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
본문
오늘은 환경주일 입니다. 환경주일을 지킴으로 전 세계의 교회들이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우리의 삶에 얽혀 있는 생활적인 문제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는 예배이기 보다는, 그 동안 우리가 무관심했거나 자연의 환경을 망가뜨리는데 너무 나도 익숙해져 있던 우리의 삶이 모습을 돌아 보고 잘못된 신앙의 방향을 올바르게 바로 잡을 수 있는 소중한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첫번째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아마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구절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구약에 있는 시편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말씀과 함께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말씀은 우리와 친숙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빛의 밝음보다는 암흑의 어두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죄에 갖혀 있던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 가운데 가만히 점잖게 앉아 계셨던 분이 아니라 그분은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의 손과 발을 움직이셔서 당시의 가난하고 소외되니 갈릴리의 민중들의 삶속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철저하게 섬김의 종으로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분의 삼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삶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기가 환경주일을 맞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대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말씀에 대한 안목이 먼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안목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우리가 말씀을 잘못 이해해 온 신앙의 편견을 바로 잡고자하는 노력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동안 2천년 동안의 기독교가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칠 때 본문의 의미를 너무나도 편협하게 취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동안의 기독교는 이 말씀을 가르칠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오직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서 오셨다는, 다분히 인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로 인간만을 사랑해서 그를 보내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유효합니까 그렇질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뿐아니라 인간이 머물러 사는 이 세상전체의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름 없는 들의 풀 한 포기든지 , 정처 없이 굴러다니는 한 개의 돌맹이든지, 아니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조직이든지 제도이든지 이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 순간부터 교만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교만해 질 뿐 아니라, 교만해진 인간은 모든 자영과 제도주의에 군림해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그것이 과학이요,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비롯한 온갖 이념과 제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과학과 제도들 특히, 자본주의라는 매우 매력적인 제도를 통하여 자연을 무자비하게 지배해 왔습니다. 과학을 통하여 인간들로부터 지배당해 온 자연을 언제까지나 인간들의 지배에 굴복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무서운 재앙의 화를 안겨 주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지금이 재앙의 시작입니다.
황폐해가는 지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끝 모르는 욕망 때문에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의 친구일 수 없습니다. 지구는 심각한 자원의 고갈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존층의 파괴를 하늘은 구멍이 나있고, 산성화 된 땅은 앞으로 더 이상 농작물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해로 뒤범벅이 된 하늘은 이 땅에 산성비를 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로부터 견디지 못할 학대를 받아오던 지구의 자연이 흐리는 고통과 슬픔의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바울은 이와 같은 현상들을 예견하여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 당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
고통 당하는 자연의 신음소리가 들립니까 자연과 함께 아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 보입니까 아니면, 지금 이 시간에도 자연을 파헤치면서 개발이라는 목적을 이루어가는 중장비 기계소리에 미련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기에 환상 두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우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신안의 귀를 크게 여십시오. 그리고 말씀의 빛 가운데로 들어 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으로 사물을 복,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고방식을 헤아려 볼 수 있어야합니다. 다름 아닌, 개발의 기계소리 보다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상처가 나고 할퀴어서 피 흐르는 자연의 고통소리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필연적인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오늘날의 자본주의라는 제도는 인간의 참다운 삶을 보장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민주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연을 담보로 하여 국가의 물질적 부를 확대 재생산하고 국가적 욕구를 밖으로 팽창시키는 제국주의의 무한한 욕망과 결부되어 왔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의외의 다른 이데올로기나 제도들도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온 역사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특히, 자본주의가 거대한 권력들과 손을 잡고 자연을 지배해온 점은 다른 제도들이 저질러 온 그것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심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엄청난 양의 자연을 먹이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생산된 돈은 자연을 소비재로 하여 생겨나는 또 다른 물질이고, 그렇게 하여 생겨난 돈은 인간의 욕망을 한번 더 부채질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과학과 자본주의라는 두 바퀴를 욕망의 수레에 달고 지칠 줄 모르게 역사를 진행시켜 왔습니다. 욕망의 수레에 달려 있는 과학과 자본주의라는 두 바퀴는 쉴 새 없이 굴러가면서 자연을 할퀴고 짓 뭉개버렸습니다. 