세 18,20). 의로운 사람 열이 없어서 불벼락을 맞아야 했던 사악한 도시였다. 우연히 거기에만 의인(義人)이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외로운 사람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다. 도시는 그 본질상 의인을 터잡고 살도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소돔의 시민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얼마나 타락하고 난폭하고 무모했는지 창세기 19장에 길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침내 야훼께서는 소돔이라는 성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다(19,14). 그런데 도시의 멸망을 도시만의 멸망이 아니었다.
야훼께서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으시어 거기에 있는 도시들과 사람과 땅에 돋아난 푸성귀까지 모조리 태워버리셨다. (창세 19,24-25). 거기에 있는 사람과 푸성귀까지 모조리 타 버린 것이다. 도시에 대한 심판은 그것을 세운 인간에 대한 심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나 문제의 핵심에는 ‘인간”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인간 때문에,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고 애먼 푸성귀까지(그 틈에 살던 들쥐라고 무사했으랴!) 타 죽어가는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를 인간의 교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것이 하나의 정설(定說)로 되어 있지만, 그렇게 심리적인 해석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도시와(都市化)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훼방 또는 심판이기도 하다.
“온 세상이 한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창세 11,1) 그렇다. 도시는 사투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내자. ’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창세 11,2-2).
이른바 여기서 문명이 비롯된다. 문명이란 천연(天然)을 인공(人共)이 대신하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는 법니다. 돌 대신에 벽돌을, 흙 대신에 역청을! 이것이 문명의 시초요 본질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땅에서 솟는 샘물 대신에 다목적댐에서 조절되는 물로 농사를 짓는, 바로 그것이 문명의 자랑스런 성과다. 두 다리를 대신하는 자동차,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사이버네틱스 또는 컴퓨터, 움켜진 주먹을 대신하는 미사일과 탱크, 그게 바로 인간의 문병인 것이다. 문명은 곧바로 도시를 낳는다. 물론 그 역(逆)일 수도 있다. 나일의 기름진 땅이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이집트 문명을 낳았다. 도시와 문명은 인공에 의해 태어나는 일란성 쌍생아다.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창세 11,4).
탑이 하늘에 닿도록 높다는 데도 숨은 뜻이 있겠지만, 그 탑이 도시의 일부였다는 점을 못 보고 지나가서는 안된다. 그들이 세운 것은 “탑이 있는 도시”였다. 그렇다. 그들은 소기를 세우고 거기 뭉쳐 살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운명을 피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늘이 야훼는 그들을 흩어 버리신다.
“야훼쎄거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으로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대겠다. ”(창세 11, 5-7).
여호와 하나님이 훼방을 놓으신다. 질투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을 이땅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투리를 허용하지 않는 도시의 언어가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차단한다. 이웃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어주는 귀가 없다. 피리를 불러도 춤추는 사람이 없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절(단절)의 땅, 도시. 사방에서 개막이나 개업생사를 오라는 초청장이 날아들고 있지만 그럴수록 도시의 문은 더욱 완강하게 닫혀만 간다.
바벨탑 이야기는 이 나라 한 정치가의 말에 대한 반전(반전)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스스로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까지 죽인다. 등명사는 애초에 법을 밝히는 절로 궤방산 기슭에 섰겠지만, 너무 컷다. 그것이 탈이었다! 그렇게 덩치가 커서 온통 인간들로 득시글거리다가는 법(법) 밝히기는 고사하고 뜨물이나 바다에 쏟아버리게 마련인 것이다. 절간이 그렇게 커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교회당 도한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종교의 도시화가 화근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안에 일정한 한계를 지나고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래서 코끼리보다 고래보다 저 남산보다 더 커진다면 어찌되겠는가 성장을 적당한 한계에서 멈추는 것이야 말로 삶의 기본 원리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어서 사라져간다. 그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일부”(1部) 또는 “요소(要素)”인 것이다.
