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創造) 세계가 금세기에 이르러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실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롬 8장 22절)는 말씀처럼 모든 피조물이 마시기에 부적합한 물, 숨쉬기에 답답한 공기, 카드뮴과 같은 독을 내뿜는 토양, 이런 환경에서 자연은 병들어 죽어가거나 기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이 파괴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종래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전면적으로 재검토되고 수정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들에 대해 무책임한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오늘의 환경 위기는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명령에는 충실하고 “가꾸고 지키라”(창 2:16)는 명령에는 실패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 자연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고 이로 인한 자연 파괴는 날로 심각해 져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착취 대상이 아니라 “파트너”임을 깨달아 자연을 경시하는 풍조를 버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人間)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며 또한 생태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위기상황 속에서 요청하는 구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오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세계와 만물을 회복(Restoration)해야 할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와 자연(自然)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能力)이 필요함을 알고 이제부터라도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화목하게 하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태학적으로 파괴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성도로 거듭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땅은 사람들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관리자로서 땅을 경작할 수 있는 권리만을 주셨을 뿐 소유권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의 소유권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땅의 소유주(所有主)처럼 땅을 마음대로 훼손하거나 땅을 인간들만을 위한 터전으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에는 땅에 떨어진 이삭을 그냥 남겨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먹도록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사람들의 소유가 아닐 뿐 아니라 사람들만을 위한 터전도 아닙니다. 새와 들짐승, 나무와 꽃 그리고 곤충은 아름다운 우주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둘째, 땅과 사람은 공동의 운명체입니다.
본래 땅과 사람은 남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아담)은 땅(아마다)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창 3:19)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곧 땅에 속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자 땅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 말씀을 보면 “그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 법을 보면 안식은 사람만이 아니라 땅(경작)도 7년에 한 번씩 안식을 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땅과 사람이 지닌 깊은 관계를 말할 뿐 아니라, 땅도 살아 있는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야 함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듯 자연을 벗으로, 고마운 이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은 흙과 똑 같은 원소로 만들어져 있으며, 흙 위에 거처하며, 흙이 만들어낸 소산을 먹고사는 것입니다. 흙은 이처럼 생존의 기초가 되며 근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피조물로서 흙에 대한 친밀함과 고마움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나는 땅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을 거름지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수풀과 내와 호수를 더럽히며, 심지어 중금속과 핵 폐기물과 폐비닐과 쓰레기로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오늘날 급속도로 진행되는 생태계의 파괴의 현상은, 지구의 온실화가 촉진되어 빙하가 녹아내리므로 육지의 상당부분이 물에 잠기고, 산성비의 영향으로 삼림이 황폐화되므로 사막이 되며 오존층의 파괴로 생존의 위협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자연도 함께 타락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자연의 구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제까지 인간의 구원에만 전념하던 선교의 초점을 전피조물의 구원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만의 구주가 아니라 만물의 구주가 되신다고, 본문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 사 만물을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고 하였습니다(골 1:18-20).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연과 더불어 창조하셨던 것처럼, 독생자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도 인간을 만물과 더불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먼저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연을 구원(救援)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창조질서 회복에까지 미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우리에게 주신 명령인 자연을 다스리고 지키는 책임을 이제는 구원 받은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전도하는 일에만 전력을 쏟아왔지만 이제는 자연을 회복시키는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神學)이 도외시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에 대한 신학적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창조 질서 보전은 단순한 운동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을 불러일으킬 문제입니다. 신학의 전환 없이는 환경보전 운동은 일시적인 운동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신학의 전환을 통해서 교회 선교구조의 전환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올바로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교육에 있어서도 창조질서의 보전이라는 주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이 운동을 위하여 상당한 예를 투자하여야 할 것입니다.