오늘도 이 수레바퀴는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미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유토피아는 좀처럼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토피아는커녕 불안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학 이전의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합니까 기계를 모두 부숴버려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연을 보호하고, 조미료 안 먹고, 세제 안 쓰고 , 샴푸로 머리 감지 않고… 우선 떠오르는 생활 속의 지혜들을 실천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방법들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텐데 그렇다고 성서도 우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줄 만한 충분한 대답을 마련해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답답한 가운데에서도 성서는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매우 힘있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인 마태복음 19장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우리는 오늘의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예배드림에 있어서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귀담아 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서적인 대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안이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 동안 선진국에서 이미 개발해 놓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쌓아 올린 경제적 부를 보다 가난한 국가들에게로 나눠주는 일입니다. 그런 후에 과학의 발전을 적절한 선에서 통제하고, 지구의 생명력을 유지 보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과학의 진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국가의 엄청난 결단과 그에 따르는 무수한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어찌보면 매우 낭만적이고도 이상적인 발상인 것도 같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성서적 대안이야말로 인간이 살아남고 환경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대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라고 희망조차 버리지 말고 서로 나눌 줄 아는 세계질서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구조가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구조로 변화되어 가도록 살펴야 합니다. 성장의 환상에서 벗어나서 분배의 미덕을 가꿔 나가야 합니다.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명분 때문에 힘있는 나라에 더 이상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민족의 하나 됨을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가 한가지 결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의 요소들을 바로 잡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서, 눈에 하찮아 보이는 작은 생명들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축복의 신앙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축복이요, 그 축복은 곧 물질의 보다 많은 소유가 아니었습니까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환경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있는 참여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소유가 곧 축복이라는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서 축복은 소유가 아닌 나눔이요 ,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에서 맛 볼 수 있는 신앙의 경험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고 국가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서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 나눔의 사랑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이 와 같은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짓밟으면서 끝 모르고 달려가는 인간의 욕망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환경들에게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뒤늦게나마 맛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첫번째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아마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구절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구약에 있는 시편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말씀과 함께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말씀은 우리와 친숙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빛의 밝음보다는 암흑의 어두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죄에 갖혀 있던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 가운데 가만히 점잖게 앉아 계셨던 분이 아니라 그분은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의 손과 발을 움직이셔서 당시의 가난하고 소외되니 갈릴리의 민중들의 삶속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철저하게 섬김의 종으로서 이 땅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분의 삼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삶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기가 환경주일을 맞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대하고자 할 때, 다음과 같은 말씀에 대한 안목이 먼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안목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우리가 말씀을 잘못 이해해 온 신앙의 편견을 바로 잡고자하는 노력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동안 2천년 동안의 기독교가 본문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칠 때 본문의 의미를 너무나도 편협하게 취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동안의 기독교는 이 말씀을 가르칠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은 오직 인간의 구원만을 위해서 오셨다는, 다분히 인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로 인간만을 사랑해서 그를 보내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만 유효합니까 그렇질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뿐아니라 인간이 머물러 사는 이 세상전체의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름 없는 들의 풀 한 포기든지 , 정처 없이 굴러다니는 한 개의 돌맹이든지, 아니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조직이든지 제도이든지 이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그 순간부터 교만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교만해 질 뿐 아니라, 교만해진 인간은 모든 자영과 제도주의에 군림해서 스스로 높아지려는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그것이 과학이요,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비롯한 온갖 이념과 제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들이 쌓아올린 과학과 제도들 특히, 자본주의라는 매우 매력적인 제도를 통하여 자연을 무자비하게 지배해 왔습니다. 과학을 통하여 인간들로부터 지배당해 온 자연을 언제까지나 인간들의 지배에 굴복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무서운 재앙의 화를 안겨 주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지금이 재앙의 시작입니다.
