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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십자가에 못 박힌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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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적어도 사랑할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사람, 부족한 사람까지도 모두 사랑하시는 분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판단으로는 선과 악이 있고 선인과 악인이 나누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온전하심은 이들 모두를 포괄하고 사랑하고 감싸주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자비를 골고루 내려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태양을 골고루 비춰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서두에 모세, 곧 옛날의 율법과 구별되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넓게 말씀하 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입견, 선민사상 , 즉 자신을 중심에 놓고 남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태도를 꾸짖으시면서, 하는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고, 너를 중심에 놓고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마음을 근거로하여 살아가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읽은 말씀 역시 이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인간은 육신에 따라 살면 안되고 영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 녀인 것을 증거사고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육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체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만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의 육신을 죄로, 죽음을 가져오는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상의 본래적인 의미 속에서 육이란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고 율법이란 바로 자신을 중심에 놓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자신을 결국 여호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태도, 그래서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너와 나를 나누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체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와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영으로써 모든 사람의 삶을 사랑하고 모두를 새롭게 이끌어가는 생동력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태 복음의 말씀과 로마서의 말씀은 본래적으로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으며 그리하여 누 가복음 16장에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전체로 모두에게 인도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본문을 오늘의 말씀으로 택한 것은 요한 웨슬리의 회심주간과 성령강림주일을 맞고있는 오늘 특별히 웨슬리의 의미와 성령강림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보고자 하기 위해서 입니다.
 웨슬리의 신학의 중심사상은 성화론(Sanctifcation), 즉 거룩해짐, 온 전해짐에 있습니다. 이런 웨슬리의 사상을 종교개혁자 마틴 루토와 비교해 보면 그 특색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신앙으로만, 믿음으로만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면서 , 그는 칭의론, 즉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은 의로움을 받았다, 죄인이면서도 의로워진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신앙으로 만의 칭의론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신앙 의인(Sola fide)의 칭의론은 중세기 카톨릭교회가 지나치게 인간의 업적행위에 대한 일종의 보상행위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왔던 것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 었다고 보여집니다. 루터는 칭의론을 통해서 인간의 업적, 인간의 행위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보상,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중세기의 교리적 병폐를 시정하고 교회를 이 칭의론을 가지고 개혁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칭의론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죄의 용서, 따라서 매일 매일의 속지행위만을 강조하였을뿐 그래서 거듭거듭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인간이 용서되어지는 칭의행위만을 강조하였을 뿐 신앙에 있어서 인간의 지속적인 성장, 신앙이 활력이라는 점을 그렇게 강조하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즉 신앙의 정숙주의에 빠져들어 용서받는 죄인, 용서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게 된 이가이라는 사건에만 지나치게 매달려 있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요한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와중에서 피폐해진 당시의 노동자들이 구체적인 삶을 구하려고 사회적 종교로서의 기독교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칭의보다는 성화를 강조하는 계기가 외었습니다. 그는 산업사회 속에서 제기 되어지는 인간의 구체적이 삶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하루 열여덟 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의 육체적 피로와 피곤함을 풀기 위하여 술과 마약과 여자와 쾌락을 통하여 더욱 더 자신의 몸, 삶 , 가정을 파탄시키는 방법으로 자기들이 시간을 보내는 타락한 심성들 앞에서 웨슬리는 기독교신앙이 이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이 답을 주지 않으며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은 매일매일 되의 용서에만 매달려 있으면 안되고 신앙의 자람, 신앙의 성숙함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성화론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즉 웨슬리는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사실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당시 노동자들, 영국의 시민들의 육체적인 고통의 문제, 가정의 파탄, 삶의 어려움을 종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인간이 완전해 질 수 있다는 이 사상은 당시 피폐해진 영국 산업사회속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금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했고, 자기 자신의 의지를 조절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 가정의 삶 그리고 영국 사회를 구원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화론은 결국 인간의 사회적인, 일상적인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이해함으로 사회적 육체적 고통을 종교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했던 감리교의 귀한 전통으로 보여집니다.