페놀 때문에 온 나라가 야단인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새삼스런 소동이었다. 수돗물에서 악취가 나니까 그제서야 법석을 피웠다. 시대의 예언자들이 수질오염의 심각성을 외쳐대기 시작한 게 언제였던가! 그때는 도무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수돗물에서 냄새가 나니까 비로소 떠들썩했다. 바다가 더럽혀지고 그래서 용왕이 눈병까지 났지만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으니 결국 왕의 눈에 동티가 났다. 그제서야 의원을 부르고 점쟁이를 부르고 야단 법석하면서 그 “까탈”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알고 보니 절간 하나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너무 커서 중들이 지나치게 많이 모여 있고 그래서 쌀뜨물이 마쳐 자연정화를 할 새도 없이 한꺼번에 바다로 흘러들어가, 용왕한테 눈병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이 곧장 폐사를 명하니 등명사는 없어지고, 중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바다는 다시 맑아지고, 용왕의 눈병과 함께 임금의 눈병까지 치우되었다니라! 자연 (용왕-물)이 깨끗해지니 비로소 왕9인간)이 깨끗해지는구나.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말을 그만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다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창세 11, 8-9)
바벨탑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만 흩어짐으로써 사람은 다시 새롭게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도시는 문명을 낳고 그 문명을 밑에서 받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기술이다. 기술은 기계에서 나오고 기계를 쓰면 기심(機心)이 발동한다. 그 기심은 자연을 배척한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도(道)와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대가 없이 따서 먹을 수는 없는 법이라. 아담은 생명을 대가로 내놓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래서 “죽음”이 그 몸에 들어왔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을 “여호와 하나님과의 단절”로 보는 설명이 딴은 그럴 듯하다. )
기계문명은 우리에게 얼마나 달콤한 선물을 제공하고 있는가 편이와 안락함! 이제는 안방에 앉아서도 시방을 볼 수 있다고 시끄럽게 선전한다. 그건 그렇다. 비행기가 있으니 국제회의가 날마다 열리고 전자통신으로 런던 주식시장을 내 집 앞 뜰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편이와 안락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대가로 지불했던가 썩어가는 산천, 독물이 흐르는 강, 헐벗은 숲, 늘어만 가는 기형아, 무엇보다도 기계처럼 메말라 버린 인정(人情). 이제 어쩔 것이가 이 시대의 “등명사”를 어디서 찾아내어 폐사 시킬 것인가글은 하나뿐이고 멀지 않은 데 있다. 비대해지기만 하는 도시화와 그것을 밑받침 해주는 물질지상주의, 기술문명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이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며”(요나 3,5)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자연과 자유를 떠나서는 달리 있을 데가 없는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쓰지다 다까시의 공업사회의 붕괴 중에서 좀 길지만 옮겨본다.
현재의 ‘번영”은 그 출발에 있어서 죄의 대가를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풍요로운 60년대로부터 난숙(爛熟)과 공해의 70년대로 이어지면서 이미 불길한 그림자는 검게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은 어쩔 구 없이 “썩은 냄새”를 내면서 무너지는 80년대로 이어져갑니다. 결국 현대의 “번영”은 그 출발에 있어서 이미 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원료자원(原料資源) 고갈 등의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국은 입구에만 있지 않습니다. 뒤가 막히는 것도 생명을 앗아갑니다. 병균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도소”에 의해서도 병약해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어느쪽이든 공업화 사회는 반드시 물에 잡기는 진흙으로 만들어진 배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눈에 뜨게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폐기물(쓰레기) 문제는 자연생태계의 순환에 의거하지 않는 공업문명의 필연적 산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공업적 “풍요”를 단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연계의 여러 생물들과 공생(共生)하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생활을 건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지혜가 소중합니다. 지혜야말로 인간의 특성이지요, 쓰고 버리는 생활로 인해 잃은 것은 지혜요 인간입니다. 쓰레기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인 것입니다. (112-113)
요컨대 공업화 사회는 현재 죽음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단언해도 좋습니다. 저는 공업화 사회는 반드시 몰락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현대 문명의 특징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문제는 저의 전문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언급하기는 곤란합니다만, 현대 사회는 기본적으로 돈으로 움직인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돈이 되는 것은 중요시하지만 안 되는 것은 경시한다는 데 현대 사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김영주 옮김, 분도출판사, 117-118쪽).
한데 모여서 도시를 이루어 살다보니 자연히 뜨물이 많이 생겼고 그것이 결국 용왕의 눈을 병들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살던 터(절간)를 무너뜨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함으로써 임금의 안질은 물론 바다 용왕의 병까지 고쳤다는 이 짧은 전설은 현대 문병의 고질에 대하여 그 원인과 함께 치료방법까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쓰지다 선생은 회복의 실마리를 인류가 공적(공적) 사회에서 농적(농적)사회로 머리를 돌리는데서 찾는다. 물론 그가 말하는 종적 사회란, 옛날의 농경생활로 돌아간 사회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순환 가능한 공생의 삶을 이루는 사회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순환 가능한 공생의 삶을 이루는 사회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 자리를 포기하고 겸손되어 땅에 내려와 자연의 일부로서 주변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사회다.
생명을 돈보다 앞세우는 사회(지금도 말로는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실제로는 그 반대다), 뿌리를 가지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회)” 농자천하지대본”은 말 뿐이요 실정은 “농자천하지대똥”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곧 우리는 편이와 안락을 약속하면서 (그러나 실상 도시는 얼마나 우리에게 불편하고 불안한 곳인가0 그 대가로 인간의 인간스러움을 약탈해가는 저 눈먼 도시화, 공업화로부터 탈출을 감행해야 하다. 지나치게 켜서 수도(수도)보다는 쌀 씻어 밥해먹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이 되버린 오늘이 ‘등명사’를 차례로 무너뜨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안질을 고쳐, 보아야 할 것을 바로 보게 하는 길이겠기에.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