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예수님의 눈물 행진
본문
오늘 우리는 생태학적인 위기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가 말세의 징조이므로 그런 것을 예방하거나 달리 대처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이런 태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병든 신앙인들이 우리 사회에는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야말로 비성서적이고 비복음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엔 생태학적으로 엄청난 사건이 연발하고 있습니다. 공해에 의한 대기권의 비닐하우스 현사, 제 3세계에서 살림의 무작위 벌목, 산성비, 인구의 폭발, 무한정한 경제적 장 등등이 이 지구촌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너도나도 다 죽일 테니까…’하고 체념하고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인 자세인가 당장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자연계의 파괴를 자행하는 작태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인지 아니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적인 신앙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라도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결국 그런 이를 통해서 인류의 파멸을 막는 생명지향적 결단을 내리면서 살아가는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막연하게나마 이런 사람의 자세를 ‘생태학적 신앙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적 신앙 자세란 매일, 매순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생태학적으로 생각해서 사느냐 죽는냐 하는 두 길 기운데 언제 생명의 길을 선택해서 결단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재인이나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이런 결단을 한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선택하는 자세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길임을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오늘 우리에게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다르다는 주님의 분부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해 부름 받은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스타일의 그리스도적인 영성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9-2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놓으니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정 오늘의 인류공동의 위기는 우리 앞에 놓은 생명과 축복, 밝은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하게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창조세계의 보존과 회복이라는 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불신앙과 타락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카인에게 생명보호의 표시를 주시고,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시는 은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의 사건을 통하여 그 은혜의 물줄기는 단절됩니다. (창11장). 언어를 흩으심으로 지역, 인동, 민족의 대결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창조세계의 보존과 회복을 의한 경류을 보여주시고 그 도구로 쓰셨습니다. (창 12장). 이것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요, 오늘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교회는 오늘의 창조질서의 파괴를 가져오는 죽음의 세력에 대하여 주목하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도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감람선에서 예수님을 통곡하셨습니다. 시온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뚝 솟은 성전과 허물어 졌던 성전을 다시 지은 옛 선조들이 뜨거운 정열과 충성, 그 기쁨이 가득했던 도성이 지금은 거짓과 불의, 폭력과 탐욕만이 넘실대는 심판 받을 도시,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그 도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통곡하셨고 그 도성 한복판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강산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늘 푸르고 물 맑은 금수강산,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동산입니까
예수님계서는 그 도성에서 가리워져 있는 평화와 충만한 생명을 안타까워하시며 몸소 그 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약한 도피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아니셨고, 눈물만 흘리는 값싼 감상주의자도 아니셨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오늘이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눈물, 그 호소, 그 개입은 오늘의 교회,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탐욕과 이기심,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셨고, 때의 징조를 분별하고 임박한 재난을 예비하라고 경고하겠습니다. 참 생명과 평화의 삶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섬기는 자의 모범, 생명의 존엄성과 들꽃 하나에게 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 지극히 약한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일시, 서로 사랑하라 하신 새계명,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는 온갖 폭력과 무력에 대한 심판, 결국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시기 위하여 산재물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가 심한 고통과 신음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시고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충만한 생명이 피어나는 창조의 회복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인류 생존의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맡겨주신 일들을 바로 오늘, 우리가 먼저 시작해야겠습니다. 신선하고 맑은 공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대기오염의 주범은 자동차배기가스를 줄여야 합니다. 가급적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고 자전거를 사용하며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합시다. 벌써 일본과 선진국 여러 나라에서는 이 자전거타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류 공동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에 이웃과 굶주림 속에 있는 제3세계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연대하며 간단, 검소,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유행보다는 실용성, 내 것이라는 소유충족보다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구입하고 함께 사용함으로 자원을 아낍시다. (책, 자동차, 캠핑도구, 사다리등). 에너지를 절약합시다. (실내온도조절, 물, 전기). 비싸지 않은 물건을 소중히 다룹시다(소모품). 유리, 플라스틱, 종이들을 분리수거하여 재생토록하고 쓰레기를 줄입시다. 조그만 땅, 정원이라고 이용하여 나무를 심고 야채를 가꾸며 가급적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함으로 절약합시다. 생명 있는 모든 것 자연을 사랑하고 돌봅시다. 우리의 푸른 강을 보존하고 물고기가 헤엄치게 하기 위하여 공장폐수를 고발하고, 합성세제를 쓰지 맙시다. 전체 논의 66%가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산성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비료와 농약사용을 줄이고 퇴비를 써서 약해진 지력을 회복시킵니다. 1달에 1번씩 가까운 산을 찾아 유리조각, 비닐 포장 등 쓰레기를 줍는 자연보호운동을 교회적으로 벌입시다.