황폐해가는 지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끝 모르는 욕망 때문에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의 친구일 수 없습니다. 지구는 심각한 자원의 고갈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존층의 파괴를 하늘은 구멍이 나있고, 산성화 된 땅은 앞으로 더 이상 농작물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해로 뒤범벅이 된 하늘은 이 땅에 산성비를 뿌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로부터 견디지 못할 학대를 받아오던 지구의 자연이 흐리는 고통과 슬픔의 눈물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바울은 이와 같은 현상들을 예견하여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 당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
고통 당하는 자연의 신음소리가 들립니까 자연과 함께 아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 보입니까 아니면, 지금 이 시간에도 자연을 파헤치면서 개발이라는 목적을 이루어가는 중장비 기계소리에 미련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거기에 환상 두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교우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신안의 귀를 크게 여십시오. 그리고 말씀의 빛 가운데로 들어 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으로 사물을 복,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고방식을 헤아려 볼 수 있어야합니다. 다름 아닌, 개발의 기계소리 보다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상처가 나고 할퀴어서 피 흐르는 자연의 고통소리에 귀 기울여야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필연적인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오늘날의 자본주의라는 제도는 인간의 참다운 삶을 보장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민주주의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자연을 담보로 하여 국가의 물질적 부를 확대 재생산하고 국가적 욕구를 밖으로 팽창시키는 제국주의의 무한한 욕망과 결부되어 왔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의외의 다른 이데올로기나 제도들도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온 역사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특히, 자본주의가 거대한 권력들과 손을 잡고 자연을 지배해온 점은 다른 제도들이 저질러 온 그것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심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엄청난 양의 자연을 먹이로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생산된 돈은 자연을 소비재로 하여 생겨나는 또 다른 물질이고, 그렇게 하여 생겨난 돈은 인간의 욕망을 한번 더 부채질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은 과학과 자본주의라는 두 바퀴를 욕망의 수레에 달고 지칠 줄 모르게 역사를 진행시켜 왔습니다. 욕망의 수레에 달려 있는 과학과 자본주의라는 두 바퀴는 쉴 새 없이 굴러가면서 자연을 할퀴고 짓 뭉개버렸습니다. 오늘도 이 수레바퀴는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미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유토피아는 좀처럼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토피아는커녕 불안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학 이전의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합니까 기계를 모두 부숴버려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연을 보호하고, 조미료 안 먹고, 세제 안 쓰고 , 샴푸로 머리 감지 않고… 우선 떠오르는 생활 속의 지혜들을 실천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 방법들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텐데 그렇다고 성서도 우리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줄 만한 충분한 대답을 마련해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답답한 가운데에서도 성서는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매우 힘있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본문인 마태복음 19장을 펼쳐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그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우리는 오늘의 환경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예배드림에 있어서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을 귀담아 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환경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서적인 대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안이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 동안 선진국에서 이미 개발해 놓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쌓아 올린 경제적 부를 보다 가난한 국가들에게로 나눠주는 일입니다. 그런 후에 과학의 발전을 적절한 선에서 통제하고, 지구의 생명력을 유지 보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과학의 진의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국가의 엄청난 결단과 그에 따르는 무수한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어찌보면 매우 낭만적이고도 이상적인 발상인 것도 같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성서적 대안이야말로 인간이 살아남고 환경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대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라고 희망조차 버리지 말고 서로 나눌 줄 아는 세계질서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구조가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구조로 변화되어 가도록 살펴야 합니다. 성장의 환상에서 벗어나서 분배의 미덕을 가꿔 나가야 합니다.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명분 때문에 힘있는 나라에 더 이상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민족의 하나 됨을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가 한가지 결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의 요소들을 바로 잡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서, 눈에 하찮아 보이는 작은 생명들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잘못된 축복의 신앙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축복이요, 그 축복은 곧 물질의 보다 많은 소유가 아니었습니까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환경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있는 참여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소유가 곧 축복이라는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서 축복은 소유가 아닌 나눔이요 ,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에서 맛 볼 수 있는 신앙의 경험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고 국가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서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 나눔의 사랑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이 와 같은 마음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짓밟으면서 끝 모르고 달려가는 인간의 욕망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환경들에게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뒤늦게나마 맛보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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