청지기는 종을 관리할 뿐 아니라 재산을 관리하고, 쾌적한 집안이 되도록 청소와 집수리도 신경을 써야 할 총괄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환경을 관리하고 보전(保全)하는 일까지 책임감 있게 우리들의 선교 과제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마지막 날 우리들은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오늘의 환경 위기는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명령에는 충실하고 “가꾸고 지키라”(창 2:16)는 명령에는 실패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 자연을 경시하는 풍조가 생겼고 이로 인한 자연 파괴는 날로 심각해 져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착취 대상이 아니라 “파트너”임을 깨달아 자연을 경시하는 풍조를 버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人間)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며 또한 생태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신음하는 피조물”들이 위기상황 속에서 요청하는 구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오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세계와 만물을 회복(Restoration)해야 할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와 자연(自然)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能力)이 필요함을 알고 이제부터라도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화목하게 하신 만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태학적으로 파괴되지 않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성도로 거듭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땅은 사람들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관리자로서 땅을 경작할 수 있는 권리만을 주셨을 뿐 소유권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의 소유권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땅의 소유주(所有主)처럼 땅을 마음대로 훼손하거나 땅을 인간들만을 위한 터전으로 삼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에는 땅에 떨어진 이삭을 그냥 남겨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먹도록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처럼 땅은 사람들의 소유가 아닐 뿐 아니라 사람들만을 위한 터전도 아닙니다. 새와 들짐승, 나무와 꽃 그리고 곤충은 아름다운 우주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둘째, 땅과 사람은 공동의 운명체입니다.
본래 땅과 사람은 남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아담)은 땅(아마다)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창 3:19)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곧 땅에 속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자 땅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 말씀을 보면 “그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 법을 보면 안식은 사람만이 아니라 땅(경작)도 7년에 한 번씩 안식을 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땅과 사람이 지닌 깊은 관계를 말할 뿐 아니라, 땅도 살아 있는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야 함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듯 자연을 벗으로, 고마운 이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정말 사람들은 흙과 똑 같은 원소로 만들어져 있으며, 흙 위에 거처하며, 흙이 만들어낸 소산을 먹고사는 것입니다. 흙은 이처럼 생존의 기초가 되며 근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피조물로서 흙에 대한 친밀함과 고마움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나는 땅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땅을 거름지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수풀과 내와 호수를 더럽히며, 심지어 중금속과 핵 폐기물과 폐비닐과 쓰레기로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오늘날 급속도로 진행되는 생태계의 파괴의 현상은, 지구의 온실화가 촉진되어 빙하가 녹아내리므로 육지의 상당부분이 물에 잠기고, 산성비의 영향으로 삼림이 황폐화되므로 사막이 되며 오존층의 파괴로 생존의 위협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자연도 함께 타락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자연의 구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제까지 인간의 구원에만 전념하던 선교의 초점을 전피조물의 구원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만의 구주가 아니라 만물의 구주가 되신다고, 본문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 사 만물을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고 하였습니다(골 1:18-20).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연과 더불어 창조하셨던 것처럼, 독생자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도 인간을 만물과 더불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먼저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연을 구원(救援)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는 단순히 사람을 구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창조질서 회복에까지 미쳐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우리에게 주신 명령인 자연을 다스리고 지키는 책임을 이제는 구원 받은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전도하는 일에만 전력을 쏟아왔지만 이제는 자연을 회복시키는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학(神學)이 도외시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에 대한 신학적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창조 질서 보전은 단순한 운동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신학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을 불러일으킬 문제입니다. 신학의 전환 없이는 환경보전 운동은 일시적인 운동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신학의 전환을 통해서 교회 선교구조의 전환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올바로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교육에 있어서도 창조질서의 보전이라는 주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이 운동을 위하여 상당한 예를 투자하여야 할 것입니다.
청지기는 종을 관리할 뿐 아니라 재산을 관리하고, 쾌적한 집안이 되도록 청소와 집수리도 신경을 써야 할 총괄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교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환경을 관리하고 보전(保全)하는 일까지 책임감 있게 우리들의 선교 과제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마지막 날 우리들은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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