 웨슬리의 어미니 수잔나가 어릴적부터 요한 웨슬리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하는 하나의 말이 있는데, 그것은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일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일치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결국에 가서는 거룩함이란 바로 행복함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같아지는 것, 여호와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는 것을 최상의 행복으로 가르쳤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웨슬리 신학은 성화론에 그 중심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수잔나의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웨슬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란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성화시키는 사건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으며, 그래서 감리교는 교리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이고, 경험의 종교이고, 체험의 종교이고, 사랑의 종교임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이러한 웨슬리의 생각을 다시 한번 오늘의 의미로 생각해보면서 성령강림의 읨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 웨슬리의 성화, 거룩함, 온전함, 인간이 죽기 정까지는 완전한 의읜,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이 성품과 거룩함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러한 긍정적인 일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의 시점에서 웨슬리가 강조했던 성화를 말해야 하는 새로운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화를 말해야 하는 삶의 장과 우리의 역사 및 우리의 시대 인식이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성화론을 가지고 루터 칭의론의 지평을 넘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칭의론을 가지고 중세의 카톨릭적 지평을 넘어섰지만 웨슬리에게는 자신의 성화론을 가지고 영국 산업사회의 병폐를 구원해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산업 사회라기보다는 산업사회의 종말을 예고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과정속에 우리의 삶이 놓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산업사회란 좀더 많이 생산하고 좀더 많이 소비하는, 그래서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였습니다. 이로부터 웨슬리는 많이 벌어라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많이 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일반적을 소개신교의 윤리가 자본주의 성립을 도왔다고 한막스 베버의 입장을 빌린다고 할 때 칼빈의 입장은 많이 벌어라 많이 저축하라 이 저축의 원리 여기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웨슬리는 분명 많이 벌어라,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많이 주라고 하는 이 경건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칼빈보다는 더욱 더 사회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더 잘 알았다고 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산업사회의 사상가로 머물게 됩니다. 많이 벌어라, 이것은 전 지구적으로 자원이 결핍되고 환경이 오염되고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평가받아야 될 원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에 웨슬리의 성화론에 대한 본래적 의미는 오늘의 시대 인식 속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고, 이 의미를 성령 강림의 의미와 더불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작가가 유럽의 어느 시골의 성당을 방문한 것이 있었습니다. 촛대 위 양쪽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깊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건은 막막한 우주 공간에 떠있는 둥근 지구를 찍은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였습니다. 창 조주를 찬미하고 경배하는 성스러운 성전에 십자가와 함께 걸려져 있는 둥근 지구를 바라보면서 오늘날 현대문명의 발전으로 지구가 참혹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고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만이 아니고 바로 지구 자체로 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방식을 합리적 사고 방식으로 굳게 믿고 발전과 개발과 진보라는 신화를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여 현대적인 도시문명을 발전시 킴으로써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생명 공간인 지구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구나라고 하는 생 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생명체가 모두 이간 을 위해 있는 것이라 는 착각을 하고 살아 왔습니다. 숲의 나무는 인간에게 베어지기 위해 자라나고 있고 들판의 꽃은 마땅히 인간에게 꺾이려고 피어있고 바다의 물고기는 인간에게 잡혀 먹히려고 그곳에 준비된 것이라고 하 는 생각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고 방식들이 지구를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아는대로 홍수와 가뭄과 이상 기후 현상들이 도처에 일어나며 지구의 산소 공급원이 되는 숲들이 훼손되어 자동차 배기가스, 공장폐수, 합성세제, 몇 백년동안 썩지 않는 플라스틱 제품들이 인간이 들어내고 있고, 그로 인해서 공기와 물이 죽어가도 있다는 현실입니다. 우주공간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에서 지구처럼 그 균형이 완벽하여 삼라만상이 어여쁜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어떤 다른 별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 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이 지구상에는 태양계와 같은 엄청난 거대한 우주공간이 수천 수만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 지구는 유일한 생명공간이요 우주의 영광이자 축복입니다. 지구의 생명체중 인간처럼 탁월한 생명체는 없다고 믿기에 인간 또한 축복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지구의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구가 인간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 웨슬리 성화론의 현대적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성화는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곧 전지구적 생명에게 더 이상 폭력과 힘을 행사해서는 안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받드는 지구 만물공동체, 생명 공동체를 이루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웨슬리 당시 감리교도들이 삶의 성화를 위해서 죽기 전까지 인간도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움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고 삶의 성화를 위해서 마시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노예를 폐지하고 창녀촌을 폐지하는 등 강력한 삶의 규칙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체들에 대한 폭력을 과감히 거부하는 삶의 양식을 창조해내야 할 것입니다. 흔히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실성 없는 탁상 공론이며 망상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불과 일 백년전만 해도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을 탁상 공론이라고 주장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태어날 때부터 왕가의 자식이고 양반은 날 때부터 고상한 양반의 자식이고 머슴은 평생 머슴으로 지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에, 누군가가 인간이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는 죽일 놈이 되든가 그는 정신나간 사람이 되든가, 그는 그 사회에서 존재할 수 없는 상태로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룩해야 할 이 세상이 인간에 의해서 이렇게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이제 인간끼리만 화목하게 지내는 인간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 만물공동체, 삼라만상 공동체, 즉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무와 풀과 하늘과 새와 온갖 벌레와 바위와 물과 세상의 만물이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은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창조신앙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세상을 위해서 전 피조물들은, 고통 받고 있는 전 자연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출현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성서는 말해줍니다 .
다시금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 곧 율법을 죽이고 영으로 살라는 본문말씀으로 돌아가, 거룩(Holy)이라고 하는 말을 전체를 의미하는 whole과 같은 어원을 지녔다고 합니다. 거룩하라는 것을 전체를 생각해라 라고 하는 말과 어원적으로 같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말이 생기기 전 에 있었던 라틴어 religio( 종교)라는 말의 본래 적인 의미는 우리 말로는 마루 宗자에다 으뜸가는 敎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라틴어의 본래적인 의미는 이세상이 얼마나 상호간에 관계되어 있는지를 경외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는, 즉 이 세상의 오늘의 성화론: 십자 가에 못박힌 지구이정배 또 네 이웃을 사람하고 내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삼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여호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버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실현하는 것이며, 이 산업화 후기시대에 기독교의 책임있는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생명의 영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생명의 영의 부름 앞에 우리의 지금까지의 비본래적인 본질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우리들은 이 사회를 새롭게 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그러한 의미를 되찾기거룩함은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행복함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함이란 바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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