미국의 생물학자 커모노 교수는 “즉각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25-30년 한에 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라는 자살적인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자연은 곧 우리 생명의 젖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 20절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회복되고,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도록 예수님의 눈물행진, 생명창조 운동에 우리 모두 참여합시다.
생태학적 신앙 자세란 매일, 매순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생태학적으로 생각해서 사느냐 죽는냐 하는 두 길 기운데 언제 생명의 길을 선택해서 결단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재인이나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이런 결단을 한다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선택하는 자세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길임을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오늘 우리에게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다르다는 주님의 분부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해 부름 받은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스타일의 그리스도적인 영성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9-2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놓으니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정 오늘의 인류공동의 위기는 우리 앞에 놓은 생명과 축복, 밝은 미래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하게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창조세계의 보존과 회복이라는 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불신앙과 타락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카인에게 생명보호의 표시를 주시고, 노아의 방주를 통하여 생명의 씨앗을 보존하시는 은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의 사건을 통하여 그 은혜의 물줄기는 단절됩니다. (창11장). 언어를 흩으심으로 지역, 인동, 민족의 대결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창조세계의 보존과 회복을 의한 경류을 보여주시고 그 도구로 쓰셨습니다. (창 12장). 이것이 곧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요, 오늘의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교회는 오늘의 창조질서의 파괴를 가져오는 죽음의 세력에 대하여 주목하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도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감람선에서 예수님을 통곡하셨습니다. 시온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뚝 솟은 성전과 허물어 졌던 성전을 다시 지은 옛 선조들이 뜨거운 정열과 충성, 그 기쁨이 가득했던 도성이 지금은 거짓과 불의, 폭력과 탐욕만이 넘실대는 심판 받을 도시,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그 도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통곡하셨고 그 도성 한복판으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강산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늘 푸르고 물 맑은 금수강산,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동산입니까
예수님계서는 그 도성에서 가리워져 있는 평화와 충만한 생명을 안타까워하시며 몸소 그 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약한 도피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아니셨고, 눈물만 흘리는 값싼 감상주의자도 아니셨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오늘이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눈물, 그 호소, 그 개입은 오늘의 교회,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탐욕과 이기심,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셨고, 때의 징조를 분별하고 임박한 재난을 예비하라고 경고하겠습니다. 참 생명과 평화의 삶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섬기는 자의 모범, 생명의 존엄성과 들꽃 하나에게 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 지극히 약한자들에 대한 사랑과 동일시, 서로 사랑하라 하신 새계명,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는 온갖 폭력과 무력에 대한 심판, 결국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시기 위하여 산재물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가 심한 고통과 신음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시고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충만한 생명이 피어나는 창조의 회복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인류 생존의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맡겨주신 일들을 바로 오늘, 우리가 먼저 시작해야겠습니다. 신선하고 맑은 공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대기오염의 주범은 자동차배기가스를 줄여야 합니다. 가급적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고 자전거를 사용하며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합시다. 벌써 일본과 선진국 여러 나라에서는 이 자전거타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류 공동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에 이웃과 굶주림 속에 있는 제3세계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연대하며 간단, 검소,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유행보다는 실용성, 내 것이라는 소유충족보다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함께 구입하고 함께 사용함으로 자원을 아낍시다. (책, 자동차, 캠핑도구, 사다리등). 에너지를 절약합시다. (실내온도조절, 물, 전기). 비싸지 않은 물건을 소중히 다룹시다(소모품). 유리, 플라스틱, 종이들을 분리수거하여 재생토록하고 쓰레기를 줄입시다. 조그만 땅, 정원이라고 이용하여 나무를 심고 야채를 가꾸며 가급적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함으로 절약합시다. 생명 있는 모든 것 자연을 사랑하고 돌봅시다. 우리의 푸른 강을 보존하고 물고기가 헤엄치게 하기 위하여 공장폐수를 고발하고, 합성세제를 쓰지 맙시다. 전체 논의 66%가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산성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비료와 농약사용을 줄이고 퇴비를 써서 약해진 지력을 회복시킵니다. 1달에 1번씩 가까운 산을 찾아 유리조각, 비닐 포장 등 쓰레기를 줍는 자연보호운동을 교회적으로 벌입시다.
미국의 생물학자 커모노 교수는 “즉각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25-30년 한에 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라는 자살적인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자연은 곧 우리 생명의 젖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 20절의 말씀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회복되고,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하도록 예수님의 눈물행진, 생명창조 운동에 우리 모두 참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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